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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던 감정 11가지, 전부 설명해드림

알아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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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첫 번째 Sonder. 당신은 지금 퇴근길 2호선 창가에 기대어 서 있습니다. 손잡이 하나 건너 맞은편에 선 사람은 이어폰을 낀 채 뭔가 자기만 아는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고 있어요. 그 사람 뒤로는 교복 입은 학생 하나가 창에 맺힌 김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그 옆에는 쇼핑백을 세 개쯤 든 중년 여성이 통화 중입니다. 어, 엄마. 그거 냉장고 맨 아래칸에 있어. 그 순간, 당신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하나 스칩니다. 저 이어폰 낀 사람한테도 오늘 아침에 싸운 사람이 있을 거고, 이번 주에 꼭 봐야 하는 드라마가 있을 거고,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첫사랑 이름이 있을 거라고. 저 사람의 인생도 지금 내 인생만큼 지독하게 생생하다고. 그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그냥 창밖 풍경처럼 스쳐가는 엑스트라라는 것까지도. 이 감정이 바로 Sonder입니다. 그냥 세상에 사람 많다랑은 다른 거예요. 내가 주인공인 줄 알고 살던 세계가 사실은 수백만 개의 주인공이 동시에 돌아가는 드라마였다는 걸 한 장면으로 깨닫는 감각. John Koenig이라는 사람이 "모호한 슬픔들의 사전"이라는 책에 정리해 둔 단어인데, 프랑스어 sonder, "깊이를 재다"에서 따왔다고 해요. 발밑이 잠깐 사라지는 느낌. 겸허해지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외로워지는. 그래서 이 단어를 처음 듣고 울었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두 번째, Hiraeth. 할머니 집 마루에 앉아있다고 해볼게요. 아니, 정확히는 할머니 집이 있던 자리에. 그 자린 이제 빌라가 올라왔고, 할머니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고, 마당에 있던 감나무는 어디로 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당신 콧끝엔 지금, 그 여름 마루에서 나던 장판 냄새가 분명히 있습니다. 매미 소리, 선풍기 고개 돌아가는 소리, 할머니가 "아이고 내 새끼" 하던 그 말투까지. 돌아가고 싶은 건데, 돌아갈 곳이 이제 이 세상에 없어요. 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이 감정이 바로 Hiraeth입니다. 웨일스 사람들이 쓰는 단어인데, "hir = 길다"는 뜻이랑 "aeth = 명사 접미사"가 붙어서 만들어졌다고 해요. 말 그대로 길고 긴 그리움. 웨일스에서 영국 사람들이 웨일스어 못 쓰게 하던 시절에, 고향 떠난 사람들 사이에서 이 단어가 더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한국어에 "향수"라는 말이 있긴 한데, 이 단어가 좀 다른 지점은요. 실제로 존재한 적 없는 고향에 대해서도 이 감정이 든다는 거예요. 가본 적 없는 외할머니 고향,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진 동네. 내 안에만 있는 풍경이 그리워질 때, 그게 Hiraeth입니다. 세 번째, Limerence. 당신은 지금, 대학교 2학년 전공 수업 강의실 뒤쪽에 앉아 있습니다. 앞에서 세 번째 줄,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 거기 그 사람이 앉아 있어요. 교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는 사실 하나도 안 들립니다. 당신은 지금 그 사람의 뒤통수와, 노트 넘기는 속도와, 아까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 사람이 지은 표정을, 머릿속에서 다섯 번째 리플레이하고 있어요. 카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면 혼자 해석하고, 안 읽은 메시지가 한 시간을 넘어가면 세상이 무너지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웃는 걸 보면 밥이 안 넘어갑니다. 좋아한다기보다, 그 사람 생각을 안 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이 감정이 바로 Limerence입니다. 도로시 테노브라는 미국 심리학자가 1970년대에 500명 넘게 인터뷰해서 1979년에 낸 책, "Love and Limerence"에서 처음 쓴 말이에요. 그냥 설렘, 그냥 짝사랑이랑 다른 점은 이건입니다. 내 의지랑 상관없이 떠오른다는 것. 공부하려고 책을 펴도 떠오르고, 친구랑 웃다가도 떠오르고, 새벽 3시에 눈이 뜨이면 바로 떠올라요. 테노브는 이걸 "침습적 사고"라고 표현했어요. 침범해 들어온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이 감정은, 상대가 날 좋아한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거짓말처럼 식기도 합니다. Limerence의 연료는 애정이 아니라, 불확실함이거든요. 네 번째, Kenopsia. 방학 중인 모교 운동장. 당신은 그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 4시, 햇빛은 분명히 따뜻한데 공기가 이상하게 식어 있어요. 작년 체육대회 때 먼지 날리던 그 자리, 쉬는 시간마다 축구공 튀기던 소리로 가득하던 그 자리에, 지금은 운동화 한 짝이 왜 있는지도 모른 채 뒤집혀 있습니다. 스탠드 위로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았다 날아갑니다. 이상한 건요, 그냥 조용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 있어야 할 수백 명의 소리가 방금 막 사라진 것 같은, 그 부재가 귀에 들립니다. 이 감정이 바로 Kenopsia입니다. 그리스어로 "비어 있다"는 뜻의 kenós에, "본다"는 뜻의 opsia가 붙은 말이에요. 그냥 쓸쓸한 거랑 다른 점은, 이건 비어 있음을 보는 감각이라는 겁니다. 공실이 아니라 얼마나 전까지 누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빈자리. 새벽 두 시에 혼자 지나가는 지하철 환승 통로, 마지막 손님 빠져나간 노래방 복도, 회식 끝난 빈 고깃집 테이블 위 소주잔. 코로나 때 유독 많이 봤던 풍경이기도 하죠.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가 없으니까, 없음 자체가 더 크게 보이는 거예요. 다섯 번째, Chrysalism. 장마철 자취방. 당신은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에어컨은 꺼져 있고, 창밖에서 아까부터 빗줄기가 꽤 세게 내리치고 있어요. 천장에서는 위집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말하는 리듬만 들립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하나도 안 들리는데, 그 웅얼거림이 이상하게 안심이 돼요. 이불 속 공기는 미지근하고, 핸드폰은 옆에 엎어져 있고, 내일 할 일은 일단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바깥은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 같은데, 여기 이 40cm 매트리스 위는 통째로 안전합니다. 이 감정이 바로 Chrysalism입니다. 나비가 번데기 시절에 들어가 있는 그 껍질, chrysalis에서 따온 말이에요. John Koenig이 이걸 "양수 같은 고요함"이라고 표현했거든요. 엄마 뱃속에 있던 그 감각. 바깥 세상이 아무리 시끄럽게 돌아가도, 나는 아직 여기 얇은 막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그 느낌. 한국어에 "아늑하다"가 있긴 하지만, Chrysalism은 거기에 한 겹이 더 있습니다. 바깥이 거칠어야 성립되는 아늑함이라는 점. 비가 안 오면 성립이 안 돼요. 위집이 조용하면 또 안 됩니다. 바깥의 소란이 내 고요의 증거가 되는, 좀 이기적이지만 솔직한 감정. 여섯 번째, Vellichor.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 어딘가, 5평짜리 헌책방 안. 당신은 그 좁은 통로에 서 있습니다. 천장까지 쌓인 책들 사이로 햇빛 한 줄기가 먼지를 비춥니다. 손 가는 대로 아무 책이나 한 권 뽑아 펼쳤더니, 속표지에 누군가가 만년필로 적어둔 글씨가 있어요. "1987년 여름, 명훈에게." 명훈이 누구인지, 그때 그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선물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책은 당신 손에 있는데, 그 책이 지나온 시간은 전부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입니다. 이 감정이 바로 Vellichor입니다. 헌책방에서 느끼는 묘한 향수. 내가 살지 않은 시간의 냄새가, 한꺼번에 코로 들어올 때의 그 감각이에요. 중고서점 체인이랑은 좀 달라요. 체계적으로 정리된 바코드 앞에서는 이 감정이 잘 안 옵니다. 먼지가 쌓여 있어야 하고, 주인 할아버지가 카운터에서 졸고 계셔야 하고, 누군가 밑줄 그어둔 문장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야 옵니다. 책 한 권 한 권이 누군가의 인생 한 장면을 통과해 여기까지 흘러왔다는 사실이, 그 공간 전체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거든요. 일곱 번째, Monachopsis. 회사 회식 2차, 고깃집. 테이블 여섯 개, 당신은 그중 하나에 앉아 있습니다. 팀장님은 옆 부서 과장님이랑 무슨 정치 얘기를 하고 계시고, 동기들은 이미 셀카를 찍고 인스타에 올리는 중이고, 맞은편 선배는 아까부터 핸드폰만 보고 있어요. 당신은 반쯤 식은 소주잔을 들고, 누가 봐도 어색하지 않으려고 애써 웃고 있습니다. 근데 웃는 근육이 묘하게 어색한 각도로 걸려 있는 게 스스로도 느껴져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싫은 건 전혀 아닙니다. 그냥 내가 여기 있는 게 어딘가 잘못 맞춰진 퍼즐 조각 같을 뿐이에요. 이 감정이 바로 Monachopsis입니다. 그리스어로 "혼자"라는 뜻의 monakhós랑, "본다"는 뜻의 ópsis가 합쳐진 말이에요. Koenig이 이걸 설명하면서 든 비유가 기가 막힙니다. "해변에 올라온 물개"라고 했어요. 물개는 물 속에서 세상 우아한데, 해변에 올라오면 몸을 어디다 둘지 몰라서 벌렁벌렁 기어다니잖아요. 그 감각이랍니다. 그냥 외로움이랑 다른 점은, 내가 있을 곳이 따로 있다는 걸 내 몸이 아는데, 그게 지금 여기가 아니라는 걸 동시에 안다는 점. 많은 사람들 속에 있을수록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에요. 여덟 번째, Mauerbauertraurigkeit. 새벽 한 시. 당신 손에는 핸드폰이 쥐여 있고, 카톡 목록을 엄지로 천천히 내리고 있습니다. 친한 친구한테서 온 "잘 지내?"라는 메시지가 사흘째 안 읽음으로 떠 있어요. 답장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답장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지금 이 사람을 이 대화방으로 초대할 기력이 당신한테 없습니다. 싫어서가 아니에요.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더 성의 있게 답하고 싶은데, 그 성의를 낼 게이지가 지금 0이라서요. 그래서 내가 나한테 벽을 쌓습니다. 내가 지은 외로움 안에, 내가 스스로 들어가 앉습니다. 이 감정이 바로 Mauerbauertraurigkeit입니다. 독일어 발음이 무슨 주문 같죠? 뜯어보면 Mauer는 벽이고, Bauer는 짓는 사람, Traurigkeit는 슬픔이란 뜻이에요. 말 그대로 "벽 쌓는 자의 슬픔"이에요. 그냥 내향인의 배터리 방전이랑 다른 점은, 밀어내는 대상이 하필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역설이에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쓸 에너지가 더 크게 느껴지니까, 오히려 더 밀어내게 되는. SNS에서 친한 사람일수록 스토리 확인이 더 부담스러운 그 느낌. 혹시 여러분도 있으시죠? 아홉 번째, Anemoia. 상상해보세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1988년 서울 종로 뒷골목을, 당신이 지금 걷고 있습니다. 머릿속에서요. 전파사 간판에 빨간 글씨로 "세운상가" 이런 게 붙어 있고, 다방 문을 열면 쌍화차 냄새가 나고, 어딘선가 조용필 노래가 반쯤 갈라진 카세트로 흘러나옵니다. 그 시절에 당신은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거리가 그립습니다. 본 적 없는 장면인데 몸이 아파 옵니다. 이게 말이 되는 감정인가 싶어요. 이 감정이 바로 Anemoia입니다. 그리스어 ánemos, 바람에서 따온 말이에요. 내가 살지 않은 시대에 대한 향수. 요즘 Y2K 패션이 다시 뜨고, 90년대 가요가 숏폼으로 도는 것도 이 감정의 현대적 버전입니다. 내가 그 시절을 산 게 아닌데, 드라마랑 사진이랑 누군가의 추억담으로만 접한 시대가, 내 안에서 진짜 기억처럼 자라버린 거예요.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레트로 카페에서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겁니다. 기억은 빌려온 건데, 그리움은 진짜 내 것이거든요. 열 번째, Occhiolism. 고개를 들어 보세요. 지방 어느 시골 마당, 마당 한가운데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당신입니다. 은하수가 보일 정도로 별이 많아요. 그 중 눈에 들어오는 별 하나를 고르고, 그게 한 개의 태양이라는 걸 떠올립니다. 그 태양 주위로 행성이 돌고, 그 중 하나엔 누군가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그리고 그런 은하가 우리 은하 말고도 약 2조 개 있다는 걸, 과학자들이 진짜로 계산해냈다는 사실까지. 당신 인생의 모든 고민이 그 2조 개 중 한 톨의 변두리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감정이 바로 Occhiolism입니다. 어원이 재밌어요. 이탈리아어 occhiolino, 작은 눈에서 왔는데, 갈릴레오가 1600년대 초 자기가 만든 현미경 프로토타입에 붙였던 이름이라고 해요. 현미경으로 처음 세포를 본 사람의 그 기분. 내가 보고 있던 세계가 사실은 한 점에 불과했다는 깨달음이 그대로 감정 이름이 된 겁니다. 그냥 허무함이랑 다른 점은, 이 감정엔 이상하게 해방감이 섞여 있다라는 거예요. 내 고민이 2조 분의 1이면, 내 실수도 2조 분의 1이잖아요. 열한 번째, Onism. 당신은 지금, 인생의 어떤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대학원을 갈지, 취업을 할지, 그 사람이랑 결혼할지, 혼자 좀 더 살아볼지, 서울에 남을지, 제주로 내려갈지. 뭘 택하든, 당신의 몸은 하나고, 하루는 24시간이고, 이 시간대의 나는 한 명뿐입니다. 그래서 한 쪽을 고르는 순간, 다른 쪽의 인생은 영원히 안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선택의 순간마다 뒤통수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계속 울립니다. 이 감정이 바로 Onism입니다. 내 몸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슬픔. 가보지 못한 나라, 만나지 못한 사람, 배우지 못한 언어, 살아보지 못한 직업. 인터넷 시대엔 이 감정이 더 깊어졌어요. 인스타엔 매일 내가 못 간 곳, 내가 못한 경험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거든요. Koenig은 이걸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수록, 내가 살 수 있는 인생이 얼마나 좁은지가 더 선명해진다." 무엇을 택하든, 당신이 택하지 않은 전부가 항상 의식됩니다. 이름 없던 것들의 이름이 생기면, 그 감정은 조금 덜 외로워집니다. 오늘 당신에게 가장 꽂힌 단어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고, 이 채널이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 한 번만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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