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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BEST 설교 | 위험한 접촉 | 수영로교회_이규현 | 마가복음 1:40-45

CTS BEST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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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오늘 본문에는 이 나병 환자가 등장하는데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질병입니다. 요즘은 나병이라고 하지 않고 요즘은 한센병이다. 예, 사람 이름이죠. 한센병으로 불려집니다. 난치병이죠? 난치병. 이 질병이 무서운 것은 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게 참 복입니다, 여러분. 이 아프면 아파야 약을 처방을 하고 또 그것을 또 예비도 하고 또 더 더 고통스러운 환경이 상황이 되지 않도록 뭔가 우리가 치료를 할 텐데 고통을 못 느끼니까 내가 내 몸에 그 고통을 느끼는 시스템이 깨어져 버린 것이죠. 그러니까 계속 나도 모르는 상황 속에 악화되는 겁니다. 썩어 가고 문들어지는 거죠. 그래서 이 브랜드, 폴 브랜드라는 분이 있죠. 필립 얀시와 함께 공동으로 고통이라는 선물 이런 책을 썼는데 그 안에 보면 이 나병을 가리켜서 고통 없는 지옥이다 그랬어요. 고통은 없는데 지옥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레이기 13장 14장에 보면 이 나병에 대해서 이미 구약 성경 레이기에 오래 전부터 이 나병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13장 14장 굉장히 길고요, 내용이 방대합니다. 예. 그 당시에도 이 나병이 많았다는 얘기죠. 어, 13장 45절에 보면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고 이 대목이 참 흥미로워요. 마스크를 썼다는 건지 윗 입술을 가렸다는 거죠. 이 비말에 대한 비말로 인한 전념을 어, 염두에 둔 예, 조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입술을 가려라. 그냥 말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라. 13장 46절에 보면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 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라고 했습니다.

[2:30]그 전염병을 가진 이 나병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나병이 들면 이제 전염병, 법정 전염병으로 분류되어서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분리를 시킵니다. 자가 격리가 아니라 강제 격리가 됩니다. 자, 강한 전염성이 있는 질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많이 좀 과장이 된 면이 있긴 합니다마는 이제 전염성을 가지고 있는 질병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죠. 그래서 철저히 고립되는 것. 가족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배척을 받고 일평생 불결함이라고 하는 딱지를 붙여야 합니다. 그래서 낙인이 찍힌 순간부터 공동체로부터 벗어나야 되는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40절에 보니까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의 치유사에게 소문이 많이 났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뭐 몰려오는데 아마 이 나병 환자도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오면 나을 수 있다라고 하는 희망이 생겨서 이제 온 것 같습니다. 자,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에게로 왔는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방영망을 뚫고 갑자기 주님에게 나타난 거죠. 어, 누군가 예수님에 대한 동선을 알려 주었던 거 같고 또 그래서 주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이 급습한 것 같아요. 그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에 예수님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자, 그래서 이 예수님의 이 반응은 41절에 나옵니다. 놀라운 예 장면이죠.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여러분 나병 환자는 지금 주님에게로 다가와서 안 되는 환자입니다. 그리고 주님도 나병에게로 환자에게 다가와서도 안 됩니다. 예, 전염병자이기 때문에 그렇죠. 자, 그런데 주님이 손을 내밀고 그에게 손을 대셨다는 겁니다. 비 대면이어야 하는데 대면을 넘어 어 접촉을 하신 것이죠. 자, 요즘 우리는 주일 예배에 QR 코드를 찍어야 들어올 수 있습니다. 아무나 못 들어옵니다. 그리고 열 화상 온도 체킹을 다 합니다. 그리고 코로나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을 방문하신 분은 스스로 자가 격리를 하도록 권면도 하고 있습니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엄격한 방역책에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근데 만약에 코로나 확진자로 진단된 사람이 주일날 갑자기 출석을 했다면, 그렇죠. 이분해야 할 코로나 확진자가 이탈하여서 주일날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와서 그래서 제가 막 악수하고 허깅하고 안수 기도까지 했다면 이 이제 그 다음 날 신문에 저도 나는 거죠. 여러분 규정에 의하면 나병 환자와 인사만 해도 복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근데 주님이 지금 규정을 어기신 거예요. 방역 지침을 어기고 갑자기 돌출 행동을 하신 겁니다. 나병 환자와 접촉하는 순간 같이 불결해집니다. 예 주님은 이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이런 종교 지자들로부터 경계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고 어떤 약점을 잡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는 주변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좋은 먹이감을 지금 제공해 주는 거죠. 근데 주님이 그런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손을 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말씀 한마디로도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근데 주님은 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손을 대셨는가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나병 환자는 지금까지 철저하게 격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외로움 그 자체죠. 나병이라고 하는 그 자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외로움이에요, 사실은. 여러분 철저히 모든 사람으로부터 가족은 물론 모든 주변의 사람들 철저히 격리된 상태로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미칩니다. 아우, 외로움은 무서운 거죠. 여러분 특별히 신체의 부위가 다 떨어져 나가는 병이죠, 이 나병은. 자기도 모르게 뭐 땅을 뭐 하는 데 손가락이 날라가고 손이 날라가고 뭐 정상이야. 혼자 머리를 깎아야 되고 혼자 밥을 먹어야 되고 혼자 모든 일을 해야 돼요. 여러분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다면 마음의 병이 더 무섭습니다.

[8:55]그래서 육체의 병이 나아도 마음의 병은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육체의 치유는 온전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것은 터치의 능력이죠. 주님은 오해를 받고 규정을 어긴 것에 대한 비관을 비난을 각오하시며 이 손을 대신 겁니다. 여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이 위험한 접촉에는 많은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벌어지는 모습들은 여러분 어떤 것입니까? 고통 당하는 자에 대한 자비가 없습니다. 코로나19로 전염병이 창궐할수록 민심이 흉흉해지죠. 지금도 이 정도 수준이니까 이렇게 가는 겁니다. 여러분 더 심해지면 민심이 어, 흉흉해지죠. 요즘 보면요 기침만 해도 눈총을 받습니다.

[9:57]아이고 그렇어. 비 대면 사회가 되면 서로를 소외시키는 거죠. 조금이라도 나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보이면 살풍경이 벌어지는 겁니다. 사실 전염성을 가진 환자의 접촉은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그렇습니다. 깨끗한 사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과 손을 대면 더러운 사람이 깨끗해지기보다는 깨끗한 사람이 더러워지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반대 현상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나쁜 사람을 만나면요 빨리 전염이 됩니다. 근데 좋은 사람 만나고 오면 그 다음날 내가 좋은 사람이 잘 안 됩니다. 이게 우리의 죄성을 갖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해도 잘 안 믿잖아요, 사람들. 근데 거짓말은요 정말 잘 믿어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인데도 그렇게 잘 믿어요. 자, 여러분 이게 이것이 죄의 모습이죠. 여러분 오늘날 이 이 바이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빨리 전염됩니까? 몇 달 동안 지금 이 바이러스로 214개국에 1천 1백만 이상이 감염되 214개국. 우리가 선교하려고 하면 214국에 파송하려고 하면 파송해서 예수 믿게 하려고 하면 이건 어마어마한 일인데 이 바이러스 보십시오. 얼마나 빨리 변하는. 여러분 죄의 감염 속도는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빠릅니다. 치명률은 더 높고요. 나병과 같은 전염성을 가진 질병에 대한 인간의 처방은 딱 하나예요. 접촉 금지입니다. 가능한 거리 두기예요. 전염성을 가진 환자에게 경계선을 정해놓고 넘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넘어오면 돌을 던지는 거죠, 문둥병자에게, 나병 환자에게. 이 세상의 모습은 뻔한 것입니다. 깨끗하지 않는 자와 깨끗한 자를 분류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와 나는 다르다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깨끗하지 않다고 여기는 그 손가락질을 하는 그 사람이 과연 깨끗한가? 사실은 깨끗하지 않아요. 인간은 다 죄인이에요. 사실은 내 안에 더 더러운 것이 있을 줄도 모른다는 거예요. 이 죄인의 특징이 뭐냐면 자기가 죄인 됨을 모른다는 거. 이 주님은 모두가 깊이하는 이 나병 환자를 기꺼이 받아들여 주십니다. 부정하다고 꼬리표가 붙은 사람을 내치지 아니셨습니다. 격리 환자로 규정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형제여, 자매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의 고통에 주목하신 겁니다. 그의 헤아림을 그의 아픔을 헤아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방목하고 질시하고 편 가르고 철저히 딱지를 붙여 사람을 매장시키는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공동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세운 겁니다. 나병 환자가 받아왔던 상처와 냉대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말할 수 없는 거절과 외면을 당해 왔을 것입니다. 근데 주님은 그를 진정으로 받아주신 겁니다. 손을 내밀어 예. 그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 분명하고 한 부에 손을 대는 순간 더러워집니다. 자, 손이 더러워지는 것, 내가 더러워지는 것, 이게 사람들이 피하는 이유입니다. 근데 주님은 당신의 정결한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손이 더러워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나병 환자의 고통에 직면하신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를 낫게 하려고 하면 내가 더러워질 수가 있습니다. 대게는 내가 깨끗하다는 것을 자랑하고 내가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나를 통하여 때로는 내가 더러워진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지난번 대구 지역에 코로나 확진자들이 폭증할 때 뉴스에 참 아름다운 미담이 있었어. 왕년에 간호사를 하셨던 분인데 이제 퇴직을 하셨습니다. 근데 워낙 그 의료진이 모자라니까 그 서울에 사는 분인데 대구로 자기가 가서 봉사를 하게 된 자원 봉사를 하게 된. 이 가족들이 다 말리는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살 만큼 살았다. 어 이 어려운 이웃들이 지금 어 어려진이 모자라는데 내가 가서 봉사하겠다. 아 뉴스 본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꺼리는 동안에 도리어 위험 지역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저희 교회도 의사분들 가운데 시간을 내어서 코로나 지정 그 병원에 한참 많이 폭증할 때 자원 봉사를 따로 시간을 줄여내어서 봉사하신 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나병 환자의 고통을 닦으며 생애를 보낸 다미안의 생애를 우리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을 깨끗하게 하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지지 않는다면 손은 깨끗하게 하 했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영혼은 더럽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은 깨끗해져 있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손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가. 어떻게 보면 더럽혀져야 정상적인 손입니다. 우리는 코로나에 의해서 우리가 많이 움츠려져 있습니다. 전염병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조심을 해야 돼요. 그러나 주님에게 우리가 배우는 중요한 삶의 원리는 위험을 선택할지라도 아니 안전한 삶이 우리의 목표는 아닙니다. 위험한 일이지만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위험한 접촉이었어요. 자, 그런데 오늘 이 주님이 나병에게 손을 대셨던 이 행동은 외적인 행동이고 그 행동을 하게 한 매우 중요한 내적인 동기가 있습니다. 우리 오늘 41절 다시 한번 봐야 됩니다. 여기 보시면 여기 매우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 다음은 무슨 단어예요? 불쌍히 여기사.

[17:03]아, 이게 줄을 끊고 또 끊고 땡땡이를 치고 아 여기에 막 야광색을 좀 칠하고 불쌍히 여기사. 주님이 이렇게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심이 한 그 모든 내적인 그 힘은 여기서 나온 겁니다. 불쌍히 여기사. 이 단어를 우리는 다른 단어로 우리가 많이 쓰는데 뭐 무슨 단어가 하면 긍휼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영어로 Compassion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긍휼이 여기다라고 하는 이 단어. 이 긍휼이 여기다라는 말은 그냥 동정심을 가졌다가 아니고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을 동반한 동반하여 공감하는 것니다. 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경험이 뭔지 잘 모르시만 애절한 거죠. 그렇죠. 그냥 단순히 아파하는 정도가 안 되고 아, 참 가슴 아프네 이 정도가 아니고 매우 강력한 감정이라는 거. 긍휼이 여긴다는 거. 주님이 지금 나병 환자에게 그냥 손을 내미시고 나아라 이렇게 하신 게 아니고 아주 강력한 마음, 강력한 마음. 예,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나는 거절하고 싶고 더러워지고 나는 하고 싶은데 당하면 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내 안에 가슴이 미어지는 거예요. 이게 긍휼이에요, 여러분.

[18:32]아, 오늘 이 설교를 하는데 이 진짜 이런 사역을 하시는 우리 귀한 선교사을 하시는 분이 여기 앉아 계셔서 내가 지금 다시 가슴이 막 물커지는데요. 진짜 그 일을 하시는 분이겠습니다. 여러분 나병을 보는 순간 이 비참한 상태의 모습입니다. 다 망가진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진 온전 버려진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냥 그래서 망가지고 썩어지고 문들어지고 냄새 나고 그냥 불결한 그 상태로 그냥 그대로 썩어 그냥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 한 존재를 바라보시며 가슴에 미어지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심장이 터지고 그냥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이 긍휼이라는 겁니다. 이 나병이라는 모습이 바로 사실은 여러분 성경을 좀 들어오면 영적으로 보면 죄로 인하여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류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긍휼히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은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라는 겁니다. 이 긍휼이라는 단어를 좀 더 살펴보면 스프랑클니즈마이라고 하는 이 몸의 내장, 뱃속을 의미합니다. 뱃속에 내장이 꿈틀거린다라고 하는 것은 감정의 깊은 곳이 슬픔을 느끼고 있다는 거. 이것은 상대의 고통에 대해서 피상적인 이해 아이고 힘들겠네 정도라는 그 가벼운 위로 정도가 아니라 그래서 여러분 이 이 긍휼의 히브리어 단어는 라카임이라는 단어인데 이 라카임이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긍휼이라는 단어. 히브리어 라카임이라고 하는. 어머니의 자궁이에요. 모든 사람은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한 때는 누구나 어떤 인간이든 어머니의 그 몸 안에 한 몸으로 있었어요. 그래서 한 여인은 고통하며 그 아이를 품고 있었고 고통함으로 나온 그 자식에 대한 엄마가 가지는 마음은 남달라요. 그래서 자식이 고통을 당하면 엄마의 자궁이 흔들리는 듯한 아픔이

[21:29]자식이 아프면 어머니는 자식의 그 아픔을 대신하고 싶은 거. 차라리 내가 겪는 게 낫다.

[21:40]우리는 지금 주님이 나병 환자를 대하는 장면에서 그 긍휼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주님은 이 손을 대시는 위험한 접촉에 가해자 파장을 모르는 바가 아니에요. 되면 이거는 당장 먹잇감입니다. 비판이 날아올 거고 또 나에게 이 몸동이 넘겨올 수도 있어요. 내 손이 더러워지는 거.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할, 손대지 말아야 할 이유가 100가지 천 가지가 되어도 주님의 행동을 막을 수 없게 만드는 그것이 긍휼하심이었다는 겁니다.

[22:17]여러분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돌을 던져도 욕을 해도 엄마는 그 엄마는 자식을 포기하지 못해요.

[22:36]자식을 위해 때로는 잠을 자지 못하고 아파하며 마음을 끌여온 그 엄마의 가슴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 기독교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 아픔은 자식이 아플 때 여인의 자궁이 흔들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것에서 짐작하게 합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 대한 당신의 마음을 충분하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기독교의 진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아들을 저주의 십자가에 매다신 하나님의 아픔을 표현해 내기는 인간의 언어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게 결정한 방식이 십자가에는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아파하시는 긍휼하심.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위험한 접촉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긍휼의 풍성하신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어요. 막난이로 살다가 어느 날 엄마의 눈물인 희생을 알고 무너지는 아들들이 있습니다. 철 없을 때는 그 엄마의 그 엄마가 무엇을 했는지 자기가 그 엄마에게 얼마나 나쁜 그 속을 썩이는 일을 했는지를 몰라요. 근데 어느 날 철이 들고 보니 그 거친 손 그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온갖 희생과 온갖 대가를 지불했던 감당하고 감내했던 그 엄마를 보는 순간 모든 게 녹아졌습니다. 오늘 주님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는 장면이야말로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멀리 있는 신이 아니라 그분은 관념적인 신이 아닙니다. 가장 거룩하신 당신의 손으로 나병의 문들어 진 손을 잡아주신 겁니다. 육신을 가지신 주님과 썩어진 육신을 가진 나병 환자의 만남이 일어났습니다. 이 접촉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죄로 병들어 죽어가는 인간에 대한 육신을 입으신 주님이 그 질병을 대신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신 것과 같은 상징적인 장면에 있어요. 그러므로 당신 단순히 치료 이상의 메시지입니다. 긍휼은 행동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너의 아픔을 나에게로 옮겨 놓겠다고 하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사건입니다. 손을 대신 이른 전과의 개념이 들어 있어요.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단어죠. 전가한다. 이사야 53장 6절에 이런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우리 모두의 죄악을 주님에게 담당시키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구약 시대에 사람들이 짐승을 끌고 제사장 앞으로 나와서 제사장에 넘겨 줄 때에 그 짐승의 등에 넘겨 준 사람의 손을 대죠. 그러면 이 사람의 죄가 이 짐승에게 전가되어 나 대신 죽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십 주님의 십자가가 그것입니다. 저주의 십자가, 인간의 모든 저주를 한 몸에 대신 짊어 주신 그리스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그 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다는 이 사건은 단순히 치유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 우리의 모든 저주, 모든 질고를 대신 지고 당신이 스스로 감당하시겠다라고 하는 십자가의 예표와 같은 겁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처럼 손을 대면 낫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터치 그 주님의 터치가 우리를 살려낸 것처럼 그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우리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주변에 인생의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사람들 오늘 코로나에로 죽어가고 있는 그냥 격리되어 살아가는 우울증에 빠져 있는 삶의 삶을 자포자기하고 포기해 버린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가 나아가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터치해 주는 어디엔가 병들어 가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주면에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는 많이 격리되어져서 우리가 그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거. 여러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외로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주변에 버려져 있는 무시를 당하고 있는 내처져 있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최근에 우리 교회가 한 십내라 상자는 참 의미가 있는 거 같아요. 이게 외국에서 지금 그 빌그레암 크루세이드 그 팀에서 했던 많은 것들 아이들을 우리가 받아서 이제 시작 우리가 용기를 내고 시작하는 겁니다. 언제든지 교회에서 박스를 안 가져가. 아니면 교회에서 받지 않아도 어떤 박스든지 싸서 내가 있는 내 정성을 다해서 사랑의 박스를 만들고 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편지를 써서 사랑을 담아 전하고 그 사랑 박스를 누구인가 전하는데 놀랍게도 우리가 닿지 않는 우리가 갈 수 없는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랑의 터치가 오고 갈 때 그에게 마음이 열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역사. 그래서 우리는 10월 달에 이렇게 러브 박스를 만드는 때가 있지만 우리는 일상화하는 겁니다. 그때가 아니라 이제는 언제든지 이제는 뭐 모여서 할 하지도 못할지도 모르겠어. 우리는 일상 속에 언제나 박스를 만들어서 언제나 교회가 주면 교회는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 이게 터치, 사랑의 터치야. 그때 병든 영혼들이 치유를 받고 고통하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죽 죽고 싶었던 사람들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의 복음을 접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면 오늘도 많은 분들이 이 이 박스를 싸서 가져오는 걸 보니까 참 감동이 됐어. 여러분 우리의 손은 깨끗함을 유지하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손이 더럽혀지더라도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끌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 위험한 집촉은 할 만한 것입니다. 자, 이제 주님이 나병 환자에게 삼과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했어. 44절에 보니까 이르시되 삼과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내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내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주님의 기적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지금 이 치유의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근데 나중에 알려 버리죠. 이 대목 가지고도 설교를 해야 될 정도로 많은 내용을 갖고 있는데요. 여러분 주님은 기적을 행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기적은 사람들의 눈에 이목을 집중시키게 하죠. 기적의 사람들이 환호합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 안에도 병 고치는 일들이 한 때 유행했던 적이 있고요. 귀신을 쫓아내는 유명한 목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기적에 집중하면요 말씀에 말씀이 잘 안 들어와요. 어, 제 친구 중에 한 명이 신유 원사가 어느 날 왔더라는 거예요. 기도는 생활을 하는데 어느 날 오 신유 원사가 막 생기는데 막 안수하면 낫는 거예요. 근데 자꾸 환자들이 몰려오더래요. 근데 무엇이 문제냐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말씀 사역을 할 수가 없더래요.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병을 낫고 싶어 하는 거예요. 병을 낫는 건 중요하지만 병을만 나으면 건 일시적인 것이죠. 영혼의 구원을 얻어야 돼요. 말씀을 듣고 영원히 치유를 받아야 돼요. 잘못된 동기로 예수를 찾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한 때 치유 사역하던 교회, 한 때 귀신 쫓는 그런 교회들이요 지금 다 사라졌어요.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왜 믿는가? 왜 교회를 다니는가? 단순한 질문이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이에요.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일주일 내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오늘 성경에 예수님이 지금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시고도 소문 내지 말라는 거.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는 거.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어요. 자, 나병은 우리 영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역시 우리 역시 나병 환자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자신이 그런 병에 걸려 있는지조차 모르는 거죠. 그런 가운데 악화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코로나가 무섭지만 진짜 무서운 것은 죄의 바이러스입니다. 죄라는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비참해집니다. 백발백중, 치명률 100%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죄가 죄인 줄 몰라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 죄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나병은 저주받은 자로 취급되었습니다. 우리는 죄는 행하나 영원히 저주받았던 자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나병 환자처럼 망가지고 썩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귀를 기울여 보면 나를 좀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코로나19로 격리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삶의 질이 떨어졌어요. 여러분 이때 우리는 교회의 역할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도하는 일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고 해서 세상에 복음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복음이 절실한 때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세상이 얼마나 비참한지. 오늘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기를 원하시는 말하면 우리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그 긍휼의 마음이에요. 그 긍휼의 마음 그 세상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마음 정지하고 단지하고 거리를 끊는 것이 아니라 이 병든 세상을 향하여 아파하는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를 주님이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세상은 지금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코로나도 심상치 않은 거잖아요, 여러분. 이 더운 여름에도 지금 마스크를 쓰고 써야 한다는 이 사실. 끙끙 앓고 있는 거죠, 이 지구촌 전체가. 여러분 우리는 이웃을 바라보면 동정심 정도가 아니라 창자가 끊어지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바울은 동족에 대한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그 동족들을 바라볼 때 이방인에 대한 사도로 복음을 전하지만 자기의 동족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그가 얼마나 정말 창자가 끊어지듯한 고통을 그는 겪었어. 그게 로마서 9장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선교나 전도가 무엇입니까? 그냥 전도지 뿌리는 게 아니죠, 여러분. 아파하는 마음, 긍휼의 마음.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나라를 넘어, 국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위험한 집촉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코로나로 인하여 세상도 그렇지만 교회도 많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단기 선교도 멈췄어요. 이제 못 갈 수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우리는 지금 이 이 계절이 되면 지금 단기 선교를 막 떠나야 될 텐데 단기 선교 스톱이 됐어요. 선교사님들이 다 한국으로 많이 돌아오겠어요. 비자를 받고 들어갈 수가 없어. 여름 봉사도 국내 선교도 지금 이주민 선교도 하려고 하니까 그것도 지금 쉽지 않다고 그래, 지금.

[35:21]자,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죠? 단순히 전염병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숨을 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 주신 모습은 아니에요. 경계를 해야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거. 주님은 위험한 접촉을 시도하셨습니다. 반대자들의 비난의 제공을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비난받지 않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난받지 않는 삶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럽혀지지 않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님은 세상에 병든 세상을 치유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위험한 접촉을 시도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를 보면 위기의 때에 더 놀라운 복음 증거의 역사들이 일어났어. 바울 사도를 우리가 보면 그의 삶은 조금도 주눅되지 않아요. 빌립보서 1장 20절로 21절을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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