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마가복음을 계속 강의를 하는데 오늘 20번째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이 점점 이렇게 늘어나고 또 예수님의 사역이 부각이 되면서 계속 사람들이 이제 많이 따르게 되죠.
[0:17]자 근데 이렇게 추종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따라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절에 보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주시하고 있다는 거죠. 목적은 고발입니다. 고발하기 위해서 주시하고 있다. 미리 각본을 다 짜 놓고 그 안에 들어오도록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 해강에 들어가셨을 때 그것도 그곳에 있던 손마른 자를 치료해 주시는 본문의 사건인데요. 이제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이 행위가 어료 행위고 이 어료 행위는 노동이라는 거죠. 안식일을 깼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참 음 이제 한 상황을 보고도 이렇게 다른 관점과 해석이 나오는 겁니다. 그 왜 그 사람 고쳐 주느냐 참 좋은 일 한다 이게 아니고 왜 안식일을 깨느냐. 이렇게 접근하는 거죠. 이 한 사람이 아프면 그 아픔으로 인하여 격년 고통과 이런 것들이 참 얼마나 그 참 치유를 받고 싶겠습니까? 당사자 입장이 되면 그럴 거예요. 이 병에서 나올 이 나음을 입고 싶은데 그 아픔과 고통을 이 돌보아 주고 또 낫게 했는데 그걸 이제 그걸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거죠. 자 오늘 이 본문은 2장과 앞부분과도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에게서 고발할 거를 찾고 있는데 이제 딱 걸려들 거예요. 자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탄식하시는 겁니다. 탄식 5절에 보니까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아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내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아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여기 보면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다는 거. 완악했다. 이 완악하다라는 이 말의 뜻은 굳어졌다는 거. 굳어졌. 마음이 굳어졌다는 거. 무관각한 상태가 됐다는 거. 이것은 영적 영적인 무지 속에서 있을 때 내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우리는 완악함이라고 얘기합니다. 2절에서는 고발할 거를 찾았던 사람들인데 2절에서는 이제 고발할 거를 찾던 사람들이 이제 6절을 보면 더 과격해져요. 6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예 고발할 거를 찾는 정도가 아니고 이제는 구체적으로 이제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고 있다는 거. 무슨 일이죠 여러분? 폭력적인 장면입니다. 이 안식일을 잘 지키자고 시작했을 텐데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자고 한 것일 텐데 결국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사람을 죽이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잔인성이지 나타나죠.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이 사울이죠 그때는 이 다메색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모습을 이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절에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그랬습니다. 여기 보니까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다는 거. 여러분 이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율법의 열심을 단 사람. 율법의 열심을 단 사람. 근데 이상하죠. 왜 이렇게 사람이 살기가 등등합니까? 위협적이고 아마 그 당시에 이 사울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물론 사리를 느끼는 거예요. 여러분 복음이 없는 곳 율법만 강조되는 곳은 이렇게 살불해요. 죽이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죠. 종교적 열심이 인간성을 다 깨뜨려 버렸어요. 예. 여러분 인간이 참 선하지 않죠. 우리는 인간이 참 우리 안에 죄성 이 죄의 잔성이 있습니다. 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다 살육극이 일어나죠. 직장 안에서도 동료들을 비난하고 또 흉 보고 왕따시키는 거 이 문화는 너무 흔하죠. 경쟁의 위치에 놓이면 더 살벌해집니다. 적을 죽이고 경쟁자를 제거해야 되는 거.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다 처리해야 되는 거. 예. 그래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살벌한 세상이죠. 다른 사람을 적으로 몰기 위해서 음해하고 흠집을 내고 거짓 거침없이 이 거짓 뉴스를 만들어 내죠. 여러분 이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당시 종교 체계를 지키고 받들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가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를 하고 있는 이 장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죽이는 영이 역사하고 있는 거죠. 특별히 바리새인들과 이 헤롯당이 평소에 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근데 이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집단이었다면 헤롯당은 정치적인 집단이에요. 근데 예수를 죽이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 악의 연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을 하던 사람들이요.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을 죽이는 의논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예수님을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의 위험성을 보는 겁니다. 이 종교 안에는 복음이 없어요. 자기 의를 쌓는 데 열심인 것이죠. 종교적 열심을 낼수록 더 위험해집니다 사람이. 자기 강화를 하는 거거든요. 자기를 높이고 또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이런 종교적 결심은 사람의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화가 안 돼요. 트랜스포메이션이 안 됩니다. 여러분 십자가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거죠. 내가 옳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적으로 몰아 죽이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늘 보는 장면인데요. 십자가의 길은 그게 아니에요. 죄인을 위해 내가 죽는 길을 선택하는 겁니다. 상대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는 게 십자가의 올리죠. 우리의 신앙이 깨어 있지 않으면 자칫하면요 악해져요. 이상해지고요. 맛이 막 가버려요.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여기에 아주 마귀의 속성이 두 가지예요. 하나는 살인하는 거. 또 하나는 거짓 빛이에요. 거짓과 살인에 같이 붙어 있습니다. 특별히 살인의 배우는 마귀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요즘 워낙 사람을 많이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니까 우리가 그것에 둔감해졌는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입니까? 그죠? 뭐 뭐 짐승도 죽이는 게 쉽지 않죠. 작은 이물도 어 하면 이게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서 못하는데 이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나요? 그것도 형제를 죽인다. 부부 사이에 살인이 일어난다? 부모와 자녀 간에 살인이 일어난다. 이게 여러분 멀쩡한 정신으로 가능할까요? 불가능한 일이에요. 불가능한 일이에요.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느냐? 부부를 어떻게 죽입니까? 본 정신이 아니에요. 살인의 영이 역사하는 거예요. 살인의 영. 마귀가 마귀가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는. 그 사탄이 역사하는 곳에는 거짓과 폭력과 저주와 죽이는 영이 막 넘쳐 흐르는 거. 여러분 세상은 어둠의 영이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폭력과 살인의 영으로 가득해요. 내가 살기 위해서 상대들을 다 죽이는 거.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더 심하리라고 생각해요. 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죠. 어떻게 이런 지경까지 사람이 망가진.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의식과 형식 제도를 지키는 데 몰두했어요.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종교화해요. 종교화. 종교화를 강화하면 사람이 세져요. 완악해진다고.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벌려요. 자기 정당화를 위한 희생양을 찾고요. 역사 속에 많은 고문 노구들이 있어요. 있는데 어 제가 한번 그 고문 기구들을 전시해 놓은 것이 있더라고요. 전시관에서 이제 역사의 유물인데 들어가 보니까 와 이거 뭐 상상을 할 수 없는 고문 도구들이에요. 이건 뭐냐 하면 가장 최고 고통을 오랫동안 지속시키면서 죽어 가기 하는 고문 도구들이라고요. 그게 어디서 만들어지냐 하면 종교 재판에서 만들어졌어요. 종교의 이름으로 고문을 행한 거예요. 아이러니죠. 어떻게 죽이는 일을 개발하는 일에 종교의 이름을 썼느냐는 거. 여러분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건 달라요. 예수님은 종교를 세워 놓으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을수록 우리는 성품이 더 순해져야 됩니다. 누가 때리면요 맞는 쪽이 돼야 돼요. 누가 욕을 하면 욕을 얻어먹는 쪽이 돼야 돼요.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가져오거든요. 세상이 갈수록 잔인해지고 냉혹해지고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이슬람이 뭐예요? 여러분 이슬람도 다 그렇잖아요. 이슬람의 근본주의자들이 문제는 이는 이로 그렇죠. 칼은 칼로 그래요. 이 복수기. 그러니까 극단적 원리주의자들은 테러를 하잖아요. 테러. 그 테러를 하고 뭐 911 그 일어날 때 그 빌딩으로 그 밀고 들어가는 이런 그 그것들이 다 교류화 되어져 있는 거거든. 사람들이 완전히 맛이 간 거예요.
[10:31]이 세계를 공포로 몰아 넣었죠. 지금. 언제나 극단주의자들이 문제예요. 관점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려 버리는 거. 그 블라인드 사이트가 많아지는 거죠. 그만큼. 역사 속에 기독교가 십자군 전쟁을 불렸어요. 이슬람과의 그 대한 싸움을 불렸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었어. 우리 편 이 기독교 편에서 죽었어요. 이 심각한 십자가 전쟁이. 십자가 곰병이라 그러는데 십자가의 원리를 심각하게 오해한 거. 기독교의 치명적인 과오였죠 사실은. 이것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너무도 거리가 먼 거예요. 주님은 산상수훈을 터해서 신자의 기본적인 삶의 원리를 명확하게 가르쳐줬어요. 언젠가 제가 산상수훈을 아주 한번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요. 마태복음 5장 38절 39절에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약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웬편도 돌려 대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유함으로 맞서야 돼요. 예. 이에는 이가 아니에요. 상대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이에요. 기독교는 세력화에서 힘 자랑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힘을 주는 게 아니에요. 힘을 빼야 돼요. 주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힘을 쓰는 자는 힘으로 망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7절에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못하면요 이전보다 더 나빠져요. 이 신앙생활이 아니죠. 종교생활을 한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종교화 되어져 가는데 사실은 내면이 더 거칠어져요. 악해져요. 그리고 자신의 그 이상한 의로움이 생겨 가지고요. 막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율법의 조항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일들을 하다 보니까 잔인해지는 거. 법조항을 여러분 늘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속이 좁아지게 돼 있어요. 정해진 틀 안에 들어오는 거 안 들어오지 않는 거. 그게 집중하는 것이죠. 이런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자기에게 적용해야 돼요. 근데 다른 사람에게 자꾸 적용하는 거예요. 이 바리새인들의 함정. 말씀을 보는데 자기 적용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거. 적용을 하되 잘못 적용한 겁니다. 이게 인간의 악함이에요.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게 아니라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돼요.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나를 보아야 돼요.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자기 성찰하고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적용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곧바로 어디로 빠지느냐면 위선에 빠지는 겁니다. 자칫하면요 교회 안에 위선자들만 바글바글 할 수 있어요. 바리새인들의 눈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로 향해 있는 거죠. 판단과 정죄는 영이 가득했어요. 여러분 교회 오래 다니다가요. 그냥 그냥 덜렁덜렁 다니다 보면요 완전 바리새인 되게 일도 아니에요. 바리새인이 멀리 있지 않아요, 여러분.
[14:06]눈과 귀가 항상 다른 사람에게로 향해 있는 거예요. 혹시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깨끗한 척하고 좋은 말은 다 골라하지만 실제로는 모순과 왜 문제 투성이 살고 있지는 않는 거. 주님은 그들에게 이제 핵심적인 논리를 가르쳐주십니다. 4절에 보니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참 중요한 질문을 탁 던지시면서 명제를 알려 주신 거죠. 초점 초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게 옳으냐. 급소를 찌르신 거죠.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에요. 자 이 주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이 뭐 꼼짝 못하죠.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랬습니다. 유구무언. 왜 이들이 잠잠했을까요? 바벨론의 여지가 없는 거죠. 여기 무슨 다른 답이 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그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죠. 속으로 칼을 가는 거. 바리새인들은 문자적인 세칙에 물두하고 있습니다. 대의를 놓친 거죠. 바벨론의 포로 시대 이후에 미시나라고 하는 문선에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가지가 나열이 돼 있어요. 사실은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런 규칙들을 깨뜨리신 거예요. 어떻게 보면 주님은 규칙 파괴자처럼 보였습니다. 안식일이라는 계명이 사람들에 의해서 너무 많이 왜곡돼 있었어요. 결국은 왜 안식일이 존재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게 돼 버렸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정확하게 브레이킹을 하신 거죠. 사실 주님은 모세의 율법을 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게 아니에요. 당시 율법사들이 막 자잘하게 나누어서 사람들을 올가매는 그 규칙들 인간의 유전을 깨뜨리신 거죠. 주님은 미리 율법을 재 해석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앞부분에 2장 27절로 28절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 명쾌한 해석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사람이었고 그 사람을 살리는 데 있었다는 거. 당연한 얘기죠. 당연한 얘기. 그 5절 하반절 이거요.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그 회복이라는 이 단어 레스토레이션이라는 회복이라는 단어. 리커버리라는 단어. 회복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적인 단어. 회복이. 안식일이 뭘 하느냐? 회복되는 날이라는 거. 진정한 안식일이 뭘로 일어났냐? 회복을 통하여 일어난다는 거. 그러니까 주님은 안식일의 목적에 맞게 행동하신 거예요. 안식일을 진짜 지키신 분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만든 법으로 사람을 죽이면 그 법을 깨뜨려서라도 살려야 돼요 사실은. 사람을 죽이는 법이 무슨 법이겠습니까? 율법을 주신 목적도 그 율법을 통하여 어디로 들어와? 우리를 생명으로 데려가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거. 법을 죽이는 법은 죽이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살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도 바로 이것이죠.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이 명확한 사람을 위하여 있다 안식일에.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게 아니에요.
[17:38]여러분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든 항상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돼요. 조직이나 사람이나 어 그거 따르는 게 아니에요. 주님을 따라가야 돼요. 사람을 따르더라도 그가 예수를 잘 따라오고 있는가를 살피고 그걸 따라가야죠. 요즘 우리는 포스트 트루 시대라고 얘기해요. 포스트 트루 제가 철학도 약간 언급했는데 이 사실과 진리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대중에 선동을 따라는 시대. 이게 경향이 오늘 시대의 트렌드예요. 자신의 기호, 자신의 이익 혹은 자신이 속하고 지지하고 있는 단체 이념을 생각 없이 따르는 거. 그것을 조장하는 게 오늘날은 인터넷이죠. 인터넷에는 거짓들로 가득해서 이미 쓰레이장으로 변해 있어요.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 많이 펼쳐져 있어요. 그 안에는 거짓과 독설과 선동과 막 이런 것들로 가득해요. 여과 장치 없잖아요 요즘. 그죠? 누구든지 다 올릴 수 있으니까. 근데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가 없어요. 근데 사람들은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하지 않아요. 객관적인 평가를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이것이 포스트 트루 시대예요. 아마 예수님 시대에 인터넷 시대라면 예수님에 관련된 기사 아래 수많은 악승된 글이 달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기에는 바리새인들이 조회수를 올리는데 일조했을 거예요. 예수 안식일을 깨는 자 죽여야 된다. 여러분 주님 말씀하신 핵심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에 선한 일 살리는 일을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는 거.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사 아래 있는 자들을 살리로 오셨어. 각종 병자들을 낫게 하시고 죄를 사하시는 일은 구원 사역의 예표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뭐예요? 회복과 살리고 치유하는 일을.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 분명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죠.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은 여러분 거짓된 인도자,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망가뜨리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에 관심 있어요. 결국은 망하게 되는 거.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시고 그 선한 목자 오신 이유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거. 그리스도는 생명에 맞춰야 돼. 생명, 생명, 생명. 어떻게 하면 살릴 것인가?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이 일을 통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인가? 그것만 몰두해야 돼요. 그게 초점을 맞춰야 돼요.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 하나님의 나라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자유와 용서를 베풀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소망을 주고. 여러분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사람을 헐뜯고 모함하고 욕하고 죽이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거예요. 요즘 코로나로 인해서 모이는 사람 모이는 일이 상당히 위축을 받고 어려움이 많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지금 뭐 언택이라고 그죠. 이렇게 컨택을 하지 않는. 그러나 이 교회의 특성은요 컨택을 해야 돼요. 컨택. 교회는 모여야 되는 거든요. 교회는 모이는 것도 그냥 모이는 정도가 아니고 이 교회의 모임이 어떤 면에서 본질적인. 교 모임 속에는 뭐가 있습니까? 코인논이야. 예. 이것은 어떻게 분리될 수 없을 만큼 아주 친밀한 교제 모든 걸 함께 하고 나누는 그런 것이 교회의 특성이거든.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 교제예요. 형식적인 게 아니에요. 근데 문제는 뭐냐면 오늘날 이 전염성이 강한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 모임들이 직격탄을 받는 거예요. 코로나는 모이면 안 되는 거예요. 모여서 막 이렇게 막 교제하면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 문을 닫느냐 여느냐로 논란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참 어려운 거죠.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한 어떤 기준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왜 교회가 존재하는가? 가장 본론적인 질문이죠. 이것은 교회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왜 존재하느냐? 크게 세 가지 크게 얘기하죠. 하나는 예배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 아웃리치예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는 나 자신을 교회가 교회 스스로 위에 존재해요. 그게 훈련이에요. 디스플린 하는 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서 훈련 끊임없이 훈련하는 거. 그리고 그래서 인리치라고 한다면 아웃리치를 해야 돼요. 교회는 교회 스스로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 복음을 증거하는 공동체로 쓰여 있어야 돼. 저 그 가운데 첫 번째 예배는 매우 중요하죠. 예배. 예배는 교회 존재 이유예요. 그리고 모여서 함께 예배하는데 이 문제가 생긴 겁니다. 예. 참 안타까운 일이죠, 여러분. 근데 또 하나 중요한 기준인데 그것은 존재 이유와 복음 증 거예요. 세상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선교적 공동체로 존재해야 된다는 거. 코로나 시대에 불가피한 상황이 교회 예배당을 닫는 일은 힘든 일이죠. 힘든 일 생각지도 못하고요. 저도 이번에 이 결정 내리고 막 다드니까 막 속도 상하고 힘들고. 또 우리 교회 성도들 생각하니까 또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이 좋은 요즘 얼마나 힘들어요. 얼마나 힘들어요. 그래도 주일 한번 예배를 드리고 힘을 얻고 하는 게 우리의 참 기쁨인데 이것마저도 지금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오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답답한 거죠. 막 제가 제 스스로 막 어떻게 이 이 분위기와 이 감정이 휩쓸리면 제가 막 다운될 것 같더라고요. 나라도 정신 차리고 이 이 기분을 좀 바꿔 놓아야지 안 그러면 디프레스 돼 가지고 있으면 교인들이 전점 시킬까 봐 그거 감정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거죠. 신자에게 예배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럼에도 닫는 것은 주일날 예배를 이 닫아야 되는 것은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 때문에. 교회가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곳이 되면 세상을 구원하는 공동체라기보다 세상의 위협을 주는 조직도로 오해 받을 수 있어요. 여러분 지금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예민해 있습니까? 막 교회가 뭐 최근에 막 막 퍼뜨리는 제고 그 어떤 원인 제공이 된 거죠. 아 실제로 교인들로 인하여 전염된 일들도 벌어졌잖아요. 우리가 꼭 예배를 교회에서 드려야 하겠다고 하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세상과 등을 지게 되고요. 세상과 고립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죠?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존재의 목력을 잃어버려요. 주일 교회 문을 닫는 일은 우리에게 너무도 힘든 일이지만 온라인으로 그래도 대체하여 일시적으로 드리는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여러분 하루 이틀 예수 믿고 끝낼 일이 아닙니다. 코로나 언젠가 끝날 거예요. 코로나 상황도 언젠가는 끝날 거예요. 멀리 가야 돼요. 그때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면서 기꺼이 교회가 그 전염이 전염병이 창궐할 때 그렇게 당신들이 기중하게 여기던 그 예배마저도 희생해 주고 전염병을 퍼뜨리지 않는 일을 위해서 협조하고 함께 시민들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손해 보고 희생해 준 거에 대해서 고맙다. 그 말을 들어야죠. 오늘 본문이 답을 해 줘요.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아닌가? 나에 대한 초점보다 생명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에 초점을 두면 답이 나와요. 오늘 본문이 정말 귀한 답이, 본문이.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교회당에서 예배를 들을 것인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들을 것인가? 중요한 일이죠. 그러나 더 중요한 주제는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할 것인가, 죽이는 일을 할 것인가? 여러분 신자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을 닫는 교회들이 문을 열어 예배하는 교회들을 비난하면 안 돼요. 온라인으로 예배를 들을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교회들도 많거든요.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예배당 문을 여는 교회들이 닫는 교회들 막 또 욕해서도 안 돼요. 서로를 판단하고 시비가 붓고 욕을 하면 그건 죽이는 일이 일어나는 거. 내가 판단하기 시작하면 상대편을 욕하고 손각질하며 살리는 일이 아니에요. 각자가 가진 각 관점과 이유가 있을 겁니다. 서로에 대해서 판단하기 시작하면 살벌해져요. 815 해방이 되고 한국 교회 안에 분열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픈 역사예요. 특히 신사 참배를 한 사람과 신사 참배를 거부한 사람들 간에 교단 간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요. 여러분 신사 참배를 거부한 일은 힘든 일이고요. 너무도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끝까지 그 일본의 압제에서 수 없는 고문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거게 굴하지 않고 신사 참배를 하지 않은 그 일이야말로 너무 귀한 일이에요. 그런데 해방이 되고 난 다음에 신사 참배하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상종 못할 인간으로 몰아가요. 신사 참배를 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어. 결국 나눠지고 깨어져 버렸습니다.
[27:56]안타까운 일이죠, 여러분. 나의 주장을 절대화하고 싸우자고 하면 그건 주님의 정신이 아닙니다. 주일날 교회당 문을 열거나 닫을 것인가?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열든지 닫든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싸우지 말고 싸이 좋게 지내는 거. 하나가 돼야 돼. 서로 사랑하고.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하라는 거.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좁아져 가고 있습니까? 그러면 종교생활 하고 있는 거예요. 지체는 꽉 막힌 사람이 되는 거. 종교화는요 인간성이 오히려 깨어져요. 비인간화 돼 가요. 무서운 사람이 돼요. 여러분 율법주의적인 부부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면요 교회를 떠나버려요. 대학 가면요 떠나버려요. 부모의 품에 있을 때 할 수 없이 약한 뭐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있지만. 왜 그렇죠? 부모의 엄격한 신앙 교육이 하나님에 대한 왜곡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방해만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신앙의 기준은 분명히 가르쳐야 돼요. 그러나 그 말씀을 따라 살지 않을 때 실수할 때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 십자가의 원리를 가지고 다뤄야 돼요. 용서와 사랑이 더 깊이 새겨져야 되는데 엄격한 규칙을 정해 놓고 숨도 못 쉬게 몰아 가면 언젠가는 튀어 나와버려요. 율법의 잣대로 그냥 그냥 아이를 몰아 가는 거 꼼짝도 못하죠. 억지로 지켜요. 그 안에는 분노가 쌓여요. 와 그 분노가 나중에 대학 가서 터지는데요. 무섭더라고요. 제가 그런 가정들을 많이 봤어요. 여러분 탕자의 비유를 위에 보십시오. 탕자의 아버지 보십시오. 둘째 아들이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잖아요. 이건 아버지에 대한 반역이고요. 돌에 맞아 죽을 짓을 한 거예요. 근데 아버지는 어때요? 유산을 줍니다.
[29:59]돌을 들지 않았어요. 율법을 들여대지 않았다고요. 아버지의 품이 넓은 거예요.
[30:23]아버지의 가슴은 너무 큰 거예요. 죽을 죄를 지었지만 아버지는 한없이 그를 품어 주는 거. 이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도 리얼하게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아버지가 큰 아들을 향해 던지는 말을 보십시오. 15장 32절에 이 내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들이 살아났다는 거예요. 근데 큰 형은 큰 아들은 율법의 잣대로 죄인과 상종도 못 할 잔치 안에 들어오지도 않잖아요. 화가 나가지고.
[31:19]여러분 사람을 죽이는 일을 도모한다면 빗나간 것입니다. 사람을 살려야 돼요. 우리의 모든 삶의 동기 행동의 동기. 교회 안에서도 여러분 마찬가지예요. 우리와 우리의 대화 속에 사람을 살리고 있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간질을 하고 파불을 만들고 적과 아군으로 나누이는 어둠의 일이에요. 꼬여 있는 걸 풀어 주는. 여러분 산상수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너희들이 제사를 제단에 재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꼬여 있는 게 있으면 화해하고 다시 와서 들으라는 거예요. 제사라고 하는 그 제도 의식에 참여하는 것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관계를 푸는 일이라고는.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고 용서를 베풀고. 문자적으로 지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이 중요한 무엇을 얼마나 이루어 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얼마나 사람을 살려 냈는가? 세워 주었는가? 오늘 우리는 이 코로나 19 상황으로 인해서 더 많은 아픔들이 밀려오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힘들어 하고요. 모두가 힘들어 하고 있어요. 이때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면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여러분 우리의 가슴이 좀 더 넓어져야 합니다.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논리 갇혀 사람을 죽이는 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탄식하셨어요. 탄식하셨어. 너희들이 그 율법의 조항에 매여 정말 큰 그림을 못 보고 있다. 차라리 안식일 규정을 깨어서라도 사람을 낫게 하는 일이 더 옳다. 여러분 복음에 접근할수록 사람이 넓어져요. 율법의 잣대로만 접근하면 좁아져요, 사람이.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사랑을 베풀고 사람을 살리고 세우고 희망을 주는 일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까? 사랑방 안에서도 이상한 소문이나 루머를 터뜨리는 진원지가 되고 다른 사람 험담이나 하고 말로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여러분. 여러분 인터넷에서도요 좋은 댓글을 많이 달아 보세요. 아 이 요즘 댓글이 문제더라고요. 아주 유명한 이 피아니스트가 막 기가 막힌 연주를 해서 모두가 탄사를 적었는데도 거기에도 막 악플이 달리더라고요. 야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빼빼 꼬여 있을까? 여러분 코로나 인해 힘든 가운데 더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이 지쳐 있어요.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베풀고 격려와 칭찬을 해 주고. 낙심한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힘을 한 곳에 들어가서 기쁨을 나누는 이런 삶을 살아야 돼요. 살리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공격적이면 안 돼요. 그리스도인 언제나 따뜻해야 돼요. 사랑은 따뜻한 것이죠, 여러분. 심성이 착해야 돼요.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심성이 착해야 돼요. 부드러워야 돼요. 똑똑해져 가는 게 아니라 따뜻해져 가야 주님을 닮아가는 거.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져요. 복음은 포용력이 대단해요. 다 품어내는 거. 그래서 우리는 복음 안으로 들어가야 돼요.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겁니다. 교회가 세상에 보여줘야 하는 것은 교회 조직도 아니고 건물도 아니고 숫자의 규모도 아니고 제도화 된 교회 기독교도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를 보여줘야 돼요. 우리가 잘못하면 세상은 예수에 대해서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욕 먹는 건 괜찮지만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욕을 당하시면 안 되죠. 예수를 놓치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말을 하든 글을 쓰든 활동을 하든 사역을 하든 회의를 하든 조직을 하든 살리는 일이 목적이야 돼. 옳은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런데 옳은 말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그 말은 옳은 말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죽이는 일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는는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나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음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 안에서 교회 문을 닫을 것인가 열 것인가?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고 논쟁하는 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희생하고 사랑을 베풀고 연약한 자들을 돕고 이웃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물질과 우리의 모든 정성을 쏟아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죠. 십자가로 돌아가는 거예요.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달라요. 언제나 파괴가 아니라 창조입니다. 창조.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코로나에 인하여 아주 힘들고 어류와 있는 이 때에 그리스도인 더 움추려들지 않고 또 어떤 불필요한 논쟁에 그냥 휘말려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오늘 우리의 주어진 삶을 통하여 이 땅에 망가지고 깨어진 것을 회복시키는 일을. 꼬여 있는 걸 풀어내는. 사람들이 더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힘을 얻도록 하는 일에 우리의 삶을 초점을 맞추고 달려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 전염병에 늘 역사 속에 일어났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전염병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내어 놓고 희생하고 그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선한 역사를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때로는 병원을 세우고 그 오히려 그 고통과 그 어려움에 있는 그 세상 안으로 들어가서 희생하는 삶을 살았어. 나만 살기 위해서 어 도피적 그런 삶을 살지 않았어. 아무쪼록 믿음의 삶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야 될 때가 오늘 시대인 줄로 믿습니다.
[38:07]온 세상에 들어가면 죽이는 영으로 가득합니다. 비판하고 정죄하고 편을 가르고 모함하고 흠집 내고 비난하고 이런 세상의 한가운데 들어와서 우리는 사람을 살려내고 분위기를 살려내고 그 모든 움추려들 것들이 활개를 치게 만드는 살만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이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는 일이 바로 안식일에 해야 될 본래의 정신임을 주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 안에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오늘도 살리는 일을 위하여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연약한 사람들의 연약한 실수를 보고 쾌감을 느끼고 비판하는 자가 아니고 아 저 연약한 분을 내가 어떻게 도와서 저분을 새롭게 하는 일에 내가 헌신할 수 있을까? 저 연약함과 저 실수를 내가 바라보며 어떻게 저를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살려내는 일에 쓰임 받는 복음의 진정한 도구들이 다 될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