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mbnail for null by null

18m 2s1,605 words~9 min read
YouTube auto captions
Transcript source

YouTube auto captions

This transcript was extracted from YouTube's auto-generated caption track. The transcript below is server-rendered so it can be read, searched, cited, and shared without opening the original YouTube player.

Pull quotes
[0:00]나르시시즘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장착하고 나오는 기본 사양이자 성장이 끝날 때까지 혹은 죽을 때까지 인간이 씨름해야 할 존재론적 숙제에 가깝습니다.
[0:00]인간이 내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내가 전능하지 않다는 것, 나르시시즘적 환상을 하나씩 깨뜨려 나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0:00]사랑하는 사람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죽도록 노력해도 실패할 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질병이나 상실을 겪을 때, 인간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게 됩니다.
[0:00]우리는 흔히 나르시시스트라고 하면 남을 괴롭히는 악인을 떠올리지만 사실 우리 내면의 인정욕구나 통제욕구 완벽주의가 모두 나르시시즘의 변종일 수 있죠.
Use this transcript
Related transcript hubs

[0:00]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잃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현대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소수의 병적인 나르시시스트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르시시즘은 '내가 대단한 존재여야만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류 공통의 심리적인 질병이죠. 나르시시즘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장착하고 나오는 기본 사양이자 성장이 끝날 때까지 혹은 죽을 때까지 인간이 씨름해야 할 존재론적 숙제에 가깝습니다. 인류의 거대한 지혜 체계는 모두 나르시시즘, '대단하다는 자아상'을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은 인간의 기본 값이죠. 정신분석가인 프로이트는 모든 아이가 1차적 나르시시즘의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습니다. 아기에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나는 전능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죠. 인간이 내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내가 전능하지 않다는 것, 나르시시즘적 환상을 하나씩 깨뜨려 나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죽도록 노력해도 실패할 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질병이나 상실을 겪을 때, 인간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게 됩니다. 이것은 라깡이 말한 주체적 박탈이자 성숙해 나가는 과정이죠. 인간이 대단한 나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정신적으로 아기 상태 즉 전능감의 환상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교와 철학 체계는 모두 나르시시즘을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불교, 인도철학은 각기 다른 언어를 쓰지만 결국 "네가 너라고 믿는 그 대단한 껍데기를 부숴라"라고 말하죠. 성경에서는 교만(Pride/Hubris) 즉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 하거나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오만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겸손의 고백을 통해서 신의 권능을 받아들이라고 말하죠. 불교철학에서는 아집(我執) 즉 나라는 고정되고 대단한 실체가 있다라는 착각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결국 무아(無我)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달을 때 인간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죠. 인도의 베단타 철학에서는 내가 한다 내가 최고다 라는 아함카라 즉 개별적 자아의식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Tat Tvam Asi) '나'라는 '작은 물방울'이기를 포기하는 순간 사실은 내가 바다 전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대단하지 않다라고 인정하며 작은 나를 버렸더니 역설적으로 우주 그 자체인 거대한 나를 찾게 된다고 말하죠. 우파니샤드에서는 인간이 에고(자아)를 사랑하는 한 그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오직 자아의 경계를 허문 자만이 온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얻는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나르시시스트라고 하면 남을 괴롭히는 악인을 떠올리지만 사실 우리 내면의 인정욕구나 통제욕구 완벽주의가 모두 나르시시즘의 변종일 수 있죠. 지적인 나르시시즘은 나는 남보다 많이 알고 더 깊이 이해한다 라는 오만일 수 있습니다. 도덕적 나르시시즘은 나는 남보다 더 깨끗하고 정의롭다 라는 우월감이 될 수 있죠. 내가 완벽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할 거야 라는 공포도 에리히 프롬이 말한 소유적 자아를 드러내는 불안으로서의 나르시시즘에 가깝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대단해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생존 본능에서 나온 방어기제입니다. 정신분석에서 인간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거짓 자기라는(false self) 요새를 짓고 살 수 있죠. 그러나 이 요새가 무너지는 재난적인 변화를 (catastrophic change) 겪어야만 진리에 가서 닿을 수 있죠. 정신분석의 끝은 나는 대단하다라는 환상을 잃고 자신의 결핍을 수용하는 주체적인 박탈입니다. 그 허무의 끝에서 인간은 생동감과 진짜 자아를 만날 수 있죠.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우리가 소유한 사회적 가면들의 총합일 뿐이다. 이 가짜 자아가 죽어야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인 핵심과 만날 수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프로이트나 라깡의 관점에서 나르시시즘은 자아를 지키기 위한 방어막이죠.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잃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5) 여기서 살고 자 하는 자 나르시시즘을 붙잡는 인간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를 완벽하고 대단한 존재로 설정합니다. 이건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는 행위에 해당하죠. 그런데 이 완벽한 이미지를 지키느라 정작 타인과 진정으로 연결되지 않고 진실과도 멀어집니다. 잃고 자 하는 자는 나르시시즘을 포기한 인간이죠. 나는 대단하지 않다. 나는 결핍된 존재다 라고 인정하게 되고 나르시시즘이라는 갑옷을 벗으면 죽을 것 같지만 비로소 외부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타인과 진실로 접촉할 수 있는 진짜 생명이 시작됩니다. 라깡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 거울 단계에서 거울 속의 번듯한 이미지를 나라고 믿고 사랑하게 되죠. 라깡이 말한 주체적 박탈은 그 거울 속 이미지가 진짜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죠.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대단한 나가 사실은 타자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껍데기임을 인정하는 것이 이 나르시시즘의 죽음입니다. 살려는 자는 거울 속의 이미지 자아나 사회적 지위 같은 상상계적 환상에 매달리게 되죠. 라깡은 인간이 자신의 근원적인 결핍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매달려온 환상을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환상 가로지르기죠. 대단한 나라고 믿었던 허상을 놓을 때 비로소 인간은 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대면하는 실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성경 구절을 그의 문학적 핵심인 '한 알의 밀알 사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서문은 이 구절로 시작하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이 구절은 카라마조프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죽음과 파멸, 죄와 부끄러움을 다루고 있죠.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존심이 죽어야 사랑이 나오고 자기 확신이 죽어야 진실이 나온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조시마 장로나 알료샤는 자신을 낮추고 타인의 죄까지 같이 짊어지려고 하고 사랑과 책임으로 살아가려고 하죠. 겉으로 보면 약하고 죽을 것 같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거기서 가장 큰 생명력이 나온다고 봅니다. 작품 속의 이반은 오만하고 날카로운 지성을 끝까지 밀어붙이지만 결국 분열되고 파멸하죠. 살려고 하는 자는 논리와 자존심을 끝까지 고수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죄와 벌]의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를 대신 짊어지고 알료샤는 사랑을 위해 헌신하면서 스스로를 낮추고 고난 속에 자신을 던집니다. 이들은 영적인 부활을 경험하죠. 세상 논리로는 살아남아야 이기고 움켜쥐어야 잃지 않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내려 놓아야 얻고 죽어야 살고 자신을 내어줘야 열매 맺는다는 역설을 그려냅니다. 그는 자아의 죽음, 교만의 죽음, 자기 중심성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열릴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죠. 인간이 나르시시즘의 전능함 그 환상에서 깨어나는 아픔을 성경은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계시들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분수에 지나치게 높아질까 봐 주께서 내게 육체 안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분수에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 일로 인하여 그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내가 주께 세 번 간구하였더니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함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함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연약함과 치욕들과 궁핍들과 핍박들과 고난들 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내가 강하기 때문이라. [고린도후서 12:7~10] 인간은 내가 완벽해지면 내가 더 강해지면 행복할 거라고 믿습니다. 이 구절에서 가시는 내가 내 삶을 통제한다라는 오만함을 사정없이 찌르는 현실의 침입입니다. 이런 찌름 없이 인간은 신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힐 수 있죠. 가시는 아프지만 인간이 타인과 연결될 수 있도록 겸손하게 끌어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자아가 내 능력, 내 자랑, 내 확신으로 꽉 차있으면 외부에 어떤 힘도 내 안으로 들어올 공간이 없죠. 바울은 연약함과 치욕, 궁핍과 핍박을 즐긴다고 말합니다. 이는 더 이상 대단한 척 할 필요가 없다라는 정직함에서 오는 해방감이죠. 세상이 아무리 쳐도 내가 이미 내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더 이상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약한 그 때에 곧 강하다] 라는 역설이죠. 선불교에서도 大死一番 絶後再甦 크게 한 번 죽어야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내가 잘났다 내가 안다 내가 존재한다라고 믿는 비대한 자아의 완전한 소멸이 있어야만 새로운 차원의 생명력이 솟아난다는 뜻이죠. 금강경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상은 현대적 의미의 나르시시즘이죠. 내가 있다, 내가 남보다 낫다 내가 대단하다 라는 상을 가지는 한 결코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스승들이 말한 죽음은 육체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의 중심이며 대단한 존재여야만 한다는 나르시시즘적 환상의 죽음입니다. 나르시시즘은 성격장애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거대한 착각이죠. 성경은 이것을 교만이라 불렀고 불교는 아상이라 불렀으며 베단타는 아함카라라 불렀습니다. 인간이 만든 그 대단한 우상인 자아상을 파괴해야 진짜 삶이 숨을 쉰다는 결론은 모두 같죠 뇌과학에서도 대단한 자아상은 뇌가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이라고 봅니다 의식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아닐 세스는(Anil Seth) 자아가 실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뇌가 신체와 외부 신호를 해석해서 만들어낸 통제된 환각이자 서사적인 이야기라고 정의합니다 대단한 나라는 나르시시즘적 자아상은 뇌가 생존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며 이 환각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현실 왜곡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뇌 과학자인 칼 프리스턴도(Karl Friston) 자아는 뇌가 세상을 예측하기 위해 세운 '가설'이라고 말합니다 뇌는 생존을 위해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이야기]를 써놓고 현실의 상황을 이 이야기에 끼워 맞춥니다 나르시시즘은 이 자아라는 가설이 너무 비대해지고 경직되면서 현실의 피드백을 거부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죠 행복을 연구하는 킬링스워스의(M. Killingsworth) 하버드 연구를 보면 이런 비대한 자아의 서사에 매몰될수록 인간은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되죠 누가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자신과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는 자들 불의한 자들, 간음하는 자들과 같이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분의 일을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자기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0-14]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도덕적 대단함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나르시시즘적 방어기제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죠 디모데후서에서도 또한 이것을 알라 즉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 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탐욕을 부리고 교만한 것은 나르시시즘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죠 주변 사람이나 진리보다는 오직 나라는 서사에만 매몰된 모습을 묘사합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기록된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을 우리 안에서 배워 너희 중에 아무도 한 사람 편을 들고 다른 사람을 반대하며 우쭐대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남다르게 구별하였느냐? 네가 가진 것 중에서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이제 네가 그것을 받았을진대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전서 4:6-7] 라고 합니다 나르시시즘은 자신이 스스로를 만들었다고 믿는 자기 창조적 환상에 빠져 있죠 내가 가진 지능이나 외모, 재능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것임을 인정하는 순간 나르시시즘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반대로 고린도전서 13장 1절은 나르시시즘을 놓아버린 상태를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것을 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1-5] 이는 나르시시즘의 반대죠 성경은 자신이 완벽하고 대단하다는 서사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짜 사랑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Need another transcript?

Paste any YouTube URL to get a clean transcript in seconds.

Get a Tran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