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내 몸이 약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예수 안에 난 완전함이라. 화려한 세상 부럽지 않은 것은 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배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완벽한 끝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고 기다리던 도움마저 오지 않아서 아 이제야말로 모든 소망의 문이 다쳐 버린 것과 같은 때가 있죠.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의 본문이 바로 그 완벽한 절망의 자리를 보여줍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나흘이라는 시간은 영혼마저 완전히 떠나 버려서 더 이상 어떤 기적도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절망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 절망의 한복판에 그리고 그 시즌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 앞에 우리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38절에 보면 주님께서 무덤 앞에서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다라고 기록을 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왜 무엇을 비통히 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일까요? 단순히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어서 슬프셨던 것일까요? 여기에 쓰인 비통이 여기다라는 단어는 원래 거칠게 콧숨을 내쉬는 모습을 표현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즉 이것은 그냥 단순히 슬프다가 아니라 분노하고 있다라는 거죠.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인간이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짓눌려서 썩은 냄새를 풍기며 죽어가는 이 비참한 현실. 무덤 앞에서 절망하며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 앞에 주님은 사망의 권세를 향해 분노하시며 애통하고 계신 것이죠. 주님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결코 구경하듯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절망 한가운데로 찾아오셔서 함께 눈물 흘리시며 사망을 향해 분노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이때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었던 마르다가 대답을 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의 이 말은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솔직한 고백과도 같습니다. 주님 이제 늦었습니다. 이미 다 끝났습니다. 내 사업도 내 자녀의 문제도 무너진 내 건강과 내 인간관계도 주님 이제는 너무나 오래되어서 부패가 날 정도로 냄새가 들 날 정도로 그렇습니다. 돌을 치워봐야 절망적인 현실만 우리가 다시 확인할 뿐입니다. 이제는 됐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은 너의 현실을 부정해라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언이시죠. 참된 믿음은 상식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상식이 받지 못하는 더 큰 실제를 신뢰하는 것이죠. 믿음은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예수님께 내 인생을 거는 것이기 때문이죠. 기적을 베푸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우리는 죽은 자를 살려낸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전적으로 무능한 자들이죠. 하지만 생명이신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굳은 불신앙의 돌을. 그러니까 이제는 안 된다라고 포기해 버린 그 체념의 돌을 우리는 치울 수는 있습니다. 오늘 이 새벽 우리 기도의 자리가 바로 내 삶을 가로막고 있고 그 절망의 돌을 치우는 그런 순종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들이 순종하며 돌을 옮겨 놓았을 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이죠. 신앙은 내가 얼마나 강하게 믿느냐 하는 나의 의지력에 달려 있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편에서 이미 움직이고 계신 그 거대한 사랑의 흐름 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은혜는 내가 무언가를 해서 얻어내는 거래가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전적인 선물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기도를 마치신 이후에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워너라. 성경은 군더더기 없이 말합니다. 죽은 자가 나왔다. 주님의 이 외침은 너도 무덤에서 나오려고 좀 노력 좀 해봐. 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시라는 거죠. 생명이 없는 곳에서 생명을 창조해 내시는 그 부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그분이 친히 하시는 그 위대한 선언이 나사로야 나아오라라고 하는 말이라는 거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이 엄청난 표적 이후에 어떠한 일이 벌어집니까?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본격적으로 결의하게 됩니다. 즉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나온 이 사건은 곧 예수님의 사형 선고와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여러분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이 부르신 이 말은 나사로야 너는 이제 살아서 밖으로 나아오라. 그리고 그 죽음의 문납, 그 저주의 십자가는 내가 대신 들어가마라고 하는 거룩한 맛 교환의 이야기였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죠. 여러분 이게 우리가 믿는 복음 아닙니까? 익사하여서 물 밑에 가라앉은 시신에게 구명 조끼를 던져 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누군가 직접 그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어서 생명을 내어줘야만 그 사람이 살 수가 있다라는 것이죠. 영적으로 나을 된 시체처럼 썩어 가는 우리를 이 절망의 무덤에서 꺼내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죽음의 무덤 속으로 그분이 스스로 들어가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의 무덤의 문이 열리고 그가 걸어 나온 순간 우리의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그 벅찬 사랑으로 골고다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고 우리여 막교환하고 계셨다라는 것이죠. 살아난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의 수족은 여전히 수위로 동염매어져 있었습니다.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죠. 생명은 얻었으나 아직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십자가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이지만 때때로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상처, 세상의 가치관, 불안과 염려라고 하는 수위에 칭칭 감겨져서 옴짝달싹 못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생명은 얻었는데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더 많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주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 인 우리에게 공동체인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풀어 놓아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율법의 시선을 거두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서로의 수위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 내 자녀를 올가 매고 있는 세상의 경쟁이라고 하는 수위. 열등감이라는 수건을 복음의 능력으로 풀어주어야만 하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의 수위를 풀어주는 것은 은혜받은 우리들의 사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45절과 46절을 보면 이제 씁쓸한 갈림길이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같은 기적을 보고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어떤 이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고발하게 됩니다. 기적을 본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죠. 왜 그럴까요? 믿음은 단지 머리로 증거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주권이 주님 때문에 바뀌는 일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도우미가 아니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인인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사실보다 예수님이 지금 내 인생의 돌을 옮기고 주인이 되시려고 하는 이 사실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신앙이든 불신앙이든 결국 핵심은 하나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냐?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냐라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버겁습니다. 때로는 정말 나을된 무덤 앞에 선 것처럼 막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인간의 절망이 끝나는 그 나흘째는 십자가의 은혜가 시작되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닫혀 있는 우리의 심령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그리고 내가 감당할 테이니 너희는 생명으로 나아오라. 이 새벽이 오늘 하루가 매일의 삶이 주님과 막교환되는 삶이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드린 말씀 기억하시면서 우리 함께 준비된 기도 제목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을 도움 주시는 분으로만 두지 않고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게 하소서. 문제 해결보다 먼저 내 마음의 왕좌에서 내려오게 하시고 주님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나흘 된 무덤 같은 상황(가정, 건강, 관계, 미래) 앞에서 주님의 나오라는 말씀을 듣게 하시고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소망으로 서게 하소서. 아멘! 정죄와 판단을 거두고 십자가의 은혜로 서로를 살리고 자유케 하소서. 상처, 불안, 세상의 가치관에 묶인 이들을 사랑으로 풀어놓아 다니게 하는 교회 되게 하소서. 아멘! 우리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14:37]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 없으리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나를 쉴만한 물가로
[15:05]오 주께서 인도하네 내가 음침한 골짜기라도
[15:18]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나를 안위해 주시네.
[15:40]오 주께서 인도하네 주님 자비와 선하심 평생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 집에 영원히 거하리
[16:08]오 주께서 인도하네. 주님의 사랑 나의 사랑.
[16:34]오 주께서 인도하네. 주님의 사랑 나의 사랑.
[17:09]오 주께서 인도하네. 주님의 사랑 나의 사랑.
[17:49]오 주께서 인도하네 주님의 사랑 나의 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