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mbnail for 세례 받으신 예수(막 1:9-11) | 이규현목사 | 주일3부 | 20.02.09 by 수영로교회 Sooyoungro Church

세례 받으신 예수(막 1:9-11) | 이규현목사 | 주일3부 | 20.02.09

수영로교회 Sooyoungro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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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어 제가 이제 마가복음을 이제 강해를 시작하는데 여러분들도 집에서 시간 나시면 마가복음을 좀 여러분 읽어 보시면 저와 함께 이 마가복음의 이 순례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 16장까지밖에 안 되니까 굉장히 사복음서에서도 가장 짧은 그러나 드라마틱한 아주 속도가 빠른 아주 흥미진진한 책이 마가복음이고요. 복음이 아주 원색적으로 들어와 있는 또 우리의 삶에 우리 신앙의 영성에 굉장히 큰 어떤 중심을 잡아주는 이 복음수가 마가복음입니다. 자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예수님의 공생애로부터 시작이 되죠. 30세의 사생활을 끝내시고 공생애 3년의 공생애, 근데 마태 이 마가복음은 공생애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자 근데 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출발을 무엇으로 오늘 시작하는가 하면 오늘 특별히 9절의 말씀인데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장면입니다. 어 오늘 이제 9절만 좀 다루려고 그러는데요. 공생의 출발이 세례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자 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가? 이게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세례를 받으신 것은 아닐 것이고 분명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받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오시니까 세례 요한이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요한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보다 훨씬 더 능력이 크신 분이 또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뿐이 지금 갑자기 자기에게로 세례를 받겠다고 오시는 거예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 이 부분에 대해서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3절로 14절에 보니까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세례 요한이 극구 말린 거죠.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2:31]자 그러나 예수님은 매우 단호하세요. 마태복음 또 이어서 3장 15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자 예수님의 그 압도하는 권세 앞에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세례를 베푸는 겁니다. 어 요한이 할 일은 순종하는 일입니다. 이제 진정한 겸손은 순종입니다. 자 예수님이 왜 세례를 받고자 하셨을까? 분명한 의미가 있을 텐데 여러분 세례란 뭐냐면 죄를 씻는 예식입니다. 근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니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죄가 없으신 분이라면 회개하실 필요가 없고 회개하실 일이 없으신 분이라면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자 예수님은 왜 그러면 세례를 받으셨는가? 죄인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신 게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죄인과 같이 되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과 같이 되셨다. 이거 참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에요. 우리는 조금이라도 내가 다른 사람과 나은 점이 있으면 나의 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를 씁니다. 그리고 나의 무죄함, 나의 의로움,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일에 몰두하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죄인과 뒤섞이는 걸 싫어합니다. 자 그런데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당신이 죄인과 동일시 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음을 보여주신 것이죠. 그래서 이 세례 받으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 세례 받으심은 십자가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의미,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메시지가 이 세례 받으신 사건 속에 있습니다. 자 우리는 예수님의 당시에 바리새인들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바리새인들은 누굽니까?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시키려고 몸부림을 친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율법적 열심은 다른 사람들과 차별성을 강조하려고 우리는 너희와 달라. 열심히 율법을 지켰지만 갈수록 배타적인 사람들이 되었어요. 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분리하는 자들이었죠. 다르게 표현하면 분열하는 자들이었어요.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서로 다름으로 인하여 서로를 거부하는 배제의 문화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크게는 인종 간의 갈등에서부터 종교 간의 갈등, 성별 간의 갈등, 계층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이념 간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 처매하죠. 아이들도 학교에 가면 왕따 문화를 경험합니다. 어딘가 속하지 않으면 왕따가 됩니다. 극단적 대립으로 갈등하고 충돌이 세상 안에는 날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들과 커다란 간격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어떻게 취급했는가 하면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겼습니다. 이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그냥 쓰레기예요. 기독한 종교적 편견을 갖고 있었던 거죠. 유대인 이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배타심은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요. 그 땅도 밟지 않았어요. 자 예수가 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모양을 갖추셨다는 것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기준을 설정하시고 그 기준에 들어오면 받아주시기로 하신 분이 아니에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다르십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기로 하셨습니다. 주님은 배타성이 아니라 수용성을 보여주셨어요. 죄가 없으신데 우리와 동일한 죄인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얼마나 그리스도가 겸손하신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세례 받으신 예수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의 중요한 어떤 완성도를 보여주시는데요. 우리가 신앙을 추구할 때 그 목적이 우리가 얼마나 잘났냐 혹은 옳은가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면 우리는 신앙의 길을 잃어버립니다. 세상은 나와 너는 다르다라고 하는 이 경쟁으로 취열합니다. 나의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하여 상대를 죽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 안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특별히 유능한 아버지를 둔 자녀들이 힘들어하는 경우들이 많아요. 아버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들을 그냥 비수를 꽂아요. 주눅을 들게 하여. 성적이 조금만 들어가도 우리 집안에 이런 돌머리가 있었나? 네가 할 줄 아는 게 도대체 뭐냐? 아버지는 너만한 때에 그럴수록 아버지와 아들의 간격은 멀어지죠.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난 너와 달라.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아들을 밀어내는 거죠. 끊임없이 밀어내요. 그러니까 성공한 아버지인 줄인지는 모르지만 매우 배타적인 아버지예요. 그러면 아들은 갈 곳이 없어져요. 그곳에서는 아들 안에 정오심만 자라가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개인주의란 뭘까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다 배제시키는 겁니다. 나만 중요하게 여기는 동안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고 배타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죄의 특성이 뭐냐? 배타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순간 서로를 포용하지 못합니다. 부부이지만 서로를 거절하기 시작하는 거죠. 원래는 그 하와를 보는 순간 아담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고 했었네. 두 사람의 관계가 그럴 수 없이 한 몸이었었는데도 불구하고 죄가 들어오므로 두 사람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를 받아들이기보다 서로를 밀어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네가 왜 홀로 숨어 있느냐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왜 고립되어 숨겨진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 현대인들이 갈수록 고립되고 불행한 삶을 걸어가고 있는 요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존하신 분이시고요.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죄인과 같은 모습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인카네이션이라고 그럽니다. 성육신이라고 하는 이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것입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모든 종교들 혹은 신화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그 초월적인 초자연적인 존재에 다가갈 수가 없어요. 멀리서 구경만 해야 돼요. 그 초자연적인 초월적인 존재에 접근 금지입니다. 근데 성육신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위치로 올라오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세상의 모든 종교들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돌을 닦아 어느 경지에 오르라고 요구합니다. 이 점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고 특별한 동굴에 들어가고 높은 경제의 수행을 요구합니다. 득도를 하라고 외치는 것이죠. 근데 여러분 기독교의 구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을 낮추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우리 안으로 오셨다는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경하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어울리셨다는 거요. 이 엄청난 얘기죠. 배타가 아니라 수용이고 포용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우리는 복음이 복음을 목격합니다. 주님은 죄인을 정죄하고 배제하는 세상에서 죄인과 같은 편이 되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자 여러분 복음이 무엇을 말해주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는 거죠. 복음이 들어가면 이런 품는, 품어내는 용량을 만들어낸다는 거죠. 십자가는 그대한 포용력입니다. 어디까지 품습니까? 원수까지. 십자가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품어내십니다. 십자가는 어떤 불의의 사람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시면 참 재밌는 것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성경에 다 나와요. 특별히 인상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의 족보는요. 깨끗한 족보가 아닙니다. 지저분한 이야기들이 사실 뒤섞여 있습니다. 죄로 얼룩진 계보죠. 족보를 캐고 거슬러 올라가면 깨끗한 과거를 가진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 무슨 의를 말합니까? 하나님의 공의의 잣대로 이야기하면 살아남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은혜보다 공의 쪽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자신이 의로워서 구원을 받은 줄로 착각합니다. 난 당신과 다르다는 의인 의식에 빠져들어 있는 거. 그리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도 판단하지 않은 자를 우리가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죠. 무시무시한 심판관들이 됩니다. 그 순간부터 다른 사람을 배제하죠. 사람들을 분류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가르쳐서 우리는 현대판 바리새주의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큰 아들과 같은 사람이죠.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 큰 아들, 돌아온 동생에 대한 냉혹함을 보입니다. 그는 자기 의로움에 빠져 있어요. 난 너 같은 인간과는 섞이고 싶지 않아. 그 아들이 돌아와 탕자가 들어왔을 때 온 집안이 잔치가 벌어지고 아버지는 흥분해서 그냥 야단인데 누가복음 15장을 보십시오. 그 큰 아들은 잔치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말아 먹은 허랑방탕한 그 아버지의 동생 그는 탕자를 포용해주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주려는 것은 뭡니까? 착한 아들이 사실은 가장 나쁜 아들이 될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겁니다. 끝도 없이 기준을 만들어 나는 너와 달라. 배타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시면서 너는 안 돼. 난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죽을 수 죽을 수 있지만 너 같은 종류 인간은 제외야. 내가 너를 위해서는 죽어줄 수 없어라고 제한한 인간은 한 사람도 없어요.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길이와 너비와 깊이는 우리가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다른 말은 포용입니다. 복음을 경험하면 속이 좁아지지 않아요. 그러나 복음에서 빗겨나면 사람들이 좁아집니다. 배타적인 삶에 갇혀 살아갑니다. 주변을 모두 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늘 그곳에는 전쟁이 벌어지죠. 오늘 이 세상이 전쟁터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정오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전쟁은 계속되는 거죠.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복음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죠. 흑인 통계에 의하면 흑인 그리스도인들이 백인 그리스도인들보다 흑인 이슬람 교인들과 더 가깝다고 느낀다는 거요. 놓친 분들이 있을까 봐 한번 더 얘기하겠습니다. 흑인 그리스도인들이 백인 그리스도인들보다 흑인 이슬람 교인들과 더 가깝게 여긴다는 거요. 이것은 흑백간의 갈등과 반복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거죠. 또 하나는 뭘까요? 예수를 믿어도 복음을 경험했어도 여전히 인종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복음보다 인종이 더 강조되는 현실의 아픔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보여주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 복음이 얼마나 광대하고 높고 넓은가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인물 중 요셉이라는 인물 우리가 참 흥미롭고요. 또 예수님과 겹쳐지는 이 복음의 메시지가 그 안에 담겨 있어요. 어린 시절 형들이 자신을 몹시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소위 말하면 배타적인 일들이 집안 안에서 일어난 거죠. 그 요셉을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형들이 결국은 요셉을 왕따를 시키고 결국은 테러 수준으로 외국으로 팔아 넘겨 버렸어요.

[17:46]세월이 흘러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이후에 만난 형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 배타적 형들과는 너무도 달라요. 두 팔 벌려 형들을 기꺼이 용서해요. 어디서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요셉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단순한 가족 간의 애정의 문제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더 큰 그림을 본 거죠. 창세기 45장 5절 말씀.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19:1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놀라운 고백이죠. 요셉은 반복적으로 지금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이 형들이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 형들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요셉은 더 큰 그림을 본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의 행동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을 본 것이죠. 그런 형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아마 형들을 만나기 전에 이미 용서가 된 상태에서 형을 만난 거요.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과 모든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복음을 드러내시려고 하고 그 복음 속에 감춰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뜻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에요.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그 사람들을 끌어안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품고 수용하고 그 길을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가슴이 더 넓어지는 풍성해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는 자가 아니라 덮어주는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람을 분리하고 나누는 자가 되지 마시고요. 바리새인들은 항상 사람들을 구분하고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넉넉하게 품어주고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하는 규정과 규칙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내치지 마십시오. 다른 곳에서는 버림을 받고 내쫓김을 당해도 교회는 품어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 내가 깨끗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다른 사람을 받아주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부모가 자녀들을 더 주눅들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요. 이상해요. 부모는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데 애들은 힘들어하는 거요. 하라 하지 말라. 율법을 갖다 대면요 애들은 주눅이 들어요. 하라 하지 말라가 아니라 사랑을 보여줘야 돼요. 마음에 안 드는 남편을 품어주고 사랑해야 돼. 교회 안 나온다고 마귀 취급하면 안 돼.

[22:15]나는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는데 당신 같은 속물과는 못 살겠다고 정죄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복음이 아니라는 거요. 자 여러분 예수의 세례 받으신 사건을 통하여 오늘 또 하나 우리가 가져야 될 것은 구원의 방식입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강에서 나오신 예수는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시고 왕 중의 왕이시고 지존하신 분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죄인의 목숨과 같이 세례를 받으셨어요. 이것은 낮은 자의 방식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높은 곳에서 계신 것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주님은 백마를 타고 팡파레를 울리고 군대를 이끌고 흰센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매우 구차하게 오셨어요.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는 낮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너무도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면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린 동정녀의 몸을 빌려 말 구유에 나시고 자라는 동네도 별 볼일 없는 곳.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면 하나도 변변한 게 없어요. 오늘 본문 9절을 여러분 다시 한번 보면요.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23:56]요한복음 1장 46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이 이 표현해요. 나사렛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나사렛 그 어디야? 이 이런 곳이죠. 그런 동네예요. 들어본 적이 없는 시골 깡촌 출신이라 너 어디서 사냐 그러면 뭐 빠리 뭐 이러면 좀 멋있잖아요. 아니 뉴욕 뭐 이러면 괜찮고요. 하다 못해 서울 하면 괜찮은데 부산 이러면 서울 사람들이 제가 서울에 신학교 다닐 때 보니까 주말에 부산 내려간다고 그러면 서울 그 주인 아주머니가 시골 내려가세요 이러더라고. 그때 나는 충격을 먹었어요 처음에는 난 대도시에 산다고 생각했는데 서울 사람들이 부산 사람을 촌 사람으로 여기더라고요. 여러분 그냥 부산이 아니고 법내골 아세요? 신암 아세요, 신암? 제 태어난 곳입니다. 태어난 곳. 공작창 건너편에 동네가 있어요, 여러분. 부산 사람도 잘 모르는데 요. 나사렛이 그런 동네예요. 그 말은 뭐냐면 주류가 아니라는 거요. 주류가 아니라는 거요. 예수님은 나사렛에서도 평범한 이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의 이력에 주목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마가는 이 마가복음을 읽는 대상을 누구를 염두에 뒀냐면 그 당시 로마인들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이 로마의 제국이 지배하던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 속에서 마가가 로마인들을 상대로 염두려 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거예요.

[26:03]그 속에서 나사렛 그 중에서도 목수 변방 중의 변방에 묻혀진 예수라는 존재는 매우 미미한 존재. 세상은 강하고 유능한 사람을 찾습니다.

[26:19]당시 유대인들은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로마로부터 식민지의 멍에를 벗겨 줄 강한 메시아를 그들은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로마의 강력한 힘을 부러워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보다 더 강력한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던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너무도 허약하고 미미한 존재였어. 그들이 원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분위기를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자신을 기꺼이 낮추셨습니다. 마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섬기는 종으로서의 예수를 놓치지 않습니다. 예수는 굴림하거나 위세를 떨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전혀 세상적인 힘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힘이 있으신 분인데 왜 힘이 전혀 없는 자처럼 행동하셨을까? 기독교 안에 승리주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통하여 승리가 주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세상적 방식으로서의 승리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근데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착각을 합니다. 11세기, 13세기까지 일어났던 길고 긴 전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하여 십자군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슬람과의 대 전쟁을 벌렸습니다. 힘을 통한 승리를 추구했습니다. 역사에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었지만 그곳에는 십자가는 없었습니다. 십자가 문양을 한 깃발은 흔들었지만 십자가의 정신과 십자가의 돈은 그곳에 없었어요. 힘의 전쟁 그들은 세상의 힘을 더 믿었고 수의 전쟁으로 이슬람과 싸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선택하신 구원의 방식은 십자가였습니다. 왜 하나님과 같이 능력이 많으신 분이 그토록 어리석게 보이는 방식인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을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굳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야만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29:01]고린도전서 1장 28절 29절로 한번 우리 보여 주십시오. 한번 띄워 주십시오. 28절 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은 자신을 부풀리죠. 과장된 이력서가 늘 문제가 됩니다. 모두 자신의 실체보다 포장된 모습을 보이려고 예를 씁니다. 더 유능해 보이고 더 똑똑해 보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모두 힘을 가져야 이긴다는 논리에 우리는 매우 익숙해 있습니다. 자기의 업적을 과장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수를 늘리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상대편을 제압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상대가 나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어딘가에다 힘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언제나 조작이 가능하고 거짓이 나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에게로 얼굴을 돌리면 전혀 달라요. 주님은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여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언제나 십자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길이 없어. 그래서 미련하게 보이죠.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2000년의 역사 속에 그것이 진리임을 하나님의 진리인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진리임을 우리에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세속적인 힘을 사용하여 유혹에 빠져서는 안 돼. 우리는 힘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힘으로 목적을 이루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방식은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아 보여요. 신자들마저도 십자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주어진 힘이 있다면 그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식 십자가로만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은 온유와 겸손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십자군의 후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군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누구입니까? 마태복음 5장 39절에 이렇게 보였어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5장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백성들의 삶의 모습은 전혀 다른 것이요. 요즘 가끔 한국 교회가 어려우니 교회들 안에도 분쟁들이 많이 일어나요. 다행히 부산에서는 제가 그런 소리를 잘 못 들었는데요. 저 위쪽으로 가면 분쟁이 많이 일어나요. 최근에 한 10년, 15년 안에 한국 교회 안에 많은 교회들 안에 분열들이 일어났어. 막 싸우는데요. 와, 대단하게 싸워요.

[32:53]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나중에는 용역도 부르더라고요. 막 바리게이트를 치고 컨테이너를 쌓고 한편은 그리스도하고 한편은 예수하고 예수와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싸워요. 그 싸우는 모습을 제가 보면 예수의 제자들은 아니에요. 조폭의 제자인지는 모르겠어요. 어떤 명분으로 싸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어. 그들은 힘을 우상으로 삼는 세상 문화의 포로들이에요.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지만 문제가 터지면 하나님의 방식보다 세상의 방식에 더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 주님은 그런 방식으로 싸우라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어. 주님은 누가 때리면 맞으라고 하셨어요. 2000년의 기독교 역사 안에는 순교의 피가 흐릅니다. 힘없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권력자의 손에 죽기도 하고 소리 한번 내어보지 못하고 지하의 감옥에서 수탄 날 신음하며 살아야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결국은 승리케 해 주시는 여러분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는 뭐가 붙어 있느냐면 부활이 붙어 있어요. 십자가에는 부활이라고 하는 승리가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 신자의 길은 처음에는 지는 것 같은데 나중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는 걸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언제나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으신 예수를 통하여 주님의 구원을 이루어 내시는 원리와 방식을 발견합니다. 십자가는 뭘까요? 힘을 완전히 내려놓는 일입니다. 주님은 힘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러나 힘을 빼셨어요. 주님은 한없이 부드러우심을 셨어요.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리스도 위에 임하셨습니다. 비둘기는 순결하고 부드러움을 상징합니다. 성령은 부드러운 영이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부드러워집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거칠고 폭력적이라면 아니올시다. 언제나 선해야 합니다.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아멘. 우리에게 주신 힘이 있다면 구원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권력과 명예와 물질이 주어졌다면 내 자신을 위하여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멋있는 자로 꾸미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섬기고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하여.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을 주지 마십시오. 힘을 빼십시오. 힘자랑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방식으로만 살아야 승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주목하셔야 됩니다. 미련해 보이지만 그 길만이 승리의 길입니다. 2000년의 역사 속에 입증한 것입니다. 미약하고 때로는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고 순교를 당하고 힘없고 연약한 자의 모습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의 원리는 오늘 2000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교회를 지금도 놀랍도록 일으키고 계시는 핵심적인 원리요 방식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의 방식을 통하여 우리의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십자가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끝으로 무기력하게 보이는 십자가로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사람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훨씬 더 탁월함을 우리가 인정하고 복음은 능력이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의 답이요 십자가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날마다 나를 낮추고 보다 더 연약한 자들을 품어내고 끊임없이 그리스도가 섬기셨던 그 종의 모습을 붙들고 살아가심으로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회복과 승리가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오늘 우리의 삶의 모든 삶의 원리와 방식들이 십자가가 되게 하시고 그 도를 쫓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셔서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케 하시는 그 은혜를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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