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mbnail for | 다시보는 BEST 설교 | 율법과 복음 | 수영로교회_이규현목사 | 요한복음14:21-24 | by CTS BEST 설교

| 다시보는 BEST 설교 | 율법과 복음 | 수영로교회_이규현목사 | 요한복음14:21-24 |

CTS BEST 설교

31m 52s2,950 words~15 min read
Auto-Generated

[0:00]오늘 십계명 서른 세 번째입니다. 마지막입니다. 십계명을 오랫동안 다루었는데요. 십계명은 단순한 윤리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통해서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새겨서 주신 이 십계명이 역사를 지나면서 고대 근동 지방에 한 부족 사회에게만 주셨던 말씀이 아니고 역사를 관통하고 모든 시대를 통틀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는 열 가지를 주신 것이 십계명입니다. 이것을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그런 선택의 메시지가 아니죠. 우리에게 절대적 기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어 절대적 기준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보면 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불행을 보면 어 기준이 무너진 것, 경계선이 모호해진 것. 이 다원주의 시대라고 그러죠. 그저 옳은 대로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각 개인이 기준이 되는. 그래서 절대적 기준을 무시하는 이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너가 너 마음대로 해. 너가 좋은 대로 해. 너 감정이 끌리는 대로 해. 네가 그냥 진리야. 막 이렇게 부추기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십계명을 낡은 윤리 교과서로 또 취급해 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만은 이 십계명은 어떤 시대에든지 우리가 붙들어야 될 핵심적인 기준이고 우리의 삶의 원리와 법칙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십계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매우 신중해야 하고 그냥 대충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번개와 천둥을 치는 가운데 십계명을 주셨는데요.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었어요. 그 천둥과 번개가 치는 가운데 그 시내산에서 모세가 이 두 돌판을 받을 때 백성들이 두려움에 찼습니다. 아마 천둥과 번개를 쳤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이 부분에 대해서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거 같아요. 이 십계명을 소홀히 다루지 말고 삶의 중심에 두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신 이 계명을 우리가 그동안 오랫동안 살펴보았습니다. 자 오늘 이 십계명을 정리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될 몇 가지 좀 붙들어야 될 그런 태도들을 점검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이 계명을 우리의 힘으로만 지키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신자라고 하면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다 있죠. 예 그래서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예를 쓰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의 현실로 들어가면 순종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합니다. 성경 공부도 꽤 오래 했고 은혜 생활도 꽤 오래 했고 또 은혜도 많이 받았고 결심도 많이 해보지만 이 말씀을 실제로 실천을 해 보려고 하면 생각같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깊은 이 뿌리 깊은 죄의 본성. 이 죄의 잔성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죄는 죄성은 늘 우리 중심적으로, 자아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부추기는 수없는 그 유혹 앞에 우리의 욕망이 쉽게 이끌리는 연약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동안 십계명을 살펴보는 가운데 어느 한 계명이라도 만만한 게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미워하시는 우상숭배, 그 죄가 나와 상관없는 것 같았는데 살펴보니까 우리가 우상숭배의 죄를 늘 짓는 거예요. 탐심이 우상숭배다. 이 신약적 개념으로 넘어오면 외적인 행위만 죄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의 죄도 심각하게 다룬다는 걸 깨닫는 겁니다. 탐심이 우상숭배다. 여러분 이 탐심이 제거되기가 얼마나 어려워요. 끊임없이 탐심이 생긴단 말이죠. 그 우리 안에 우상숭배의 죄를 끊임없이 짓는 것입니다. 미움이 살인이다. 자, 이거 얼마나 힘든 얘기입니까? 미운 인간이 자꾸 생기잖아요. 근데 그게 살인이라는 거죠. 현행범만 범죄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으로 짓는 죄. 음욕을 품는 게 간음이다. 주님의 말씀들이 위해 마음을 얼마나 힘겹게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행위만 다루면 모르겠지만 우리의 은밀하게 숨어 있는 우리의 내면의 욕망들 그 마음으로 짓는 죄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날마다 십계명을 범하고 있단 말이죠. 그리고 이 계명들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죄를 범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꼬리 꼬리를 물고 이 계명과 저 계명이 다 연결되어져서 함께 죄를 짓는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죄를 지었지만 간음죄만 지은 게 아니거든요. 자세히 살펴보면요 1계명부터 십계명은 다 범한 거예요. 자 여러분 우리 안에는 죄의 뿌리가 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우리의 영혼은 정욕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힘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계명을 우리의 힘으로 과연 지킬 수 있을까요? 노력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닫는 것일 겁니다. 처절하게 절망을 맛본 겁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내가 그 계명에 도달할 수 없다는 그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왜 주셨을까? 이 율법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죄인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가운데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는 동안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뭐냐면 정직함입니다. 정직함. 우리가 이 계명들을 내 힘으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그렇게 장담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했습니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다고 믿었던 거죠. 근데 그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주님이 보시기에는 너무도 죄가 그 안에 가득한데 외적인 행위로 자신들의 죄를 이렇게 가렸던 거죠. 여러분 우리가 가져야 될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우리의 힘으로는 이 계명을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내 몸과 마음이 너무 약합니다. 결심은 했지만 또 무너졌습니다. 작심 3일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강조되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 신앙 생활에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기도는 인간적 자만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그런 말씀을 했죠. 쉬지 말고 기도하라. 오 어떻게 일도 안 하고 뭐 다른 것도 안 하고 쉬지 말고 기도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열심히 기도 생활하라는 말씀일까요?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는 순간은 한 순간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라는 말의 의미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가 깨닫는 것은 뭡니까? 죄와 싸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 도리어 죄에 더 빠져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않는 바 악을 내가 날마다 행한다. 자 여러분 이웃 사랑이 얼마나 힘이 든가요? 이웃 사랑.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용서하라.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여러분 원수를 사랑한다는 거 쉽던가요? 원수가 안 있었어 몰랐습니까? 여러분 원수는요 진짜 원수가 있으면 사랑하는 거 어려워요.

[9:43]척은 할 수 있는데 진짜 사랑은 어려워요. 어떻게 사랑하기 근데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지난주도 서로 사랑하라. 얼마나 어려운 거예요, 여러분. 공동체 안에서도 마땅히 사랑할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는 거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거예요, 사실. 그것은 기적인 거죠.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거 그 기적이에요. 근데 그 기적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 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순종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율법 앞에 이 십계명을 들여다 보면서 그 하나하나 우리가 지켜내게 우리가 지켜낼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 그래서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요. 하나님 은혜 주십시오. 나의 연약함으로는 도무지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도무지 이 계명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요.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 우리가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게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라는 거죠. 자 아무리 계명을 지키고 노력하지만 불순종하고 또 불순종해요. 자 우리는 그러므로 율법 앞에 주눅이 듭니다. 율법 앞에 서면 나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무능함을 느낍니다. 그동안 한 계명을 세 번씩 다루었습니다. 세 명씩 세 번씩 한 계명을 좀 디테일하게 다루니까 어떤 데는 좀 더 깊이 들어갈 때가 있었습니다. 아 그러니까 어떤 데는 어떤 분이 아 십계명, 십계명 언제 끝나느냐는 거예요. 막 마음에 짐이 되고 부담이 되고 주눅이 되고 힘들다는 거예요. 왜? 지금 자신이 그런 죄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게 계속 다루어지니까 어떤 주일은 아예 안 나가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율법 앞에 서면요 자유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우리 모두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어쩌면 율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이 율법을 통하여 율법은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하는 겁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는 거죠.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우리는 죄인이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요 진노 아래에 있는 백성들. 철저히 그 율법 앞에 무능함을 깨달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 죄인됨을 느낄 때 우리로 하여금 주님에게로 초대하는 거죠. 우리의 모습을 정직히 바라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율법 앞에서 소망이 없는 우리가 붙들 것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하는 것. 이것이 율법이 우리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율법 앞에 서면 소망이 없고 절망 쓸 수밖에 없지만 그 지점에서 율법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요? 복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이 왜 좋은 소식이죠?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돌려 놓는 능력이기 때문에. 복음이 아니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거.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고 예를 써 본 사람들이라면 복음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느끼고 절망할 때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예요. 우리가 십계명을 통하여 날마다 이 십계명의 말씀을 받으면서 이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을 다 지키지 못했을 때 우리가 피할 곳이 어디예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예요.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은혜를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행위로 행위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항상 불안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얻을 수가 없어요.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자신의 죄 문제 앞에 늘 처절하게 고통을 했어. 이 마틴 루터가 특별히 죄에 대한 아주 민감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죄에 대한 죄를 짓고 나면 그것 때문에 고해성사를 하러 가는 거죠. 고해성사를 하니까 그 주임 신부죠. 날 너무 자주 오니까 이 마틴 루터가 너무 자주 오니까 고해성사를 뭐 그렇게 날마다 오니까 짓는 적시 오니까 제발 고만 하라. 너무 자주 온 게 나중에는 성경을 좀 읽어 봐라. 뭐 여러 가지 얘기를 했어요. 마틴 루터는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너무도 많은 노력을 하고 교회가 제시하는 모든 것을 다 지켜 보았지만 기쁨이 없었어요. 심지어는 빌라도 계단이라고 하는 곳에 무릎으로 수행 고행을 하는 거죠. 고행을 피를 절절 흘리면서 무릎으로 그 계단을 올라가면서 주기도문을 막 외우면서 이 죄로부터의 이 양심의 아픔을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을 모든 행위를 다 하지만 기쁨이 없었다는 말이야. 근데 어느 날 성경을 읽는 가운데 로마서 1장 17절에서 번쩍 눈이 뜨여지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거. 우리 인간의 행위에 의한 의인은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제시하신 그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6:56]이 기가 막힌 이신득의의 진리를 깨닫고 종교 개혁의 기치를 드는 데 매우 중요하게 쓰여졌던 구절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종교 개혁 500주년 우리가 맞고 있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 이 진리에 그동안 그 잘못된 진리, 왜곡된 진리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아무리 해결을 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 근데 이 로마서 1장 17절을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깨달은 거예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나타내신 그 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믿을 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이게 여러분 중세 시대의 역사를 가르는 기가 막힌 오늘 개혁주의 개신교의 신앙의 중심 진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는 이 구절을 통해서 자신을 그동안 괴롭혔던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에 기치를 듭니다. 복음이 그를 완전한 자유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하고 낙심할 때마다 좌절하고 절망하지 말고 그 약심하고 절망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돼요?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됩니다. 우리의 지은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다는 겁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얼마나 기쁘고 복된 소식인지 몰라요. 이 복음이 오늘 우리의 행위에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은혜를 여러분들의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자 그러면 복음이 있다고 우리는 막 살아도 되는 것인가? 아니에요.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우리가 해야 될 하나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연 죄 그 자체보다 그 짓고 난 다음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중요해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길을 열어 놓은 회개하면 용서를 받는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가 편리하다고 말합니다. 늘 죄 짓고 또 용서를 구하고 또 죄 짓고 또 용서를 구하고 참 편리하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러나 우리에게 열어 놓으신 양편이에요.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어.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믿고 시고 의로사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케 해 주시는 은혜. 자 그런데 여러분 이 회개를 직접 해보면요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회개의 자료로 잘 나아가지를 못해요. 죄 죄를 지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흔한 모습이 뭐냐? 죄를 숨기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속에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숨기는 역사였어. 자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죄를 축소시켜 버리고 겸하게 자기 방어를 해요.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종교라고 하는 열심을 통하여 자기들의 죄를 숨긴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솔직해지기가 어렵습니다. 이유는 십자가를 의지하기보다 사람들을 더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기 때문에. 여러분 회개는 뭘까요?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힙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겨 버리면 우리는 어둠 가운데 거하게 되고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신앙의 위기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회개가 줄어들거나 형식적이거나 아예 회개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얼라쩌면 오늘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딜레마일 수도 있습니다. 온전하지 않는 회개는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연속적으로 죄를 반복하여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순환이 일어나는 이유는 회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정직한 회개가 없기 때문에 죄의 악습을 끊어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면 회개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고 그 회개는 정직하고 온전한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회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번 언급은 한 적이 있습니다만은 칸 영화제에서 여주 여우 주연상을 받은 영화 미량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앙의 문제를 이창동 감독이 잘 다룬 적이 있습니다. 주인공 시내가 남편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남편의 고향의 미량으로 미량으로 내려갑니다. 예. 뿌리가 이 미량이 영어 이름으로는 멋있더라고. 시크릿 선샤인 그러더라고요. 한글 말로 하니까 약간 촌스러움이 있는데 영어로 하니까 아주 멋있어요. 그 미량으로 내려가서 아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근데 그곳에서도 불행이 계속 되죠. 어느 날 아들이 유괴를 당하고 마침내 살해됩니다. 이 고통 속에 절망하던 이 시내가 우연히 어느 교회에 부흥에 참여하게 되죠. 그리고 그곳에서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살아가게 되는데 교회에 많은 성도들이 날마다 이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이 말씀. 설교에서도 그렇고 또 우리 주변에서도 자꾸 그러니까 어느 날 이 시내가 마음에 결단을 하고 이 아들을 죽인 유괴범이 갇힌 교도소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시내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지만 용기를 내고 그 유괴범을 향하여 하나님이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당신을 용서한다. 이 말을 하죠. 근데 유괴범은 아주 평안한 얼굴로 시내에게 이 말을 합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시내는 갑자기 말로도 다 할 수 없는 충격에 빠져 버립니다. 그리고 교도소를 그 순간 뛰쳐 나오죠. 그리고 길거리에서 쓰러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내내 방황을 해요. 네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내가 너를 용서해 주기도 전에 네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자 여러분 이 영화를 통해 말해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을 죽인 유괴범의 모습에서 뭔가를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가 죽고 난 다음에 겪었던 그 주인공 시내의 그 절망과 분노와 고통 속에 뒹굴었던 그와는 전혀 상관없이 유괴범은 너무도 천영덕스럽게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흉악한 죄에 대한 통렬한 각성 없이 종교적 수로를 남발하고 있는 끔찍함을 꼬집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뭘까요? 그의 회개는 유괴범의 회개는 가짜일 것이라는 무원의 암시가 있어요. 그래서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가 한 가정에 행한 불의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는 거죠. 문제는 무엇입니까? 너무도 중대한 것을 너무 쉽게 다루고 있는 이 경박성을 지적하는 거죠. 특별히 죄의 문제에 대한 태도가 그렇습니다. 미량이라는 영화를 통해 불신자들이 본 기독교의 한 단면을 꼬집고 있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용서하러 갔던 시내마저도 그의 신앙도 의심스러운 것이고 유괴범 역시 제대로 된 해결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또 주변에서 권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역시 너무 가벼운 태도로 심각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에 영화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불신자들이 본 기독교에 대한 어떤 한 단면에 대한 지적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죄의 심각성.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폐해. 거기에 대한 깊은 참회가 빠져 버린 종교적 수로로 그 문제를 피해 가려고 하는 이 얄팍함을 얘기하는 거다. 왜 죄를 반복해서 지을까요? 반복적인 죄의 습성은 결국 온전한 회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형식적 입으로 발린 회개. 그것은 또 다른 죄의 습관을 낳게 되고 그 죄의 습관에 악은 구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겁니다. 단순히 일회성 죄가 아니라 죄의 습관이 무서워요. 죄의 반복은 잘못된 회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회개, 자기 만족에 거친 회개는 삶을 바꾸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거죠. 다윗의 밧세바 사건도 좋은 실례입니다. 그의 범죄는 역사 속에 덮혀지는 듯 했습니다. 세월은 1년 정도 흘렀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회개 시들을 살펴보면 다윗은 회개하지 않았던 날들에 그가 겪었던 정신적 영적 고통은 말로다 할 수가 없어요. 표연적으로는 누를 수 있으나 내면에서는 깊은 고통을 더해 주는 것. 어쩌면 다윗은 나단의 지적 앞에서 죄를 회개했지만 더 이상 죄를 누르고 살 수 없을 만큼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던 양심의 가책들. 그래서 나단 선지자의 지적 앞에 그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다윗은 왕이지만 자신의 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하죠. 그리고 참된 회개를 통하여 그는 다시 살아납니다. 여러분 인간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지은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 위대성이 나타납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의롭게 살아왔는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거나 다른 것들로 은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진실되고 깊은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회개를 가볍게 취급하는 사람은 죄도 가볍게 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변화 없는 신앙의 반복은 결국 회개의 깊이가 약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를 가볍게 다루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깊은 회개. 그 깊은 회개는 우리의 자아가 통렬하게 깨어지는 경험을 하고 그 깨어짐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곧 나의 의를 붙들지 않고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를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은혜를 입은 것은 나의 최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열심 때문인 것이죠. 그래서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30:41]우리가 넘어지고 또 넘어지지만 결국은 우리로 승리의 자리에 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손길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실수하고 넘어지면 두려워하지 말고 솔직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이 기꺼이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시며 우리를 의롭다 하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명령은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오늘 십계명은 오늘 우리 시대의 축복입니다. 이 계명을 붙잡고 실천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할 때 하나님이 힘 주실 것이고 때로는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우리는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정직하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얻고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을 더 사랑하기로 노력하고 애를 쓰면 이 계명은 결코 무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넉넉히 순종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아멘. 십계명 그것을 다시 한번 붙들어 오늘 혼란한 이 시대 속에 기준이 분명한 인생으로 승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Need another transcript?

Paste any YouTube URL to get a clean transcript in seconds.

Get a Tran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