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 이 소위 율법사들, 또 제사장들, 그런 종교적 무리들이 있었죠. 특별히 이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을 세분화하는 일에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으로부터 받았던 십계명, 열 가지 계명을 그들은 더 아주 세분화시키는 그런 작업을 했습니다. 어 몇 개까지로 열 가지를 세분화했는가 하면 613가지로 열 가지를 그렇게 세분화 세칙을 만들어 놓은 거죠. 거기에 보면 하라라고 하는 이 적극적 명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 200만 여덟 개로 분류를 시켰고 하지 말라라고 하는 소극적 명령을 어 300 어 신 다섯 개로 아, 예순 다섯 개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근데 이 사람들은 열 600여 세 가지로 나눈 것도 부족해서 계속 더 나누기를 원했던 거죠. 왜 그렇게 나누려고 했는가 하면 좀 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세칙을 많이 나눈 거죠. 어 그런데 이게 간단한 것이 십계명을 간단한 게 너무 이제 많이 나누다 보니까 이 복잡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복잡해지면 특징이 뭐냐면 본질이 흐려져요. 핵심이 뭔지 이게 에 알기 어려워지니까 이제 바리새인들이라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언제나 그들의 논쟁이 뭐냐면 이 많은 계명들 가운데 어떤 게 가장 중요하냐. 이제 자기들끼리 그렇게 또 나눠 놓고 보니까 복잡해지니까 이제 서로 그거 가지고 이제 토론하는 게 그들의 일이었어요. 자 오늘 이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나와서 질문을 던지는데 질문 자체는 굉장히 좋은 질문인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의 저의가 아주 좀 불순해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트릭을 이제 놓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의 여부에 따라서 예수님을 또 다른 어떤 이렇게 흠을 잡기 위해서 다가온 것입니다. 그 그 질문이 뭐냐면 율법 중에 어느 것이 큽니까? 어느 계명이 큰 계명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 속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냐? 이 질문 속에서 예수님의 그 답변을 통해서 신앙의 핵심이 뭔가 이제 이런 것을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좀 알게 해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신앙이 뭐냐 이렇게 딱 한마디로 물으면 대답이 어떤 안 나올 수가 있어요. 신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는 것은 어떤 외적인 행위를 많이 생각합니다. 뭐 교회를 출석하는 문제, 주일 성주의 문제, 십일조 하는 거, 봉사하는 거, 선교하는 거, 뭐 훈련받고 뭐 이런 것들을 떠올립니다. 또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에 대해서 물으면 과거에 한 10년, 20년 신앙생활에 대해서 물으면 뭐 어느 교회 다닌 얘기를 해요. 교회를 어느 교회를 다녔다. 어 그 교회에 내가 몇 년 다녔다. 그때 목사님이 어떤 분이었다. 설교를 되게 못했다 문제 예를 들면 뭐 그런 스토리가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생활의 어떤 부분이 그거 그 내용으로 이제 일관합니다. 또 어떤 데는 건축을 했다. 헌금 생활을 또 내가 어떻게 했다. 뭐 이제 이런 얘기들입니다. 또 남자분들 같은 경우에는 신앙 생활을 얘기할 때 나는 술 담배를 안 한다. 뭐 이런 것들이 또 신앙생활에 하나의 또 굉장히 중요한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떻게 신앙의 어떤 핵심이고 본질적인 것이냐?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바리새인들도 보면은 그들이 여러 가지 세칙을 만들다 보니까 막 잡다한 막 여러 가지 일들을 나름대로 수칙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몸부림을 쳤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들이 신앙에 어 신앙이라고 할 때는 어떤 이런 나눠진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이 신앙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613가지 정도로나 나눠질 정도면 열심 있는 사람들이고 정말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애를 썼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렇게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썼던 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 분노하시고 때로는 굉장히 강력한 책망을 하셨단 말이죠. 예수님 시대에서 예수님이 가장 싫어했던 부유가 이 바리새인들이에요. 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613가지나 열 가지를 나누어서 그렇게 세칙을 만들어서 섬기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느냐 이거예요. 그렇게 애쓰고 노력했는데 예수님이 보시는 관점은 전혀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경우는 예수님은 대놓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깨버리셨어요. 의도적으로 의도적으로 여러분 나병환자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도록 그렇게 금지해 놓은 것을 주님은 어떤 때는 손을 대세요. 나병환자의 손을 대시는 거예요. 그 금지해 놓은 것을 브로큰 깨버리신 겁니다. 또 어떤 때는 안식일에 대한 규정들이 굉장히 많은데 안식일을 의도적으로 범하셨어요, 예수님은. 예수님이 안식일 날 병자를 안 낫게 안 하셔도 되는데 안식일에 병자를 낫게 하는 일들을 하셨어요. 근데 그런 것들은 안 이 안식일에 관련된 규정에 의하면 세칙에 의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은 다른 날 하셔도 되는데 안식일 날 일부러 그런 병자를 낫게 하는 사건을 통하여 바리새인들의 심기가 건드려지는 거예요.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은 그 당시에 돌로 쳐 죽이는 율법이에요. 근데 예수님은 그를 용서해 주는 일. 이건 뭡니까?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았던 어떤 규칙을 깨 버리신 겁니다. 자 이런 것들이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과의 사이에 굉장히 충돌이 일어나고 긴장 관계가 일어났습니다. 자 이것은 근본적으로 뭔가가 큰 거대한 충돌이 일어나고 있고 뭔가 다른 관점과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주님의 대답은 명료하고 선명해요. 613가지로 가지고 늘어놓고 정신없는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딱 요약 정리를 해 주시는 거예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주님은 성경을 꿰뚫고 계시고 신앙의 중심부를 건드리고 있는 본질을 건드리고 있는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던 율법사들과는 달리 너무도 선명하고 단순하고 명료해요. 자 여러분 주님이 오늘 이 율법의 종류에 대해서 늘어 놓는 게 아니라 신앙의 중심 원리를 말씀하고 있어요.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양보할 수 없는 프라이오리티다. 이렇게 말씀하는 거예요. 근데 그게 뭐냐?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거예요. Love God.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거예요. 근데 그냥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선명한 기준을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들에게 일격을 가했어요. 자 여러분 여기에서 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십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행하고 있느냐라고 하는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고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를 보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형식에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지는 것이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러나 익숙해지는 가운데 찾아오는 유혹이 뭐냐면 내 형식은 있는데 내용이 없는 거예요.
[8:24]형식만 있고 내용은 빠져버려요. 그때 뭐가 되느냐면 내용은 빠져버리고 형식만 남아 있을 때 그것을 가르쳐 우리는 형식주의다 그래요, 이 말이에요. 왜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가장 열심을 다하던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과격할 정도로 책망하셨는가? 그들 안에 뭔가 내용이 빠져버리고 형식만 더 걸이 남아 있다. 여러분 이 바리새인들은요. 기도 시간이 되면 하루에 세 번씩 오고는 정기 기도 시간만 되면 가다가도 시장이나 뭐 어디 입구에서 그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한 번만 해도 되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을 했어요, 금식. 열심이었어요. 근데 그런 열심들이 외적으로는 있었지만 주님이 보시는 관점은 그 내면의 세계를 보면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는 거. 자기들은 그 형식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켜 나가는 것에 익숙하지만 겉으로는 굉장히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그 열심히 지키는 외적인 행위에 스스로 만족을 얻고 스스로 자기 의로 삼고 그것을 자랑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으로부터는 사실은 멀어져가고 있는 모습이에요. 여러분 이 이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아 있을 때 어떻게 되느냐면 그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고 형식만 남아 있는 종교 행위가 되는 거예요. 생명을 가진 신앙의 삶이 아니고 외적인 껍데기만 남아 있는 종교적 행위가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종교로 빠질 가능성이 많아요. 이 종교로 빠지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것은 껍데기가 돌아가는 거지 그 안에 내용을 담고 있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종교 생활이라는 건 뭐냐면 진심 어린 마음이 없이 규격화된 외적인 행위의 반복을 하면 종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올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주일 날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을 하고 이런 것들이 어떤 의무 규정으로 외적인 행동으로만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종교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종교화 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뭐냐면 내 안에 그 일은 행하고는 있지만 그 행위에 기쁨은 없어요. 그 행위의 어떤 뭐 예배라고 하는 행위면 그 행위 안에 내 안에 즐거움이 없단 말이에요. 그 안에 열정이 살아나지 않아요. 뜨거운 감정이 없어요. 즐거이 하는 게 아니에요. 마지못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외식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런 어떤 의식에 참여하는 그 종교라고 하는 게 그래요. 이게 안 하면 좀 찝찝하고 하자니 그렇게 즐겁지도 않고 그러나 그냥 안 하면 또 뭐 이게 좀 뭔가 두려운 마음도 있고 그러니까 하기는 안 하는데 그 안에 자발성이 없고 그 안에 기쁨이 없는 거예요. 그게 종교의 특징이에요, 여러분. 중요한 것은 내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고 있는 예배냐. 이게 이게 중요한 거예요. 예배 안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인카운트가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하는 거예요. 영적인 어떤 접촉이 일어나고 있느냐. 영적으로 하나님과 소통이 일어나고 있고 하나님의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인 만남이 이루어 일어나고 있느냐. 이 생명의 연결이 오늘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느냐는 거죠. 찬양을 부르는 가운데 말씀을 듣는 가운데 기도를 하는 가운데 예배의 자리에 있는 가운데 하늘과 땅이 이어지고 내 심령과 하나님의 마음이 통회되어서 정말 통증이 일어나는 그래서 영적인 접촉과 그 일들을 통하여 생명의 기운이 내 안에 오고 가는 것들을 느끼면서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하늘의 평화와 기쁨이 내 안에서 흘러넘치고 세상에서는 죽을 것 같았지만 교회에 와서 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 안에서 내 안에 소망이 일어나고 기쁨이 일어나고 다시 살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고 있는 영적인 기운이 하나님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느냐. 내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이어지는 영적인 교통이 실질적으로 일어나야지 외적인 의식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전적으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이고 특별히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판단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세계예요. 여러분 나 자신을 보면 알 거예요. 영적인 민감성을 가지고 자꾸 내가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가 내 영의 신앙의 내용을 갖고 있는가를 점검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그 껍데기에 속아서 내가 신앙이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뭐가 일어나요? 위선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를 안 믿는 바깥 세상에서는 위선이라는 게 없어 위선이라는 단어가 없다고요. 뭐 그냥 그대로 사는 거지. 근데 우리는 아닌 것처럼 자기를 꾸미는 포장이 자꾸 늘어난단 말이죠. 내용은 없는데 자꾸 그들 강화하고 그들 멋있게 만들어 나가면서 내가 뭔가 있는 것처럼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이 자기를 속이는 거고 남을 속이는 거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아무것도 아닌 종교의 행위가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면요. 외형적으로는 날마다 제사를 드렸어요, 날마다. 상번제 같은 거는 매일 드리는 제사예요. 한 번도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고 제사를 드렸는데 나중에 보면은 그 열심과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던 그 백성들의 마음 안에 뭐가 있냐면 우상숭배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실 때는 뭘 다루시느냐? 우상숭배를 가지고 다뤘어요. 왜 우상숭배입니까? 하나님을 섬긴다라고 하는 그 제단에 어느 날 변질된 겁니다. 종교화 된 거예요. 하나님과의 접촉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결국은 엉뚱한 것을 섬기는 하나님의 제단이 우상을 섬기는 제단으로 바뀌게 되니까 하나님이 그 민족을 치시고 바벨론 아수르로 애굽으로 고난을 당하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구약 선지자들은 이 우상숭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행음한 여인으로 비유를 해요. 행음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여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는 거예요. 세상을 사랑했다는 거예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는데 마음은 내게서 너무도 멀다. 너희들의 제사를 내가 받지 않는다. 그 제사에 내가 질렸다 표현을 써요, 어떤 때는. 와, 무서워요.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뭐냐? 우리의 진심 어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그런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런 표현을 써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서 몇 번 나옵니다. 질투라는 단어는 인간적인 단어죠.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불꽃 튀는 어떤 감정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나는 질투하는 여호와다. 이렇게 표현을 써요.
[15:54]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설정해 주는데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에요. 여러분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1대 1의 관계예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1대 1로 대하세요. 사람이 굉장히 많이 오셨어도 하나님은 1대 1로 만나시는 분이에요. 여러분 사랑의 행위는 1대 1이에요. 삼각 관계가 없어요. 삼각 관계를 만들 때 그것이 우상숭배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어떤 사람이 아내와 같이 그 길을 가다가 자꾸 다른 여자를 자꾸 쳐다보고 이렇게 하면 당연히 아내가 신경이 날카로워지죠.
[16:37]뭐 뭐 뭐 그래도 뭐 아내가 막 우리 남편은 온 세상의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집 아내들도 다 사랑하고 마음이 너무 넓은 남편이라고 그러면 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질투는 사랑의 관계에서 아주 예민하게 일어나는 반응이에요. 여러분 대충 사랑하는 관계라면 질투할 것도 없어요.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 깊이 사랑 안에 들어갈수록 그 안에 아주 작은 감정의 파장도 서로가 느껴요. 여러분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깊이 들어가신 분은요 아주 작은 것도 내 마음이 빼앗긴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이 표현은 의유나 의인화한 것이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속된 감정을 갖고 계신다 이런 표현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가 강렬한가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피조물의 다른 어떤 것과 비교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 보세요. 우리가 어떤 찬양을 부르고 있느냐보다 그 마음. 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고는 찬양 그 자체에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분이 아니고 그 부르고 있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정말 그 마음을 갖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라는 이 표현은 하나님 우리와의 관계 속에 더없이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구약 성경을 보면 다윗과 같은 사람이 문제가 많고 허물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굉장히 귀하게 보셨던 이유 중에 하나가 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간절해요. 시편들을 보면 그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들이 깊은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사단이 하는 주요 사역은 뭐냐면 어떤 일에 열심히 내느냐 안 내느냐 그게 사단이 별로 관심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과 얼마나 간격을 가지고 있느냐. 그 틈을 내는 일에 사단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우리와 사이에 어떤 틈도 용납하지 않으세요. 왜요?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는 거. 성도 여러분, 신앙의 본질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신앙이 깊어진다는 게 뭘까요, 여러분? 신앙이 깊어진다는 건 딴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사귐을 통하여 하나님의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깨달아가고 그 사랑이 내 안에 더욱 더 부어지는 역사를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과 반응이 우리에게 흘러나오게 될 때 그것이 신앙의 변화요 인격의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이라도 외적인 껍데기만 남아 있지는 않는지 의무적 수행에 몰두하고 있지는 않는지. 사람들의 평가에 내가 그냥 목을 매고 있지는 않는지. 그 모든 것 다 내려놓으시고 다 내려놓으시고 우리가 하는 헌신과 희생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흘러나오는 아주 부수적인 산물에 불과해요.
[20:06]우리의 신앙의 핵심으로 들어가야 돼요. 여러분 신앙은 부담이 아니에요. 억지로 예배 여러분 억지로 예배드리는 분들. 요즘 뭐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뭐 되는 게 없고 그래서 오늘 예배 가야 되겠다. 여러분 예배는 액땜이 아니에요. 헌금은 하나님 앞에 뇌물이 아니에요, 여러분. 복채도 아니에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선도 아니에요. 사랑의 고백이에요.
[20:38]여러분 의무로 하는 거 너무 힘든 거예요. 의무로 하는 거 너무 힘들어. 예배가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 봉사가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 무슨 사역이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 기쁨으로 여러분 율법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돼요. 바리새인들은 너무도 열심이었어요. 근데 꽝이에요, 꽝. 우리 주님이 보실 때 껍데기만 있는 거예요. 내용이 없어요. 그래서 회칠한 무덤들아. 겉은 막 그 당시에 여러분 무덤들을 그렇게 회칠을 많이 했다는 거예요. 하얗게. 안은 그냥 썩어 있는 건데. 형식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율법주의의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지. 사실 우리 한국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굉장히 많아요. 하긴 하는데 그 안에 즐거이 기쁨으로 신이 나게 하는 그런 신앙의 행위가 아닌 그 삶을 살아오니까 이게 또 하나의 이중 과세가 된 거예요. 주일 날 또 가야 되나. 그래서 오늘 어떤 사람들은 주일이 주일이 아니고 기억자가 하나 더 붙는 주일 날. 뭐 이렇게 주일이 자주 다가오냐. 없는 집에 제사 찾아오듯이.
[22:04]힘겨운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 잠기게 되면 하나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분이 없고 그 사랑에 마땅한 내 삶의 반응과 표현들을 할 때 여러분 내 생명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기가 막힌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누가 봐도 참 멋있고 신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수영로회가 우리 모든 성도들이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저는 하루에 6번 설교하지만 너무 신이 나요. 그래서 5분 전에는 성경책을 들고 기다리고 빨리 나오려고. 신앙은 즐거운 것입니다. 행복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랑보다도 가장 강력하고 가장 놀라운 농도 짙은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이에요. 아멘. 그 사랑을 마음껏 경험하시고 푹 빠지시기를 바라고 그 사랑에 이끌려 주를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