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우리 저는 이제 마가복음을 오늘로 마 여덟 번째 그렇게 했습니다.
[0:09]자 그런데 지금 마가복음의 중간에 와 있습니다. 16장까지인데 오늘 8장이잖아요. 중간에 와 있습니다. 어 그리고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의 사역도 상당히 지금은 이제 반환점을 넘어서서 이제 마지막 십자가로 가까이 가고 있는 상황에 이제 도달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도 굉장히 전환점에 이르렀던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어 십자가가 가까이 오고 또 죽음이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는 이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자들의 신앙을 점검하시려고 하는 장면이죠. 일종의 제자들에게는 종합 시험과 같은 것입니다. 그동안 집중 배우고 배운 것들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평가를 하도록 이제 하는 작업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지상의 사역을 마치고 부활 성천하시면 지상에 남겨두어야 될 제자들의 신앙의 상태 그 신앙의 퀄리티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딱 두 가지입니다. 문제 출제 유형 복잡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질문입니다. 하나 첫 번째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아느냐? 제자들은 당신 사람들 가운데서 벌어지는 예수에 대한 논쟁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예수에 대한 얘기로 무성하게 했죠.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 능력 이것은 파장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이 예수가 누구냐 그런 논쟁들을 했겠죠. 이제 그런 들었던 얘기를 이제 나에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에 대해서 완같 오해와 또 착각과 그리고 추측으로 남무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그가 세례 요한이다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근데 웬 세례 요한입니까? 죽은 세례 요한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누구가 이런 일을 할까요? 누가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 얘기했을까요?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과 사람들. 주로 여러분 사람을 죽인 사람은 그 죽인 사람의 환영과 같은 것을 시달려요. 마치 내가 죽었는데 살아날 것 같은 다시 살아나서 내 목을 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져요. 이게 살인을 행한 사람들의 고문이에요 고문 스스로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지레 죽어요 사실은 남을 죽인 사람은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이게 지금 세례 요한을 죽였던 헤롯과의 사람들은 오이구 세례 요한이 살아난 거 아닌가? 죽인 자가 다시 살아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자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아닌가? 이 말라기의 예언에 나온 것이거든요. 말라기에서 마지막 예언이 엘리야가 장차 나타날 것이다. 또 들은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다.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얘기를 제자들로부터 듣고 난 다음에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첫 번째 질문은 대충 넘어갔어요 사실은. 진짜 질문은 두 번째 질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아느냐? 주의 관심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닙니다. 떠드는 예수님에 관련된 가십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이 아니에요. 얼마 전에 오병예의 사건으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지지율이 아직도 있냐? 그렇게 물으신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알고 싶었던 것은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따라다녔어요. 근데 그 따라다닌 사람이 헛소리하면 안 되죠.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던 사람들 그들은 다른 얘기를 해야죠. 풍문을 듣고 얘기하면 안 되잖아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어떻게 표하느냐 그건 중요하지가 않아요. 세상의 여론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평하는 건 자유에요. 중요한 것은 우리 예수들을 믿는 우리가 예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신자는 그냥 나오는 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영혼 없는 대답을 해서는 안 되죠.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남의 얘기 하듯해서는 안 된다는 거요.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오늘 이 질문은 2천 년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지만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하는 질문입니다. 이 이 답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집니다. 제자는 스승이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야 그분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자 근데 이 베드로가 먼저 딱 답을 이제 하는데요. 이 베드로의 고백은 유명한 고백이 되었죠. 오늘 29절에 보니까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로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이다 하매. 자 마태복음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보니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자 이 고백은 간단한 고백처럼 보이지만 믿음의 대상에 대한 탁월한 답변입니다. 자 주는 그리스도시요 할 때 첫 번째 주라는 겁니다. 주 로드라는 겁니다.
[6:04]자 여러분 이 예수님이 질문을 던지신 이 장소가 어디인가가 참 중요합니다. 어디에서 이 질문을 던지셨느냐? 여기를 우리는 빌립보 가이사라 빌립보라는 도시에 자 여기에 이 빌립보라는 도시의 이름을 하나 붙였는데 가이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황제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도시는 로마의 황제의 권세가 찌르고 있는 하늘을 찌르고 있는 곳입니다. 그 도시의 이름을 황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말은 그 황제의 권세가 그 도시의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황제를 숭배하는 그대한 성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대 사회의 왕은 곧 신입니다. 로마의 황제를 부를 때 우리는 퀴리우스 주라고 표현합니다. 절대적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모든 공급이 황제로부터 온다. 이것을 백성들이 믿었던 거죠. 황제들이 왜 그대한 신상을 만들었을까요? 절대적인 힘을 강 강요하며 백성들을 억압하는 통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대한 신상을 만듭니다. 가이사 외에는 다른 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주님이 지금 이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아느냐?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제자들은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경이롭고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어요. 제자들은 충분히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목격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41절에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7:58]여기 주라는 이 표현은 주인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하면 주라는 이 표현은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세상의 권세가 그분 아래에 있다. 그분만이 유일한 주인이시다. 이 이것을 베드로는 처음 고백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시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시요. 여러분 그리스도는 타이틀이에요 타이틀 헬라어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스 히브리어로는 이 그리스도를 메시아라고 표현합니다.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다. 이 말은 뭡니까? 당신은 당신은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동안 예언자들이 그렇게 지목했던 그분이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때로부터 기다려왔던 메시아이십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동안 모든 약속이 성취되십니다. 약속의 주인공이셨던 분이 오셨고 그 약속을 곧 성취하실 분이시다는 거요. 그래서 온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대신하고 담당하사 죽으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실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구원자로서 구원을 완성하실 분이시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에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당신이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풍랑을 잠잠하게 말씀으로 잠잠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오병이여로 5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일을 행하셨던 그분은 단순한 위인이 아니고 위대한 인물 정도가 아니고 그분은 능치 못할 실이 없으신 엘샤다의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리스도는 그러므로 이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할 때 이 그리스도는 인성이 강조된 것입니다. 100%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은 신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자로서의 완벽한 조건은 그분이 완전한 인간이셔야 되고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셔야 됩니다.
[10:29]바로 베드로의 이 고백은 그러므로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는 것 여러분 이 놀라운 고백을 베드로가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베드로를 칭찬하시죠. 마태복음 16장 17절 보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내가 복이 있도다. 이를 내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바요나 시몬아 내가 복이 있도다. 여러분 예수에 대한 올바른 고백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은혜예요.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실력이기보다는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그런 엄청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시라는 거죠. 여러분 성경을 읽고 연구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으로 예수를 부인하고 조롱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을 연구한다는 신학자들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오래 출 출석했다고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없어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우리의 입을 열게 하시고 성령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셨다는 거요. 그러므로 여러분 베드로가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정확히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백을 듣고자 하셨고 그 고백을 우리가 오늘 우리가 받아들이는 거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고백으로 신앙의 고백으로 신앙을 드러내야 되는 거요. 여러분 고백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다양한 고백을 하죠. 그 고백은 자신의 입장을 드러냅니다. 신앙은 고백이에요. 고백은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랬습니다.
[13:05]여러분 마음에 있는 것을 입으로 입증해 보여야 합니다. 결혼을 하려고 하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고백을 해야 합니다. 고백이 있어야 결혼이 성사가 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함께 인생을 하고 싶습니다. 멋 등등 고백이 중요해요. 고백이 없으면 성사되지 않습니다. 결혼식에서도 결혼 서약 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백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죠. 반지를 끼워주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식은 두 사람만 비밀리에 하면 안 되죠. 공식적인 고백과 선포가 있어야 합니다. 왜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우는 줄 아십니까?
[14:26]왜 거기 끼치죠? 끼워줬어요? 그냥 낀 거예요 여러분. 처음은 이게 고대 로마인들에게 시작이 되었다고 그래요. 그들은 약지에 있는 베나 아모리스 사랑의 혈관 사랑의 혈관이라 불리는 작은 동맥이 심장까지 연결된다고 믿었습니다. 약지에 반지를 끼는 것은 부부의 심장이 영원히 연결된다고 생각하고 믿었던 거죠. 특별히 왼손을 왼손을 선택한 것은 심장에 더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에 사랑의 고백은 심장으로까지 연결된다고 믿을 정도로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15:17]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칭찬하십니다. 고백은 마치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가 일평생 서로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결혼의 서약식과도 같은 거예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의 구원이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사랑의 고백 이상 사랑의 고백은 한 평생을 결정 짓는다면 신앙 고백은 우리의 삶 전체뿐만 아니라 영원을 결정하는 일입니다.
[15:52]무엇보다도 여러분 이 신앙의 고백은 개인적인 고백이어야 합니다.
[16:01]우리는 믿습니다가 아니에요. 나는 믿습니다 해야 돼요.
[16:09]반드시 1인칭이어야 합니다. 나는 나는 이 중요해요. 신앙은 주님과 1대 1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고백은 단치로 도매금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군대에서 단치로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고백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우리 집안이 대대로 믿어 왔습니다가 아니에요. 내가 믿습니다 해야 돼요. 다른 사람이 내 입장을 대신 전해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신앙의 고백은 대리 시험 대리 면접이 없습니다. 집적해야 합니다. 주님은 개별적으로 묻고 확인하십니다. 주님이 물으셨고 베드로가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어떤 고백을 하는가를 주님이 듣고 싶어 하신다는 거요. 어떤 사람이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물으면 이상하게 둘러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아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거든요. 뭐 이러고 나는 어느 어느 교회를 다녔고요 어느 교회를 다녔고 어느 유명한 교회를 몇 년 동안 다녔고요. 어떤 목사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고요. 다 소용 없습니다. 우리 집안에 목사 장로가 몇 명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랬어요.
[17:31]여러분 신앙 좋은 집안에 내가 묻혀 갈 수가 없습니다. 믿음 좋은 아내에게 내가 묻혀서 그냥 천국 갈 수가 없습니다. 가족이 믿는다고 가산 점수제 같은 게 없습니다. 신앙에는 가족 마일리지도 안 통합니다. 오직 나의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17:58]개인적인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된다는 거요. 여러분 결혼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사랑한다고 결혼이 되나요 여러분? 사랑만하고 고백 안 하면요 그건 짝사랑으로 끝나는 거예요. 주변에 멋진 사람이 많으면 못 합니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못 합니까? 결혼한 일대 1의 관계예요 1대 다수가 아니라 1대 1의 관계. 신앙의 고백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1대1의 사건입니다. 1대1로 연결해야 합니다. 고백은 오직 한 분에게만 드려야 하는 거요. 무엇보다도 여러분 이 고백은 선명해야 돼요. 슬픈 고백은 안 됩니다. 고백이 막연하면 안 돼요. 자신의 언어로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우물쭈물하면 안 됩니다. 다양한 형태의 자기 고백들이 있을 수 있죠. 여러분 무신자 무실론자들도 두 종류입니다. 한 사람은 좀 무식한 무실론자입니다. 무조건 부정하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어떤 사람은 안 믿는 것에 대한 이론 이론적 무장을 한 무실론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실론도 일종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굳게 믿는데 무실론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것도 신앙이에요 여러분. 요즘 보십시오 신이 없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신앙 이 무실론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이 없다는 것에 대한 단단한 무장을 하고 있는 거죠.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도를 받아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자신감과 이론적 무장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 가운데 성경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 공부를 하는 목적이 뭐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믿지 않게 하려고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 그러다가 예수 믿게 된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믿을 근거가 충분해야 돼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대충해서는 안 되죠. 무실론자들도 신앙 고백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안 계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전하기 위하여 책을 쓰기도 합니다. 도킨스 같은 사람은 엄청나게 책을 팔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믿는다고 하는 신자가 그냥 믿으면 될까요? 내가 무엇을 믿는지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돼요. 오늘 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그래요. 다원주의 특징의 가장 핵심은 다원주의래요. 온갖 세상의 것들이 신의 자리에 굴림하고 있어요.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신을 자기가 원하는 신을 쇼핑하듯이 구매하는 시대를 말하고 있어요. 소위 종교 시장이 다양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태도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냥 왔다 갔다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무속 종교가 다릅니다. 미신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모르고 지극 정성을 썼습니다.
[21:30]그들이 특징이 뭐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럽니다.
[21:37]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을 내어 맡기는 행위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건 굉장히 중요한 단 스트롱 워드예요. 그 믿음의 대상에게 자신의 생애를 맡길 수 있는가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벼랑으로 떨어졌어. 떨어지다가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에 걸려 그 나뭇가지를 붙잡고 떨어지면 죽으니까 막 소리를 질렀어요. 하나님 살려 주세요. 근데 놀랍게도 벼랑 아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어. 그래 내가 받아 줄게. 잡고 있는 그 가지 나무를 놓아라 그랬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다시 소리를 질러요. 하나님 말고요. 거기 두고 사랑 없어요.
[22:30]여러분 우리는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붙잡기 위해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을 놓을 수 있는가라는 겁니다.
[22:48]그것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아직 진짜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결코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 고백이 흐릿하면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이 고백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고백은 선택이에요. 대가를 치르겠다는 결단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백으로 인하여 찾아올 수 있는 어떤 일에도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선포가 신앙의 고백 안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부 불이익이 와도 애매한 태도를 보이거나 그런 위험을 피하려고 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각오가 이 신앙의 고백 안에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곳은 가이사라 빌립보 지역입니다. 황제의 힘이 지배하는 도시. 신앙의 고백은 선택이에요.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게 아닙니다. 가이사와 그리스도인가. 황제에게 노라는 말을 할 경우에 불이익이 찾아올 수가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그러므로 고백은 진지한 것입니다. 여러분 남녀가 만나 연애하는 것과 연애하는 것과 결혼은 달라요. 연애할 때는 그냥 부담이 없어요. 책임을 안 줘도 돼요. 그냥 연애하는 거예요. 근데 고백을 하는 순간 결혼이라고 하는 사실 안으로 들어가면 서로는 책임지는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거요.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가기 위하여 상당한 대가의 지불을 결단해야 합니다. 그게 고백이에요. 헌신이 없는 고백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신앙 우리가 편안한 환경 속에서 신앙 고백은 쉬워요. 그러나 적대자들이 둘러싸여 있을 때 신앙의 고백은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실제적으로 이 무슬림 사회에서 기독교로 개정하는 순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중동 지역에 이 무슬림에서 기독교로 개정하면요. 그냥 죽어요. 쫓겨나요. 지금도 그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6.25 전쟁 시에도 교회 전체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공산당에 의해서 포위되었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너 예수 믿으면 그대로 청소 안 믿겠다 그러면 살려 주겠다. 그랬을 때 한 교회가 전체가 사형을 당하는 순교를 당하는 일들이 우리 교회사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는 순교사라고 얘기합니다. 순교의 역사 순교자들의 피. 고백은 여러분 생사가 오고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신앙 고백으로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흘러 넘칩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25:48]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위기를 통과해 보아야 돼요. 믿음의 실연기를 지나보아야 진정한 신앙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조롱당하고 불이익을 당해도 개의치 않고 나는 여전히 예수를 믿는다고 얘기할 수 있는가? 신앙 고백이 언제 빛이 나는 것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의 둘러싸여져 있을 때
[26:17]여러분 오늘날 동성애자들의 커밍 아웃이 상당히 많이 이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커밍 아웃이라고 하죠. 커밍 아웃. 자기를 밝히는 거예요 이제는. 옛날에는 밝히지 못했어요. 요즘은 퀴어 축제나 이런 거 밝혀 데려 보내서 더 이상 부끄럽게 이기지 않겠다는 거요. 이것에 일주로 한 것은 유명 인사들이 커밍 아웃을 한 거예요. 자기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이제 당당하게 이제 알린 것이죠. 숨겨야 하는데 숨기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들의 세계적인 연대가 지금 일어났어요. 많이 일어났죠. 제가 뭐 시든이 있을 때도 뭐 어마어마한 어마어마한 조직이에요. 어마어마한 조직. 그 세계적인 연대가 일어났어요. 그리고 그들은 자원하여 그에게 연구 자금을 학자들에게 기부하여서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하게 하므로 세상으로부터 지지를 얻으려고 어마어어마한 헌신을 해요. 반대 여론과 대중의 따가운 시선에도 일종의 자기들만의 커밍 아웃 신앙 고백을 한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사업을 할 때 거래처 사람들과 만날 때 신앙인으로서 자신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거요. 호의적이지 않고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면 혹시 꼬리를 내리고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도 여러분 신앙 고백은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신앙 고백이 분명한가 아닌가는 삶의 중대한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이 신앙 고백은 한 번이 아니라 일상 속에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 안에서도 신앙 고백은 필요해요. 자녀 앞에서 분명한 신앙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부모의 신앙은 자녀들에게 그대로 노출돼 있습니다. 자녀들은 압니다. 부모의 고백이 진실한가? 입으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지 우리의 부모가 진짜 예수를 믿는지 그냥 교회를 다니는 분인지 진짜 예수를 믿는지 자녀들에게 교회를 다니라고 하는 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부모의 진실한 신앙의 고백이에요. 자녀들이 신앙을 가지기를 주저하는 이유가 뭘까요? 부모가 하는 신앙의 고백에 진정성을 의심하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사도신경을 암송은 하시는데 실제로는 그 고백이 진실하지 않다는 걸 느낍니다. 우리 부모님은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많이 말하는 것 같아요. 말은 하지 않는데 부모의 삶에서 나오는 뉘앙스는 나는 믿는다. 하나님을 하면 좋은데 나는 믿는다 돈을 자녀의 신앙보다 학교의 성적을 더 강조하고 세상적 출세를 더 강조하면 자녀들은 헷갈리는 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 고백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 한 줄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10분 표현하러 가려면 10분을 한 시간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한 시간을 예수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가?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경험한 하나님. 애매한 신앙 고백으로는 이 척박한 세상 가운데서 믿음을 지켜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고백의 공동체 우리 고백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사람들이 또한 하나가 돼요. 그래서 고백을 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요. 그리고 이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거요. 고백으로 뭉쳐진 공동체 전 세계 교회는 사도신경이라는 신앙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의 교회 전 세계의 교회가 하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백을 통하여 나는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랑방을 모일 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를 한 몸 되게 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백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고백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여서 고백할 때 비로소 우리가 예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0절로 11절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예배에서 고백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교회가 예배를 드릴 때 첫 번째 뭘 하죠?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아 예배에 오실 때 사도신경을 고백한 이후에 오시는 분들 곤란합니다. 그래서 우리 코로나로 예배에 일찍 일찍 오시는 이 문화가 되어서 너무 좋긴 한데요. 예배를 마치고도 오랫동안 기도하고 하시리 문화가 좀 바뀐 거 같아요. 감사한 일이죠. 여러분 고백이 없으면 예배가 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예배를 시작할 때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거예요. 나는 믿습니다. 형식이 아니라 지식 진심을 담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예배의 문을 열고요. 이 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위로부터 임하시는 그 임재가 있는 것이죠. 누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 하나님 우리의 고백을 받으시고 기뻐 하시는 것이고 그리고 그 고백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시라고 알고 믿고 있습니까? 그가 누구이신가를 바로 알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믿을 때 우리의 삶 전체를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신앙 고백이 삶의 틀을 결정하여 고백은 삶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신앙적 고백보다 정치적 이념을 신앙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기에 목숨을 걸어요. 돈을 나이 주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거기에 생명을 걸겠죠. 어떤 이는 세상적 즐거움이 나의 유일한 구원으로 이긴다면 거기에 자신의 삶을 바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 고백이 주는 삶의 영향이에요. 성도 여러분 단 한 분에 대한 나의 마음을 담은 진실한 고백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맺는 결정적인 순간에요. 그 고백이 인생을 바꿉니다. 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진실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사는가? 누구를 믿고 사는가? 나의 믿음의 대상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여러분 가끔 믿을 만해 보이는 것이 눈에 볼 수는 있어요. 가끔 나는 은행에 넣어둔 장구를 믿는다. 나는 사둔 부동산을 믿는다.
[34:06]잘 나가는 주식을 믿는다. 잘 나가는 자녀를 믿는다. 유능한 남편을 나는 믿는다. 여러분 나는 그것을 믿고 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믿었는데 그 믿었던 것에 배신을 경험할 때 모든 게 다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오늘 베드로의 고백은 왜 믿음의 눈이 열렸다는 증거요? 오늘 우리 예배의 시간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진지하게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주님에게 한 번도 일인칭으로 진지하게 개인적 신앙 고백을 해 본 적이 없는 분이 있다면 지금 이 시간 중요한 결단을 할 시간입니다. 또 이전에 고백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희미해진 분들이 있다면 이 시간 다시 한번 진지한 고백을 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이십니다. 이 고백을 여러분들의 이름으로 입술로 직접 고백하는 일들이 있기를 바라고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지만 여전히 내 신앙이 혼돈 가운데 있다면 다시 한번 이 고백으로 주님 앞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온전히 증명하고 내어 드리는 그리고 결단하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38:28]소리를 내어도 좋고 그냥 하셔도 되고 우리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귀한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1대1로 개인적으로 분명하게 하나님을 선포하며 고백하는 이 시간 되게 해 주시고 진실한 고백을 드리는 주의 백성들의 그 고백을 들어 주셔서 하나님 바요나 시몬아 내가 복이 있도다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우리의 눈이 열려 주를 온전히 고백할 때 하늘의 복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우리의 생애가 주의 손에 붙들림 받으러 놀라우든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39:32]아멘.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