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오늘 이 본문은 이 칠병 이어 사건입니다. 6장에 나온 오병이어 사건과 비슷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5천 명이 먹고도 남는 12 광주리가 남는 역사가 일어났고 오늘 칠병이어 떡은 두 개 모자랍니다. 근데 4천 명이 먹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 이건 좀 차이가 있습니다. 어 누가복음 5장에서는 12 바구니가 남았다 그랬습니다. 근데 오늘 여기에서는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 이 바구니와 광주리가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다른 단어입니다. 이 광주리와 바구니 그냥 소쿠리 하면 될 텐데 이 바구니와 광주리 구분이 돼 있는데요. 이 광주리는 바구니보다 훨씬 더 큰 사이즈입니다.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고 그래요. 12 바구니와 수량의 차이는 그렇게 크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제 남았다는 거죠. 자 오늘은 예수님의 결핍 속에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필요를 채워 주시는 모습. 특별히 이 예수님의 행동의 동기 안에는 긍휼이 있었다는 겁니다. 긍휼, 컴패션. 요렇게 계속해서 마가복음을 훑어 살펴 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는 예수님의 하트입니다. 하트.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얘기할 때 그 사랑을 뭘로 표현되느냐면 긍휼로 표현된다는 거. 긍휼로. 그리스도는 냉혹한 신이 아닙니다. 냉혹한 신 따뜻한 목자의 이미지를 마가는 그려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 계속 목격되는 장면이죠. 오늘 2절도 보면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이게 매우 중요한 것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먹을 것이 없어 주린 무리들을 불쌍히 바라보셨다. 이 컴패션입니다. 긍휼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이 긍휼의 마음은 굉장히 강력한 것입니다. 강력한 감정의 상태입니다. 이 긍휼이 확 밀고 들어오면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지상에 우리 주님은 인간의 필요를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시고 계시는 그런 추상적인 신의 개념이 아니고 인간의 삶에 깊이 다가오셔서 우리의 문제에 우리의 필요에 우리의 형편에 다가오시는 분 예수님을 보면 매우 민감하세요. 아주 센시티브하신 분이세요. 사마리아 여인과의 얘기에서도 그의 내면의 겪고 있는 아픔도 읽어내시죠. 그리고 우리의 일상의 필요도 읽어내시는 분. 인간의 문제를 피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게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자, 오늘 이 상황을 가만히 보면 1절에는 큰 무리들이 있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2절도 예수님을 따라 다닌 지 사흘이 지났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자, 3절 보십시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서 그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모여 온 이 무리들은 이미 굶 굶었어요. 사흘도. 요즘 같으면 가까운 24시 편의점도 있을 텐데 2천년 전 고대 이 팔레스타인의 지방에서 헌한 먹을 것이 별로 없는 상황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 먹는 문제는 인간의 삶에 언제나 따라다니는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주제가 아니죠. 떡의 문제를 다룰 때는 언제나 긴장감이 있습니다. 빵을 주식으로 삼는 나라. 이 아프리카 같은 데는 빵을 주식으로 삼는 나라인데 정부가 이 빵값을 조금 올리자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어요. 민감한 것이죠. 인간은 먹어야 하잖아요. 어디를 가나 먹는 얘기예요. TV를 켜도 우리는 먹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넘칩니까? 자,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를 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눠줘요. 앞부분은 하나님에 관련된 기도가 세 가지. 두 번째는 인간에 관련된 기도가 세 가지예요. 자, 그런데 인간에 관한 기도의 첫 번째가 뭐냐면 양식, 먹는 문제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천상의 주제만 다루라고 말씀하지 않아요.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매우 고상한 우리가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뭔가 굉장한 것들만 구해야 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사회 개혁이나 정의의 문제나 통일이나 세계 복음하나 그런 거 기도해야죠. 그러나 먹는 문제를 기도하는 것은 마치 초신자들이나 기도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메시지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떡의 문제처럼 인간에게 더 절실한 것은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라 매일매일 주어지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일평생 매일 당면하는 주제, 그게 먹는 문제예요. 여러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 배고프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먹는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구하며 살도록 만드셨다는 겁니다. 주님의 지상에 미션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삶의 모든 문제들이 회복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일상의 문제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질병을 치유하시고 굶주린 자들의 배를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치르는 일상의 크고 작은 문제에 깊이 개입하시는 하나님. 가끔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님이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매우 관념화되고 사변화된 사람들이 있어요. 뜬구름 잡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님, 우리의 먹고 사는 작은 필요에도 반응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 주님은 우리의 일상에 깊이 들어오셨어요. 먹고 사는 문제를 피하지 않으셨어요. 그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은 저 천상의 높은 곳에 계시기만 하고 우리의 삶에는 관여하지 않은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 떡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4절에 보니까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은 언제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제자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얼마 전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7:49]근데 전혀 변화가 없어요. 비슷한 질문을 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을 경험했지만 아직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한 거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보고 들었지만 그대로 옵니다. 영적인 이해도가 매우 낮습니다. 어디 떡을 얻어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아직 모르고 있는 거예요. 단지 자신들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제주로 4천 명을 먹일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죠. 그들은 사건만 보았지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계시를 못 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미련하죠. 자, 주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일곱 개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와 동일한 방식으로 무리들을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어요. 작은 생선 두 마리도 동일하게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6장에서 오병이어와 똑같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를 거두었다고 말합니다. 배고픈 무리들이 모두 충분히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라는 거죠. 이사야의 예언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55장 1절로 2절에 보니까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러분, 여기에서 물, 포도주, 젖 이런 게 뭘까요? 일상의 필요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상의 필요를 채워 주시겠다는 거. 마리아의 노래를 들어 보셨습니다. 누가복음 1장 53절에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이 복음서 기자 가 가운데 이 누가는 특별히 기록할 때 이 주린 자, 가난한 자를 얘기할 때 영적인 의미로 얘기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가난한 자 주 굶주린 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리는 자, 실제적으로 배가 고픈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배불리 신 신다고 얘기하는 거죠. 여러분, 주님은 필요를 충분히 채워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4천 명을 먹이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라는 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을 얘기할 때 우리가 흔히 떠오르는 거 뭘까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풍요의 땅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땅이 풍요의 땅이라는 거예요. 가나의 혼인 집에서 예수님은 물이 포도주 되게 하신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잔치집의 이미지는 풍성함이라는 거죠. 탕자가 들어왔을 때 아버지가 베푸는 잔치는 뭘까요? 풍성함이라는 거죠. 유명한 시편 23편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신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런 표현들은 뭐예요? 하나님의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급자이십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십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십니다. 이 광야와 같은 어려운 환경이 올수록 하나님의 공급은 더 빛이 나는 것이죠. 하나님은 공급하는 일에 제한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늘 풍성한 것이죠. 그래서 오늘 여기에 굶주리다, 주리다라고 하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나라와 먼 이야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풍성하다는 거죠.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나라에는 더 이상 굶주림이 없다는 거죠. 예수님은 먹이시는 분이세요. 예수님은 채우시는 분이세요. 예수님은 넘치게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라는 거죠. 여러분, 먹는 문제는 신앙과 결코 별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깊이 연결돼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먹고 잠을 자는 행위가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 여러분, 매일 대하는 식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현전을 느끼는 것이죠. 요즘 이제 비가 내리고 봄이 내리니까 막 만물의 막 나물들도 자라고 땅에서 생명의 기운이 막 올라오고 오는 걸 우리가 느낄 수가 있어요. 요렇게 그냥 무심코 먹으면 밥을 그냥 먹지만 여러분 그 쌀이 그 땅에 이 논에서 심겨지고 한 알의 그 이 그런 생명들이 자라나고 말이죠. 햇빛을 받고 물 물이 내려지고 그리고 그것이 자라나서 거두어져서 우리의 식탁까지 와서 내 입에 들어가서 소화되어 그다음은 그다음은 얘기 안 하겠습니다. 소화되어 이 다양한 이 모든 이 과정 안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것이죠. 여러분,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를 할 때마다 우리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 스스로 먹고 산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라는 거.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공급,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먹고 사는 여러분,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위험한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잘 산다고 여긴다면 영적으로는 위기라는 거. 아무리 여러분, 물질적으로 풍요해도 마음은 항상 가난한 자 되기를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랬어요. 여러분, 오늘이라고 하는 시간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오늘 먹을 수 있는 양식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선물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에요.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하루 세 번씩 먹을 때마다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드리는 겁니까, 여러분? 감사 기도를 드리는 거. 주님이 오늘 먹을 것을 주셨다면 내일 주님이 또한 주실 것을 믿고 그래서 예수님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는 거. 자, 여기서 오늘 우리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에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인데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하여 떡을 먹게 하심으로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입니다. 광야에서 떡을 먹을 때 떡만 먹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떡을 주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거. 주님은 말씀하시길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얘기했어요. 그것이 기적의 본래 목적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무지가 본문에서도 나타나요. 11절, 12절에 보니까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여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여러분, 이들은 영적으로 지금 깜깜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통한 메시지를 전혀 읽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불순한 불순한 의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고자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태도는 예수님으로부터 레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식하시죠. 탄식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떡의 문제는 땅의 핵심 주제인데 예수님은 이 떡의 문제를 땅의 주제를 하늘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빵 문제만 해결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신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문제가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떡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행복할까요? 더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떡을 먹지만 결국은 언젠가 사람은 죽습니다. 자,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러므로 잘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의 말씀은 날마다 외우셔야 돼요.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시니. 자,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인데 이 구절을 날마다 외우셔야 돼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18:27]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떡의 문제가 해결돼야 돼요. 그러나 떡에만 초점을 맞추면 삶은 금방 피폐해집니다. 요즘은 먹을 것이 너무 많아 문제예요. 이제는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여러분 요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게 아니라 웰빙 식단을 구해요. 유기농을 주시옵소서. 잘 먹으려고 열심히 일했는데 이제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건강 강의를 들어 보십시오. 너무 많이 먹음 문제입니다. 과체중으로 인한 질병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은 저는 종합 검진을 한번 받았더니 저희가 과체중이래요. 이렇게 날씬한데.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걸리는 암 중 하나가 위암이잖아요. 물질을 추구하며 살았는데 물질이 우리의 삶을 공격합니다. 떡을 위해 살았는데 떡이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거. 가난을 해결하고자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오늘날처럼 번영한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 번영이 가져다 준 각종 폐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각종 범죄와 사건, 사고에는 반드시 이 돈, 떡의 이 물질의 문제가 끼어 있어요. 왜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아요. 일평생 먹고도 남을 양식을 구해요. 주님은 필요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인간은 욕망에 가득 찬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마 마귀가 지교하게 공격하는 끌고자 하는 유혹이 이거예요.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는 거. 네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너의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네가 먹을 수 있는 떡으로 만들라는 거. 가능한 많은 떡을 생산해 내는 것이 성공이고 축복이라고 부추이고 있는 거. 여기에서 무슨 오류가 생기는 것입니까? 물질에만 집착하는 삶. 한쪽으로만 쏠리게 되는 겁니다. 거대가 거대한 왜곡이 일어나는 거죠. 눈이 어두워지는 겁니다. 여러분, 그 떡으로만 사는 것처럼 생각하면 사람이요, 착시 현상이 일어나요, 여러분. 그것밖에 못 봐요. 다른 쪽을 전혀 보지 못해요. 아무리 보여줘도 못 봐요. 세상의 모든 것이 온통 떡으로만 보이게 시작합니다. 마귀가 속삭이는 메시지에 설득을 당하는 거죠. 인간은 떡만 있으면 된다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떡이 전부라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죠. 세상은 전부 떡에 초점을 맞춰. 가능한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사람들은 결국 떡을 구하다가 떡의 희생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떡 때문에 떡이 돼요. 떡의 모든 에너지가 다 소비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믿었던 떡에게 배신을 당하여 인생이 허망해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계속 무슨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까? 떡으로만 살아라. 떡이면 충분하다. 떡을 위에 너의 운명을 걸어라. 여러분, 세상의 신은 떡입니다.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섬겼던 신은 풍요의 신, 떡의 신이에요. 대부분은 이 설득에 감동을 받고 떡의 종교의 신도로 살아가는 겁니다. 여러분, 인간이 떡으로만 사는 줄 생각하면 그때부터 모든 사고가 거기에서 거기에서 터지는 거예요. 여러분, 떡만을 위해 살면 인간은 잔인해집니다. 인간이 사악해집니다. 오늘날 세상에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이유가 무엇이죠? 떡만을 위해 살면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부부 간에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형제 간에도 친구 간에도 없어요, 여러분. 서로 빼앗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전쟁이 벌어지는 거예요. 동물적으로 살아가는 거.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거.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싸움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떡으로만 사는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떡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을 공급해 주는 사람이 왕이고 신이 되는 거죠.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생산과 소비의 톱니바퀴가 무섭게 돌아다닙니다. 떡을 계속 생산해 내는 사람이 있고 끊임없이 소비하는 떡의 전쟁. 사람들은 속습니다.
[23:37]떡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부립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떡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요. 떡은 아무리 쌓아도 부족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로 넘어갔기 때문에. 욕망을 다루지 않으면 필요를 채워도 해결이 안 돼요. 욕망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 결국 모두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왜 좋은 집에서 그렇게 좋은 집에 있어야 해서 싸우는 겁니까? 좋은 음식을 먹었는데도 왜 우울한가요? 그렇게 좋은 침대에 누웠는데 왜 잠이 오질 않는가요? 무엇 때문입니까? 떡만 많아졌는데 삶은 이전보다 더 풍성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근본적인 답을 찾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인간을 만드셨을 때 떡으로만 만족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떡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건 동물적인 것입니다.
[25:03]그래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얘기도는 날마다 우리에게 깊이 와닿는 명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참된 안식이 없나이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아니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이 없어요. 만족이 없어요.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불만족에 빠져 삽니다. 욕망은 갈증을 유발합니다. 갈증은 채워야 욕망의 문제가 끝이 납니다. 갈증이 해결이 안 되는 게 문제예요. 여러분, 휘발유를 넣어야 달리는 자동차에 집에 아이 있는 게 올리브유인데 한번 넣어 보자. 안 갑니다. 고장이 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육체는 밥을 먹어야 채워지고 정신은 책을 읽어야 채워지고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야 산다는 거. 영혼의 에너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참 진리가 들어가면 영혼이 살아납니다.
[26:18]말씀의 능력은 놀랍습니다. 맛을 본 사람은 압니다.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 길이 없죠. 여러분, 예수님이 그래서 곧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생명의 떡, 당신 자신을 떡으로 비유하셨어요. 얼마나 와닿는 비유입니까? 떡. 여러분, 떡을 먹으면 여러분, 그게 그 그냥 우리 와닿잖아요. 그게 소화가 되고 우리 몸 피가 살이 되는 것 지. 생명의 떡이라는 말은 피상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일상에서 경험해야 한다는 거. 떡을 먹어야 힘이 나는 것 같지 말씀을 먹어야 힘이 나는 것입니다. 떡은 육신의 힘을 얻게 만듭니다. 그러나 영혼의 힘이 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 성도 여러분, 삶이 힘들어지면 이상한 것으로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떡은 좀 적어도 영혼이 말씀으로 충만해지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왜 불안한 것입니까? 물질이 부족해 불안한 게 아니에요. 말씀, 하나님의 진리가 내 안에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핍, 말씀의 결핍 내 영혼의 말씀이 결핍되니까.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내가 무엇을 가지지 않았어가 아니라 참된 진리가 내 안에 없기 때문에. 공허함을 소비로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돈만 있고 믿음이 없는 사람을 부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돈도 없는데 믿음도 없는 게 문제지. 확 와닿는가 봐요? 믿음이 있으면 돈이 없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신자의 품이죠, 그게. 떡의 부족이 아니라 진짜 가져갈 것은 가질 가 가질 가져야 할 것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떡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데 말씀을 채우면 놀라운 만족이 옵니다. 떡은 배만 채우는 거예요. 배만. 그러나 말씀은 영혼을 채우는 것입니다. 떡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해야죠. 주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참 기적의 의미입니다. 떡의 문제가 생길 때 예수님은 나를 찾고 나를 의지하라는 거. 근데 제자들은 이 기적의 참 의미를 놓쳐버렸어요. 깨닫지 못했어요. 기적이 끝나고 건너편으로 가시는 중에 제자들이 대화를 하는데 이런 대화를 해요. 14절에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기적의 의미를 모르는 거죠. 제자들은 지금 가면서 떡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아, 먹고 나면 떡 어디 있지? 좀 더 가지고 올 걸. 이 개그 수준이에요. 개그 수준.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여러분? 17절, 18절에 이렇게 하셨어요.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긍거리느냐? 기속말로 해도 예수님은 다 듣고 계세요.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제자들의 제자들은 아직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아서 21절에 이렇게 하셨어요.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에 이어 칠병이어의 사건까지 보면서도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까 연속적인 레슨에서도 그들은 전혀 볼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자들이 배불리 배불리 먹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알려 주시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우둔했다는 거. 우둔했다는 거. 여러분,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머리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영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영적 지각의 문제요. 영적 무지. 미련하고 우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얼마나 더디 깨닫는지 몰라요. 깨달음이 중요해요. 기적보다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기적을 보여주지 않아도 깨달으면 되는 거예요. 깨달음이 복이에요. 어떤 깨달음이 복입니까? 어떤 사람은 깨달았다고 하는데 세상 개변이나 늘어놓고 자신의 지식이나 자랑한다면 그건 깨달은 게 아니죠. 우리가 더 많이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깨달음이 필요한데 제자들의 문제가 뭡니까? 기적만 보고 기적의 예수에 대해서는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거. 칠병이어 사건을 통해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 이의 핵심은 뭘까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떡의 문제가 아니라 기적의 문제가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속 떡을 만들어 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떡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성도 여러분, 떡의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떡에서 떡에만 고정한 우리의 시선을 떼어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야 합니다. 신앙의 핵심은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에 초점을 맞춰야 돼요. 왜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핵심은 일용할 양식이 아니고 일용할 양식을 매일 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거.
[32:13]항상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는 순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기적을 수백 번, 수천 번을 경험해도 그리스도가 누으신지 모른다면 결국 인간은 배가 고프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떡은 잠시 배부르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살지만요. 아침 먹고 나면 금방 점심이에요. 주부들은 알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렇게 생각해요? 어떤 때는 좀 잘 먹었으면 어디서 대접을 잘 받고 너무 근사한 걸 먹었는 나요? 그 정도 먹었으면 한 3일은 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아니 7천원짜리 먹었으면 한 끼 정도인데 2만원짜리 먹었으면 새끼를 안 먹어도 돼야 되잖아요. 근데 저녁에 잘 먹었날은 아침에 더 배가 고프대요.
[33:22]아무리 좋은 걸 먹어도요. 또 배가 고파요. 아무리 좋은 걸 유기농 골라 먹어도 결국은 죽습니다.
[33:35]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이십니다. 잠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채울 수 없는 깊은 갈증했어요. 그리스도를 놓치면 모든 것을 붙들고 있어도 소용없어요. 그리스도로 충만합니다. 떡이 육신의 생명의 절대적인 것처럼 저 여러분 밥 안 먹으면 죽잖아요, 여러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절대적인 존재예요. 우리가 매일 밥을 먹듯이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갑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과 같이 우리는 주님 없으면 없으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마귀는 돌들을 떡이 되게 하라고 계속 부추일 때 속지 마십시오. 참 떡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증이 끝이 나고 불안은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기적을 구하지 마십시오. 예수로 충만합니다. 말씀으로 배불리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그래요. 말씀을 봐도 여전히 허전해요. 그때마다 제가 답하는 게 있어요. 더 보세요. 더 말씀을 읽고 더 많이 묵상하고 그래서 내 영혼이 만족함이 올 때까지 내 영혼이 배부를 때까지 여러분, 말씀에 깊이 빠져드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깊은 만족을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분히 배부른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당신을 내어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내어 주신 그 사랑 충분하고 충분하다는 거. 성도 여러분, 우리가 떡으로 사는 것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삽니다. 떡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지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요한복음 6장 27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썩을 양식을 위한 삶을 이제 놓여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떡의 전쟁에서 빠져나와야 인간답게 살 수가 있어요. 더 많은 기적을 구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찾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여러분들의 삶을 바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떡의 희생물이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떡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에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