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자 오늘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가 복음서를 쫓아가고 있는데요. 여러분 이 복음서는 정말 우리가 다른 어떤 곳보다도 예수님의 행적을 더듬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한 마디 또 예수님의 에 행동 하나하나 그냥 한 일이 아니겠죠. 다 의미가 있고 상징성이 있고 메시지가 있고 이제 그렇습니다. 자 예수님의 사역이 점점 부상이 되죠. 공생에 부상이 되고 이제 6장 7장으로 오면 이미 예수님의 활동이 굉장히 본격화 되었습니다. 특별히 오병이어 사건으로 예수님의 그 행적이 모든 사람에게 다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귀신 들린 자들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을 낫게 하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팔레스타인의 오늘같이 이렇게 메가 시티가 아닌데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센세이션이죠. 충격을 받게 되고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고 특별히 이제 급기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고 엄청난 일이죠. 자 이러면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나느냐면 적대적 환경 예수님을 시기하고 또 예수님을 에 공격하는 이 사람들이 일어나죠. 특별히 바리새인들, 그 당시의 종교 제도권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이제 죽이려고 하는 이제 음모가 시작이 되는 자 오늘 또 이제 예수님의 사역이 확장이 일어나는데요. 그 확장이 어떻게 되느냐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이제 장면이 오늘 장면입니다. 그래서 오늘 수로보니게의 여인에 대한 얘긴데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만은 이 사건은 굉장히 상징성이 있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자 사건의 출발은 이렇죠.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여인이 그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발 아래 엎드려서 살려 달라고 이제 간절하게 매달리고 있습니다. 자 근데 예수님의 반응이 좀 특이합니다. 27절 말씀이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은 거절입니다. 거절. 상당히 거친 표현이죠. 자녀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줄 수 없다. 이런 표현을 쓴 겁니다. 여인에게 개 취급한 거죠, 사실은. 여러분 유대인들의 개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가르쳐서 개로 여겼습니다. 이 물론 여기에서 개는 들개나 이런 개가 아니고 집에서 키우는 개지만 오늘날의 애완견하고는 좀 다릅니다. 그러나 이제 집에서 키우는 개. 그렇게 좋은 표현이 아닙니다. 자 여러분 이 여인이 누구입니까? 26절 보면 그 여자는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족속이다. 우선 여기에서 첫 번째, 여자예요. 여자. 여자는 여러분 여자와 아이는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굉장히 무시를 당한 에 그런 계층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 사건에도 카운트에 안 하죠. 그렇죠? 카운트에 넣지를 않았어요. 자 근데 여기에 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이방 여인입니다. 이방 여인.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인 사회에서도 여자는 무시를 당했는데 이방인이요. 이방인 여자라는 거죠. 그리고 수로보니게라는 것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대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민족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배척을 당할 요소를 다 갖고 있죠. 하나 더 있는데 그녀의 딸이 귀신 들려서 더러운 귀신에 들려 있습니다. 자 주님의 발 앞에 간절히 빌었지만 매몰차게 거절을 하셨습니다. 근데 마태복음은 더 구체적인데요. 여인이 계속 부르짖자 제자들이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자 근데 놀라운 것은 여인이 물러서지를 않아요. 자 우리는 우선 이 여인이 가진 그 어미의 마음을 우리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짐념이 있다면 자식을 향한 어미의 마음일 거에요. 어미의 마음. 예, 자식을 둔 여인은 그 고통하는 자식을 둔 여인은 자존심 없어요. 예, 내 생명을 바꾸어서라도 이 아이를 살려내고 싶은 거죠. 자존심은 얼마든지 던질 수 있습니다. 이 아이 때문에 겪었던 고통과 절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할 수 있는 일도 다 해 보았을 거에요. 근데 어느 날 누군가 전해 준 예수의 소문에 기쁨으로 달려왔습니다. 근데 첫 마디가 예수님이 굉장히 거칠게 에 거부하신 거예요. 근데 그냥 돌아가지 않습니다. 자존심 막 상하고 욕이란 한 번 내뱉고 돌았을 만한데 여인이 예, 물러서지를 않아요. 자 여기서 여인의 반응이 28절을 우리가 좀 보고 됐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5:42]아 대단한 것입니다. 여인은 그 예수님의 말씀에서 완전히 불가능한, 절망적인 예수님의 답변에서 희망을 찾아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보면 누가 들어도 불가능한 말씀으로 들리는데 여인은 그 속에서 가능성을 본 거예요. 나는 개와 같이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근데 개들이라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포기하지 않죠.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 27절을 우리가 다시 자세히 보면 왜 희망을 가졌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기 먼저라는 단어예요. 그래, 자녀가 먼저 먹는다면 그죠 그 다음의 기회에는 기대해도 되지 않느냐는 거죠. 먼저라는 예수님의 말에서 이 여인은 희망을 가졌어요. 자녀에게 떡을 주는 우선 순위를 인정하는 겁니다. 자 여러분 여기에서 자녀는 누군가 하면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뭐냐면 첫 번째는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자를 위해 찾아오셨다는 거. 유대 민족을 구원하시고 유대 민족을 통하여 열방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15장 24절에는 이 말씀하는 거예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에게 집이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이 여인은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당신의 백성들을 먼저 배불리 주십시오. 나는 첫 째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 차례에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여러분 이 여인은 놀라운 비밀을 지금 알고 있습니다. 이 비밀이에요. 굉장히 시크릿한 것인데 이 여인이 알고 있습니다. 자 이 여인은 자신이 이방이라는 이방인이라는 걸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하고 있다는 이 비밀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먼저라는 이 단어에 동그라미를 쳐야 돼요. 로마서 1장 16절에 사도 바울이 이런 얘기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복음이 어떤 민족의 경계선을 넘고 있는 여러분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입장에서 보면 충격적인 일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에게 발견하고 있는 것은 그녀는 지금 무턱대고 때를 쓰고 있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어질 은혜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차별 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광대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오늘 이 사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복음이 유대 민족을 넘어선 겁니다. 사건의 핵심은 치유가 아니에요. 핵심은 그리스도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열방의 구원자로 오셨음을 알려주는 사건이에요. 그리스도는 유대교를 계승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에요.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교를 계승하고 끝났다면 오늘 우리는 그 복음을 받을 수가 없어요.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종적, 지리적, 민족적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다는 걸 보여줘요. 주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걸 통하여 민족의 울타리, 특정한 계층의 울타리 성의 울타리를 뛰어넘었어요. 자 이 사건은 지난 주일 다루었던 손 씻는 문제, 이 정결에 관한 이 이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의식적인 문제로 이방인과 사이를 갈라놓는 편협된 바리새인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은 늘 경계선을 만들어요. 자신을 열법을 열심히 지킬수록 담장을 높이 쌓아서 다른 사람을 배타하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사이에 벽을 쌓는 일을 열심히 했어요. 오늘 예수님은 매몰차게 대하심으로 첫째는 여인을 테스트 하십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마가는 이 이방 여인의 믿음을 놓치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높은 장벽 앞에서도 이 여인이 물러서지 않는 거죠.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믿음에 주목을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어떤 신분이나 그 사람의 상태보다 그 사람의 믿음을 보세요. 그래서 오늘 마태복음에서도 그녀의 믿음을 이렇게 칭찬하시는데요. 마태복음을 보면 마태복음 15장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그랬어요. 아멘. 여러분 주님은 유대인들에게서도 보지 못한 믿음을 이 이방 여자에게서 본 거예요. 그녀가 가진 믿음은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대한 그 인종적 장벽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아요. 여러분 믿음을 가진 사람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죠? 자신의 상황이나 처지나 신분에 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에요. 여러분 여러 가지 상황을 보면 아니지만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그녀의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힘들 때마다 우리가 가져야 될 매우 중요한 태도는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좋은 믿음이라면 뭐냐? 상황에 집중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도무지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으로 봐도 구원을 은혜를 입을 만한 위치가 아니에요. 근데 그녀는 자신의 위치나 상황이나 인종적 울타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집중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끝까지 그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으면서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 근데 그녀는 겸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적은 아무나 경험하는 게 아닙니다. 장애물을 통과해야 돼요. 여인에게도 장애물이 많았습니다. 이방 여인으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험난합니다. 처음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미 느낄 수가 있었죠. 아직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문이 열려지지 않은 때에 이 여인이 믿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누구도 가 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한국교회 초기에 그랬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그 믿음의 길을 내딛는다는 것은 험난한 것입니다. 누군가 믿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데 내가 믿는 건 쉬워요. 근데 아무도 믿지 않는데 내가 처음 믿음의 길을 선택할 때 그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수로보니게 여인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 그게 어디서 나오는가? 믿음에서 나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믿음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자 오늘 이 여인에게 기적이 일어나죠. 29절 30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마침내 그녀의 강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이방 여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자 오늘 이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성령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뭡니까? 여러분 유대인들은요, 민족주의가 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민족 외에 다른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주 받을 자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은 그냥 지옥의 불의 소시 불 소시개 감 정도로 생각했던 사람이 유대인이에요. 배타성이 굉장히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거기에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열심까지 해서 자기 의로 강력한 울타리를 쌓아놓고 경계선을 만들어 놓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오늘 이방의 여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은 이것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믿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선을 넘게 합니다.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줍니다. 혈통주의를 다 넘어섭니다. 믿음은 인종과 성과 경제적 차이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냅니다. 믿음이 새로운 신분을 결정하는 것이죠. 그래서 신앙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면 모든 만드는 인간이 만들어 놓았던 장벽과 경계선과 그 구분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려요. 십자가는 모든 경계선을 허물어 버리시는 것이죠. 복음이 역사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가 보면 사람 사람 사이에 다 층이 있습니다. 소위 클래스라는 게 있어요. 클래스. 여러분 인도 같은 나라는 여러분 사회의 이 포지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계급을 뭐 우리가 뭐 우리 옛날에는 양반 놈, 상놈 뭐 이렇게 했는데요. 그 정도가 아니라 인도 같은 나라는 수백계층이 있다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층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뭐가 있어요? 소외가 있고 차별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장벽들이 있어요. 여기 당신은 들어올 수 없어.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편견과 배제로 가득합니다. 층과 층 사이에는 그대한 간격이 있습니다. 다름을 특권으로 여깁니다. 바리새인들이 밥 먹고 하는 일이 날마다 그런 일이었어요. 이방인과 유대인의 간격을 날마다 만들어 내는 일.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했던 베드로였지만 이방인 고넬료 가정을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해요. 하나님이 고넬료 집으로 가라고 얘기하는데 환상을 보여주는데도 가지를 않아요. 이방인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성령 충만한 베드로도 인정을 못 하는 거예요. 이방인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걸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한없이 광대한데 인간이 자기의 가지고 있는 관점으로 그것을 뛰어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우리는 온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벽을 쌓고 계층을 만들고 아군과 적군을 만들고 각족 편견과 경계선의 바깥의 사람들을 배제합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품고 받아주며 은혜를 베풉니다. 배제하는 세상 가운데 포용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경계선을 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남자와 여자라는 이 성의 차이, 우리 한국에도 기독교가 들어온 지 벌써 130여년 됐지만 여러분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한국 사회의 남자와 여자의 성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요. 엄청나. 지금도 호남의 어느 교회는 그 옛날에 그게 기념으로 그대로 있어요. 남자과 여자가 따로였죠. 같이 못 앉게 있었어요. 들어올 때도 벌써 다르게도 앉았어요. 여기 중간에 담이 하나 있고 목사님은 중간에 여기서 있고 설교를 하는 거예요. 서로를 못 보게 했어요. 구별을 시켜 버렸어요. 이 차별은 상처를 만들어는 거죠. 인종간의 경계선이 얼마나 높습니까? 백인과 흑인간의 인종적 갈등은 미국 사회가 풀지 못해요. 교회도 못 풀고 있어요. 교회도 그 벽을 못 넘는 거예요. 백인 교회가 있고요, 흑인 교회가 있어요. 참 슬픈 얘기는요, 어떤 흑인들은 이런 얘기해요. 예수를 믿는 백인 신자보다 무슬림 흑인과 더 친밀함을 느낀대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죠, 여러분? 인종의 장벽이 그렇게 높다는 거예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오늘날로 치면 북 아프리카 사람입니다. 주님은 민족의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어 당신의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주님은 새롭게 새롭게 규정하는 기준이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그가 어느 민족의 사람인가 따지지 않습니다. 지금 그 선을 넘고 있는 것이죠. 유대인의 그 그대한 유대인만의 그 장벽을 뛰어넘고 있어요.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따지지 않으세요. 오늘 여러분 수로보니게 이방의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의 딸의 문제를 지금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돼요. 주님이 보신 기준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어느 민족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그가 얼마나 율법의 열심이 충실한가 그걸 따지지 않아요. 오직 하나요.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어요.
[20:33]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반응하면 이제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아니라 주인의 상에 함께 앉는 특권을 누린다는 거예요. 나의 사회적 신분이 무엇이든 인종이 무엇이든 성이 무엇이든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구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인 줄 믿습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복음. 복음은 너무도 광대하게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은 너무 넓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아직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믿음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복음의 렌즈로 사람들을 대야 돼요. 율법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바리새적 삶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거. 내 기준으로 사람을 받아들이지 말고 평견의 안경을 벗고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들여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 비슷하고요, 도트리 기적이에요. 우리가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내세울 것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뿐이요.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다는 거요. 그리고 여러분 좋은 게는 어떤 교회인가 하면 담장이 낮은 교회예요. 바울은 이전의 삶이 유대주의적 좁은 관점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가두고 유대주의의 그 앞장서서 열심을 다 했어요. 율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기 안에 자기가 갇혀 버리는 것이죠. 배타적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사람들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는 것 중에 하나가 뭔가 하면 교회에 배타성이에요. 이 교회가 영어로 하면 아이솔레이트 되어 있는 뭔가 이렇게 따로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세상이 우리를 배타적으로 대하기 전에 우리가 세상을 배타적으로 대한 면이 많아요. 우리끼리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익숙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독선적인 태도가 우리 안에 좀 있었던 거죠. 세상 사람들이 지금 거부감을 많이 내요. 코로나 때문에. 이게 좀 더 드러난 거예요. 여러분 예를 들면 동성애자들도 그렇습니다. 동성애는 분명히 죄죠. 그 죄를 죄로 지적하는 것까지는 분명히 해야 돼요. 그건 죄입니다. 이렇게 얘기해야 돼요. 근데 복음 안에서 동성애자들을 끌어안고자 하는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돼요. 동성애가 죄라고 지적하는 열심만큼 그들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입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사랑으로 품는 열심도 같이 있어야 돼요. 그냥 무조건 그건 죄입니다라고 하고 죽일 인간처럼 그냥 교회 발도 못 띠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안에는 뭐가 있어요? 우리 안에 은근히 숨어 있는 도덕적 우월주의가 있다는 거요. 엄격한 경계선을 긋다 보면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우리가 멀어져 버리는 거예요. 멀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너희들 잘났다. 우리는 자꾸 세상과 적대적인 담을 쌓는 일을 우리도 모르게 해 왔어요. 그것은 복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복음이 만껏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는 일에 누구도 제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그 일에 인종이든 종교든 성이든 전통이든 우리 우리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담장을 다 허물어야 됩니다. 누구든지.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사건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나갈 것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만민의 것이라는 거요. 개인적인 구원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폐쇄적 공동체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주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거요. 그래서 여러분 보십시오. 기독교가 세계 종교들이 있잖아요. 여러 종교들이 있는데 분포도를 보면요 모든 대륙, 모든 나라들 골고루 골고루 가장 많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어요. 이 복음이 어떤 한 민족에만 이렇게 있는 어떤 한 아시아권에만 있는 종교가 아니에요. 어떤 중동의 일부에만 있는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가 모든 민족 가운데.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에요. 모든 민족이 주께로 돌아오는 그러려고 하면 여러분 우리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요. 복음 안에서 우리는 기준을 가지고 관점으로 그 복음으로 바라보는 그 앵글을 넓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은 온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주께 나와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배타성을 없애는 자. 여러분 세상 안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입니까? 아니면 고립되어 있습니까? 만약 고립되어 있다면 나도 모르게 담장을 쌓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우리가 세상에 존재할 목적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홀로 의인 의식에 빠져 고고하게 지낸다면 그것은 주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한없이 부끄럽고 연약한 우리를 죄인된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한없이 넓고 크신 은혜를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어떤 편견이 있다면 여러분들 다 깨야 되고요. 복음보다 더 강조하는 게 있다면 다 깨야 돼요. 복음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고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내려놔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넓고 넓습니다. 근데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자꾸 생각이 좁아지고 마음이 좁아지고 우리의 시야가 좁아지고 편견이 만들어지고 뭔가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우리는 층을 만들고 경계선을 만들고 담장을 높이 세우고 사람들과 자꾸 격리되어 우리 스스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이 얼마나 넓고 광대한가를 표현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시야가 우리의 렌즈가 복음의 렌즈로 바뀌어져서 어떤 사람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예수 십자가의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져서 구원 얻는 역사가 온 땅 가운데 충만하게 일어나는 일에 쓰임 받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복음의 광대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주님이 얼마나 편견 없이 이방 한 여인을 향하여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하나님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그런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