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예수님의 생애를 들이다 보면 가시는 것 곧마다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그 기적들을 보면 음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죠. 사람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에게 요구를 하거나 어떤 믿음의 태도를 가지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은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이런 표현들을 쓰는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요구에 의해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근데 오늘 이 본문은 좀 다른 사건입니다. 지위의 당사자의 행동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의해서 주님께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사람은 무대의 중앙에는 이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중풍병자. 어 오늘 본문에 보면 네 사람이 들것으로 이렇게 싫어서 옮긴 것을 보면 중정으로 보여집니다. 중정으로 그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아주 최악의 상태 심각한 병자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오늘 이들을 돕고 자는 사람들이 나왔어요. 3절에 보면 이 사람을 치유의 길로 이끌어 주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본문이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하기에는 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을 돕고자 한 것으로 볼 때 매우 가까운 친구들 매우 가까운 이웃들이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자 이들은 중풍병자의 고통과 절망을 가까이서 보았던 것이죠. 그래서 어느 순간 무엇인가 . . . 책임 의식이 다가왔습니다. 이 책임을 느낀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예 우리가 사람들이 좀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이유는 가까이 다가오면 무엇인가 부담이 되고 책임을 느껴야 되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되기 때문에 대가를 지불해야 되기 때문에 피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일어납니까? 고통하는 사람에 대한 책임 의식. 책임 의식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이 됩니다. 자 오늘 우리 시대의 특징을 타인에 대한 무관심 또 냉당함 그리고 우리 안에는 자기 애와 자기 몰두에 빠진 그런 모습을 우리는 오늘 세상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웬만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시선을 끄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까지 신경 쓸 듯이 없어. 내 문제도 힘들어. 이 가까이 하기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는 게 편합니다. 자, 우리는 악을 선택하지는 않지만 선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도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다가간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자, 이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들 것서며 예수가 계신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자, 그런데 당장 난관에 부딪칩니다. 오늘 4절을 보면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에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눈상을 달아내리니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모지 들어갈 수가 없었던 거죠. 돕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자, 도려다가 어려움이 오면 우리는 합리화 하기가 쉽습니다. 아 내가 도우려고 노력했지만 힘들어서 여기서 그만두야겠어. 어쩔 수 없잖아. 내게는 시도하다가 문제가 복잡해지면 그만두고 맙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어.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이 친구를 아주 지극히 사랑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자, 이 본문은 이들의 행위를 가르쳐서 주님은 이렇게 판정하십니다. 그들의 믿음이라는 거죠. 이 사람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가기만 하면 날 것이다라고 하는 이 믿음, 이 믿음. 그 믿음 안에는 사랑이 있었겠죠. 여러분 믿음은 길을 냅니다. 그 믿음은 길이 보이는 거죠. 그래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기가 막힌 발상의 전환을 하는데 사람이 말해서 들어 일구가 막혀 있으니까 옥상으로 올라가서 지붕으로 올라가서 그 지붕을 뜯어내 들것을 주님이 계신 곳으로 내려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이것은 어려운 일이죠. 환자를 이들 것에 싫어 옥상으로 올라가는 지붕을 올라가는 행위도 만만치 않고요. 또 지붕을 뜯는 것도 남의 지붕을 뜯는 것도 이게 심각한 일이고. 당신의 문화로 봐서 지붕은 오늘같이 콘크리트로 완전히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나무와 흙들이 엉켜진 그런 조합된 지붕입니다. 어 뭐 쉽지는 않지만 뜯으면 뜯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하면 조각들이 뜯다가 떨어지면 위험한 것이죠. 그리고 중풍병자를 타라 네 명이 착 균형을 잡고 내리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집안에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날별하게 떨어지니까 얼마나 야유하고 눈총을 주고 비난을 했겠습니까? 아무튼 상당한 리스크가 예상되는 행동인데 나중에 이 변상을 다 해 줄 각오를 하고 모음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과 모험은 어비슷합니다. 친구들은 주님께 가게만 하면 날 것이라고는 이 믿음이 모음을 하게 되고 이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되고 지붕까지 뜯고 내리는 일들을 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 믿음은 행동으로 정명되어져야 합니다. 믿음의 살면 반드시 위험한 일과 마주치게 됩니다. 우리 시대의 우상 중 하나는 안전한 삶입니다.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은 과연 안전한가? 리스크는 없는 것인가? 안전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게 오늘 우리 시대의 우상이 되어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안전한 삶이 우리의 삶의 목표라면 믿음의 삶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안전한 삶은 많은 기회를 놓쳐 버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믿음의 삶은 그들은 위험을 선택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장애물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맞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상상을 해 보십시오. 지옥을 뜯어내고 구멍을 만들어 지옥병자를 위해서 내려오게 하는 그 장면은 기상천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막 일시적으로 소동이 막 일어났어요. 이제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5절의 말씀이에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내 죄의 삶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게 뭘까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거. 대개는 당사자의 믿음에 대한 반응이죠. 근데 오늘 본문은 그들의 비듬을 인정했다는. 주님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친구들을 귀하게 여기신 거죠. 친구를 살려내려고 하는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주님의 마음과도 통하는 행동이에요. 주님이 오신 목적이기도 하죠. 그들의 믿음이 결국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지붕을 떴는 내 사람과 대조를 이루는 사람이 또 나와요. 오늘 6절의 말씀인데요.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여기 앉아 있다라고는 이 표현이 눈에 들어오는 대목입니다. 앉아 있는 이유가 뭘까요? 행동하기보다는 행동하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사람이요. 이들은 비난거리를 찾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특별히 예수의 행동의 시비를 걸고자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친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다해 지붕을 뜯기까지하며 주님에게로 인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주님의 그 자비의 행위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수위관들은 어쩌면 가슴이 사나하게 식어버린 냉담한 종교인들을 말합니다. 예수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자 당장 시비를 걸죠. 병자의 치유보다 법규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오늘 본문은 서기관들과 중풍병자 친구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비어주고 있습니다. 수기관들은 판단하는 자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행동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면 서기관들은 은혜를 분해하는 사람들. 한쪽은 죽이는 피해라면 다른 한쪽은 살리는 편인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친구들의 역할입니다. 중풍병자는 누구입니까? 지금 누워 있습니다. 이러설 수 없고 걸을 수 없고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설 수도 없고 들 것에 실려 다녀야 하는 인생을 말하는 것이죠. 자신의 운명을 탓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무기력한 인생. 몸이 망가지면 세월이 흐르면 몸만 망가지는 게 아니죠. 마음도 망가져 있습니다. 결국은 절망적인 상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망가질 때로 망가지면 어떤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여기에 들 것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는 어떻게 보면 오늘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에 매어 살았던 중정 환자들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무기력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힘으로 이길 능력이 전혀 없었어요.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여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산송장들이라 마찬가지 영적 식물 인간들이었습니다. 영적 기능이 마비되었고 죄에 대한 감 감 감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도 가지지 않았어요. 영적인 기능이 죽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죠. 아무리 불행하고 고통스러워도 자신의 운명의 주를 스스로 끊어낼 수 없는 상태. 누가 우리를 들 것 시작 그런 상태 있으면서도 끝까지 웃기며 바락을 하는 거지요. 여러분, 남자들은 좀처럼 길을 묻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마 보니까 우리는 남자들 그런 거 같아요. 저도 그런 거 같아요. 어디 가면 나은 곳에 가면 길을 안 해맬 때 아내가 항상 물어보고 가죠 그러면 물어보면 될 텐데 가다보면 있을 거야. 이 왜 남자들은 길을 잘 안 묻느냐? 남자의 자존심 때문이라는 거예요. 여자분들이 보기에는 그 한 말로 쓸데없는 자존심입니다. 남자들은 좀처럼 병원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그래요. 할 수 없이 병원에 갔을지라도 좀처럼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도 이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남자가 여자보다 7년 일찍 죽는 이유 중에 하나라.
[13:59]우선 이야기 같지만 일리가 있어요. 근데 이것이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자존심의 문제야. 죽어도 자존심이. 알고 보면 깜찍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데도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끝까지 자존심을 꾸기고 싶지 않은 것이죠. 다 죽고 가는데도 괜찮다고 얘기. 그것을 우리는 아주 수준 높은 용어로 똥고집이라고 그러요.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허세고 교만이라는 거. 도와 달라고 한 번만 말하면 되는데 그거를 안 하는 거죠. 여러분 인간이 누구입니까? 어떤 존재입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거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수 없는 일이 훨씬 더 많다는 걸 깨닫잖아요. 청년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들이 생각하는 대로 가능한 줄 알죠. 그래서 나이가 점점 들어가다 보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고 할 수 없는 것 내 수준을 넘어서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많은 계획과 꿈을 꾸지만 정작 내 인생의 꿈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런 얘기했어요. 세계를 바꾸겠다는 나무진 꿈으로 인생을 시작하지만 나중에 세월이 지나보면 리모콘 하나로 팀을 TV 채널 바꾸는 것밖에 못하는 거. 상상은 공상이 되고 공상이 망상으로 끝납니다. 전적으로 무능력해요. 이 인간이 고질 필요가 없는데 고질을 피우면 살아가는 거죠. 그러면 점점 죽어 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두면 그냥 망하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어요. 여러분 인간의 교만은 무섭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한 번도 하나님께 항복의 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 내가 내 인생 산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 난 그래도 된다. 소리를 치죠. 여러분 그러나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가를 인정하지 않는 것. 여러분 이 교만의 대가는 엄청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돼요, 여러분? 누가 도와줘야 돼요. 그 사람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관심이 필요합니다. 절망적인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다가가야 돼요. 둘 것에 실려갈 정도로 비참한 놈명에 놓인 사람들이 한도명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그런 사람들이 내가 스스로 어느 날 갑자기 믿음이 생겨서 주님 할렐루야 하고 다가온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돌아보면 누군가의 관심, 누군가의 사랑 그만의 도움이 있었어. 내 믿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진 믿음의 덕을 이 사람은 보고 있는 거예요. 중풍병자가 누린 최고의 축복은 중풍병에서 나한 것이 아니라 그의 곁에 있던 친구들입니다. 어려움을 뛰어넘어 주님에게로 인도해 준 친구들이 있어 그의 불행이 끝이난 것입니다. 어쩌면 이 친구들은 중풍병자 중풍병자 나음을 입고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죠. 그 위에 우리의 모든 삶의 또 다른 삶의 문제가 와도 그 곁에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도와줬던 그 친구 그 공동체가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불행한 인생은 아니에요. 절망적인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이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돌 수 있는 친구가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입니다. 함께 해 줄 정치가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자, 중풍병자를 향해 주님은 죄의 삶을 선포합니다. 5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내 죄의 삶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병이 나왔다고 하지 아니하시고 내 죄가 삶을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수기관들이 12를 그는 대목이죠. 이건 청청벽력과 같은 소리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 당신이 무슨 능력으로 무슨 권세로? 우리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수 없는 율법의 고행을 치르고도 못 하는데 당신이 한마디로 그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 여러분 이것은 그 당시에 종교의 체제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엄청난 충격과 같은 선포예요. 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수기관의 심중을 아시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게 9절의 말씀이에요. 정풍병자의 내 자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내 상을 가지고 글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반문하셨어요. 자, 주님에게는 어떤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렵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근데 초점이 뭐냐? 주님의 관심이 뭐냐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병이 낳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 문제라는 거지요. 죄 용서를 받는 이 문제가 육체의 질병이 낳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21:00]여러분 웃고 있다고 행복한 것일까요? 우리는 영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 얼마나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요즘 세상에서도 웰빙을 얘기하고 힐링을 얘기하고 뭐 곳곳에 어디는 뭐 도시는 힐링 도시도 만들고 힐링 센터도 만들고 세상이 많이 얘기를 해요. 그러니 우리와 다른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웰빙을 하고 힐링을 하는데 결국은 죽는 것이죠. 죄 문제로 죽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함고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힐링은 일시적인 거예요. 기본 전화네요. 표면적이고 표폐적인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래요. 여행 갔다 왔더니 힐링이 된다 그랬어요. 근데 매칠 못 가요. 또 가야 돼요. 우리는 근원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죠.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에 주목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다뤄야 우리의 관점은 더 깊이 들어다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럴 듯 하고 별일이 없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어다 보면 깊은 고통 속에 중풍병자처럼 들어 놓고 있는 거 인생이 파산 직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흔히 한국 사람 표현을 그러잖아요. 돈 많은 사람들 잘 산다. 잘 산다. 옛날에 어릴 때도 저 집 되게 잘 산다. 어떻게 잘 사냐 보니까 돈이 많다는 얘기더라고. 돈이 많은 게 과연 잘 사는 건가? 돈이 많아서 잘 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요. 물론 여러분 오늘날 시대에 돈이면 안 되는 게 거의 없죠. 별로 없어요. 돈이 대단한 것입니다. 근데 조금만 한 컵을 벗겨 보면 진짜 돈이 대단한가? 돈이 못 하는 게 없는가? 돈으로 여러분 안 되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아니, 돈으로 되는 것은 사실 다 간단한 문제들이고요. 진짜 중요한 것은 돈으로 안 되잖아요. 식빵은 살 수 있는데 식 요은 못 사요. 여러분 결혼식은 할 수 있어요 돈으로. 근데 사랑은 돈으로 안 되는 거잖아요. 행복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행복?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그러면 돈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요?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채워지지 않은 이 공허함. 이거를 어떻게 돈으로 해결이 되나요? 안 되는 거잖아요. 마음의 평안이 돈으로 되면 우울증 걸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겠네. 죽음의 문제가 돈으로 됩니까 여러분? 한번 따져 보십시오. 진짜 중요한 것들은요. 돈이 전혀 쓸 데가 없어요. 여러분 세상을 들여다보십시오. 그 뜻 멀쩡한데 심각한 상태 중증 환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들 것에 실려가지 않으면 대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데 죄를 지어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람들 우리가 많이 보잖아요. 어떻게 저런 자리에 있는데 저런 짓을 할 수가 있지? 그건 윤리적인 것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윤리적으로 좀 사람이 좀 문제가 있다 이게 아니에요, 여러분.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죄의 문제입니다. 사과 남으면 사과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다른 도리가 없어요. 사과 남으면 사과는 사과가 열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죄인이라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뭐 뭐 어떤 일을 해서 잘못을 한 게 아니라 그런 자체가 인간의 그런 자체가 죄인이란 말이죠. 우리는 삶은 그냥 죄를 짓게 돼 있어요. 그 우리 안에는 근원적으로 우리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죄의 사슬의 예배어서 무기력한 존재로 살아간다. 여러분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의 친구들의 역할과 같은 거예요. 중풍병자에게 친구가 있었다는 것은 불행 중에 다행. 공동체의 축복입니다. 중풍병자 혼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나 혼자 이렇게 이기까지 온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주변에 무수한 도움이 있었어요. 어린 시절 셀 수 없이 넘어질 때 내 손을 붙잡아 주었던 그 부모의 수고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나라는 존재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우리 인생의 수 없는 위기 속에 수 없는 사람들이 내 곁에 와서 나에게 도움을 베풀고 사랑을 베풀고 관심을 가져 주었기 때문에 오늘 여기 있는 거 아니에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셀 수 없이 방문하고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준 손길이 있어서 오늘 우리가 신앙의 길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선택과 결정을 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욕을 하고 싫어하고 물리쳤는데도 끊임없이 다가와서 나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해서 나를 예수 믿게 했던 그 믿음의 친구들이 있어서 우리가 여기 있는 거예요. 여러분 믿음은 파장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가기만 하면 나을 것이라고 하는 이 믿음이 일을 해 낸 것입니다. 난관을 극복하고 위험한 모험을 시도하고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기가 막힌 전략을 짜내고 그들은 이웃 친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쏟았습니다.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는 이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을 가진 사람은 책임 의식이 따라옵니다. 책임이에요, 책임. 여러분 아이들은 책임 없죠. 막 다 깨고 막 사고를 쳐도 부모가 책임을 지는 거예요. 책임을 진다는 것은 성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수준입니다. 오늘 공동체 안에도 이 공동체 안에 책임 의식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은 이거 그 그 수준이죠, 여러분. 이 책임을 어디까지 느끼느냐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책임을 가지고 책임을 의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고통하는 세상을 보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마치 직무 유기와 같을 같다라고 하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원에서 아무로 돌아가시는 동안에도 옆에 병상에 그 환자에게 전도를 하고 복음을 전한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수 몇 얼마 전에도 그 간증을 하시는 분을 들었어요. 그 권사님의 말기 암으로 돌아가시며 전도했던 그 전도를 받고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이분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하는 거. 오늘 여러분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과 똑같아요. 주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직전에도 오른쪽에 강도를 향하여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마지막 순간에도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신 겁니다. 고난과 멸시와 수없는 조롱 속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곁에 있는 한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내시는.
[31:13]여러분 요즘 세상에 돌고도는 우울정들 너무 많아요. 너무 많아요. 요즘 애들도 애들도 고울점. 그걸 겪고요. 초등학교 애들도. 불안장애가 얼마나 많습니까? 외로움이 얼마나 지독합니까? 자살이 얼마나 생경하고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삶이 무너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파산 직전에 놓여 있는 것이죠. 문제는 그들은 스스로 해결할 길을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들 것에 누워 누군가 데리고 가지 않으면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자유를 맡겨서 그냥 언젠가 주님에게로 돌아오겠지 나두면 아니에요. 언젠간 믿겠지 아니에요. 자기 발로 그러도록 기다리는 것은 답이 아니에요. 가끔 우리는 그런 말을 하죠. 종교 너무 광료하지 마. 자식에게도 광료하지 마. 또 우리는 너무 무례하게 전도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하는 자성이 한국교회 지금 있죠? 플로 신학교 리차드 바우 같은 마오 같은 교수는 무로한 기독교라고 하는 책을 썼어요. 그 읽으면 참 일리가 있어요. 일리. 아주 젠틀하게 나이스하게 아주 교양스럽게 너무 무례하게 하면 안 된다. 충분히 이해가 가고 충분히 참고를 해야 돼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소망이 없는 구제 불론의 상태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사적으로 대해주고 신사적으로 지옥을 보낼 것인가? 욕을 좀 먹는 한이 있어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나을 것인가? 여러분 우리는 사회적 관점이 아니라 영적인 관심을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의 상대를 정확히 들어다 봐야 돼요. 본문의 상황을 보십시오. 친구들이 이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어떻게 남의 집을 그렇게 뜯어요. 구멍을 내요. 이건 주거친 입기물 파괴 집회 방에 소란죄예요. 입건 입건. 상식지 않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행위를 비난하지 않아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어떻게 해야 됐던 이 친구를 살려내야 되겠다라고 하는 이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살 수 있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라고 하는 이 절박한 심정 그 친구의 사랑에 대한 사랑과 그 애정이 그리고 그들 안에 있는 이 믿음이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그 지붕까지 뜯어 내리는 이 몰상식한 것 같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결과를 미리 보았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죠. 믿음은 문제의 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신앙의 길에서 얻은 축복 중에 하나는 우리 인생의 답을 찾은 것이잖아요. 예수를 믿기 전에 정말 방황하고 갈등하고 답이 없고 가슴을 찌고 머리를 찌어 뜯고 벽을 칠 것 같은 답답함. 내 인생의 이 질문에 답이 없어서 끊임없이 와이 와이를 했는데 어느 날 교회에 와서 성경을 펴니까 이 안에 답이 다 있는 거예요. 기가 막힌 답들이 이 안에 다 있잖아요. 할렐루야 아닙니까? 이 성경이 할렐루야요 할렐루야요. 다 안 읽어서 그렇지. 이 안에 우리 인생이 답이 있는 거예요. 어떤 분은 막 굉장히 막 심오한 질문을 하는데요. 답이 다 있어요. 2천 년 동안 수없는 사람들이 질문했던 거예요. 신고한 질문이에요, 사실은. 본인만 모르고 있는 것이지. 여러분 무실론자들이 평소에는 큰 소리를 치죠, 여러분. 그러나 인생이 도모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무실론적 이런 사상과 이 흐름이 굉장히 강세처럼 많은 책들이 흘러 나오지만 온 지구촌에 통계를 보면요. 무실론자는 100%밖에 안 돼요. 인간의 연약함.
[37:18]여러분 우리는 고통하는 세상에서 답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답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죠. 내가 그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여러분 이제 할리는 우리가 이 고통과 고통하는 세상과 이 과 연결시키는 것이요. 우리는 답을 안 사람들이에요. 이 답을 가진 사람들이 이 답을 알지 못하고 고통하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들은 몇 사람인지를 몰라요. 그러나 한 팀이 되어서 한 마음으로 이 한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 수 없는 대가를 집어라고 모음을 감행하면서 마침내 주님에게로 인도하여 그를 살려내는 자. 이게 마치 우리의 사랑 방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와 같은 것이죠. 성도 여러분 믿음은 영향력입니다. 믿음은 주변에 파장을 이렇게 합니다. 잠시 여러분들이 주변을 한번 자세히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바쁘고 정신 없이 끊임없이 질 줄을 하고 앞만 바로 보다가 우리 주변의 고통하는 이웃을 무관심으로 냉대하며 관심 없이 살았던 것들이 있다면 다시 주변을 자세히 돌아보십시오. 끊임없이 있을 것입니다. 질교하고 아우성을 치며 나 조금만 봐 주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움직여 고통하는 이웃을 살려 내고자 하십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사랑방에서도 오늘 이 곳에서 일어났던 이 사건과 똑같은 일들이 재현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