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자 오늘은 이제 마가복음 23번째인데요. 지난 시간에 우리가 교인인가 제자인가 살펴보았습니다. 예 교인인가 제자인가 어 우리 자신에게 모두가 늘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초점을 맞추셨어요. 그게 모든 에너지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뭐 사람이 얼마나 모이느냐 또 내가 교회를 얼마나 다녔느냐, 교회 직분이 뭐냐 이게 중요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냐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자 예수님의 12 제자를 선발하시고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 하셨어요, 3년 동안. 이 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제자 훈련의 핵심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우리 교회에서도 제자 훈련을 합니다마는 이 공동체가 사실 좀 빠져 있죠. 사실 핵심인데 요게 빠져 있어요. 예 함께 먹고 함께 생활하는 것 그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삶을 통하여 관계를 통하여서 이제 훈련하는 겁니다. 이 제자들의 핵심이 동행이죠. 동행. 얼마나 주님과 깊은 친밀한 관계 안으로 들어가느냐. 이게 지난주 살펴본 내용이고요. 오늘 이어서 또 다른 제자들의 핵심인데 14절에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두 번째입니다. 함께 있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요? 보내신다는 것. 무엇을 와요? 전도를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던 제자들은 반드시 보냄을 받는다는 것. 함께 있다는 것은 관계에 초점이 있다면 보낸다는 것은 사역의 초점을 둔 겁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 제자 디사이플 이 제자들이라고 부르지만 사도행전으로 가면 제자라는 단어보다 사도라는 호칭으로 바뀝니다. 이 12 제자는 사도들이죠. 사도들. 근데 이 사도들이라는 말의 원어적 뜻은 보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보냄을 받는다. 그러니까 제자라는 단어 안에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에 좀 초점이 있는 것이라면 사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세상에서 영향을 끼치는 예수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 오늘날은 더 이상 사도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남긴 것이 있죠? 그게 신약 성경입니다. 신약 성경과 그 사도들이 살았던 삶의 이야기, 삶의 사역들은 우리에게 그대로 계승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 있죠. 요한복음 20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최초의 선교사시죠.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어요. 그리고 부활하시고 성천하시기 직전에 이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I send you. 자 그리스도는 부활 이후에 성천하셨지만 남겨진 예수의 제자에게 당신의 사역을 위임을 하셨습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끝내면서 16장 15절에 이렇게 결론을 맺어요.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자 그러니까 제자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는 보냄을 받는 사람이다. 보냄을 받는다. 그렇다면 신약의 교회도 역시 모두 보냄을 받은 공동체다. 그 말은 뭐냐면 일부의 사람만이 파송을 받는 게 아니고 신약의 성도들 모두가 보냄을 받았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신약의 모든 교회는 선교 공동체, 미션을 처치해요. 그 신약의 교회의 특징은 뭐예요? 그런 면에서 굉장히 역동적이죠. 결코 조용하지 않는 다이내믹한 교회.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사도행전입니다. 자 주님과의 친밀함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서는 안 돼요. 주님 앞에 머물러 있는 영성도 필요하지만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모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흩어져야 한다. 우리가 숨을 쉴 때 들숨과 날숨을 쉬야 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훈련받고 은혜받고 그것을 끝나지 않고 바깥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 그래서 제자는 교회 내부의 관상형이 아닙니다. 우리 흔히 뿌리 내리는 영성 얘기하는데 뿌리만 내리면 안 되고 열매를 맺어야 되죠. 그렇죠? 이게 이제 발란스입니다. 제자가 살아야 될 영역은 어디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것, 세상. 예 신앙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많이 세상과 분리되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이스솔레이트 돼 있다. 분리돼 있다. 외딴 섬이 되어 있다. 세상과 그리스도인들이 격리되어 있을 때가 많아요. 그 세상 속에는 참 어울리지 못하는 좀 부정 정세를 드러내는 신자들이 많아. 어 교회는 여러분 이 비유하자면 주유소와 같은 곳입니다. 예 자동차가 이 주유소에 가는 것은 거기에 정차하기 위해서 가지 않죠. 주유하고 떠나는 것이죠. 자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도 모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모여 함께 예배하고 다시 흩어져야 한다. 교회 와서 예배하고 훈련받고 교제하는 이 일은 뭐예요? 우리의 영적인 오일, 연료탱크를 채우는 작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요? 그 다음에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주님이 제자들을 보낸 이유는 전도입니다.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그랬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메시지를 들려 보내셨죠. 그래서 보냄을 받는 이 메시지를 가지고 나가는 메신저가 된 거죠. 왜 세상으로 가야 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가 있기 때문에. 전도란 무엇이죠? 전도지를 나눠 주는 것을 말하지 않아요. 교회를 나오라고 설득하거나 기독교를 소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전도란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해럴드. 예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라는 단어 우리가 많이 들었죠, 그렇죠? 복된 소식. 인류에게 전해 줄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왜 초대 교회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이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까요? 복음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들어 보면 굉장히 미련해 보이지만 그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비밀이 거기 있었다는. 그걸 깨달았던 거죠. 자 여러분 오늘날도 사람들은 다 목말라요.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도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도 뭘 찾고 있는 거죠? 오늘날 사람들도 돈을 찾고 돈, 권력, 뭐 인기, 명예, 성, 많은 걸 추구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도 모두가 무엇인가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걸 찾고 있는 거죠. 그걸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사람들이 진정으로 찾고 있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전도를 해 보면 무엇인가 잘 몰라서 배척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복음을 정확하게 전달해 줄 때 그들이 반응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막 화를 냅니다. 왜 진짜 나에게 알려주지 않고 이제 알려주느냐 이거. 저는 그런 분들을 참 많이 봤어요. 복음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를 참 많이 확인했습니다. 복음을 복음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거거든요. 이렇게 강력하게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 세상이 없어요. 최근에도 저는 이 급격한 삶의 변화를 경험한 분들의 간증을 듣게 되는 기회가 있었어요. 목사님 이렇게 좋은 것을 이제 알았다. 내가 왜 세상에서 그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그렇게 붙잡고 살았는지 목사님 이제 복음을 알고 나니까 그게 보입니다. 보입니다. 고백을 하는 거죠. 여러분 제자는요 보냄을 받지 않으면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정체성의 혼란이 생긴다는 거. 그냥 왕좌하는 겁니다. 세상으로 나가지 않으면 우리끼리 문제가 생겨요. 여러분 시비가 붙고 싸우는 교회들이 꽤 있습니다, 한국에.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불 보도 뻔해요. 그 소셜 클럽이 돼 있는 겁니다. 마치 침묵해하고 비슷해요. 종친에 침묵해 뭐 동창해 비슷하게. 괜히 별 것 아닌 것으로 갈등하고요. 서로 막 힘 주고 비교하고. 왜 시비가 붙습니까? 교회 안에는 자리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사역에 따라 경쟁을 하고 시기하고 서로 폼나는 사역을 하고 싶어하고 모든 성도들이 그 은혜를 받았는데 은혜를 받은 그 에너지가 교회 안에 막 다 몰려 있는 거예요. 은혜를 받고 힘을 써야 할 곳은 세상인데 교회 안에 다 모여 있는 거예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끼리 있으면 우선은 편하니까. 바깥으로 나가면 힘들어지잖아요. 여러분 세상 안에서 신자로 산다는 거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버거운 일이에요. 특별히 오늘날 문화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 그리스도인이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당장 만만치 않은 저항을 받아야 돼. 그러니까 세상 안으로 들어가라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 용기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 안에 모여 있는 거죠. 또 다른 요인 중에 하나는 이 원론적인 세계관 때문에. 세상과 교회를 성속의 개념으로 분리시켜 버렸어요. 교회 안은 무엇인가 거룩하고 세상은 속된 것처럼.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은 굉장히 거룩한 일이고 돈 버는 일은 굉장히 세속적인 일로 이렇게 구분을 시켜 버린 것이죠. 가능하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인 것처럼 오해한 겁니다. 이 목사님들이 세계관적인 관점에서 잘못 가르친 부분도 많아요. 이 원론적인 이런 신앙을 가지면 세상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어요.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해서 매우 수동적인 겁니다. 자 여러분 요즘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서 뭐 우리 앞이 조용합니다. 주차장이나. 그 평소에는 그렇지 않죠, 여러분. 우리 코로나 시대가 아니었을 때는 주일날 우리 교회 앞에는 막 문전성세하고 막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하고 막 그냥 사람들도 복적거립니다. 아 요즘 이 우리 교회에서 이렇게 비대면 예배로 온라인으로 드리니까요. 주일날 이 앞이 한산해요. 아파트 사람들이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 내 보니까 은근히. 그렇죠? 이게 지금 이 평소에는 막 우리가 보면 주일날 부산 시내 사람들이 다 여기 모인 것 같아 보이잖아요. 모두가 신자인 것처럼 착각이 됩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를 마치고 월요일 세상으로 나가면 신자들이 눈에 잘 안 보여요. 학교를 가도 직장에 가도 사무실에 가면 안 믿는 사람들의 둘러싸여 있는 거. 그러면 여러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수영로교는 어디에 있습니까? 흩어진 교회예요. 흩어진 교회. 막 대연동으로, 연산동으로, 서면으로, 동네로, 남포동으로. 우리가 있는 직장 곳곳에 우리가 경영하고 있는 사업장이든 우리가 우리 일터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전장이고 예배의 자리고 교회예요. 주일날 해운대 본당에서 예배만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좁은 건물 안에 가둔 일이에요. 그는 마치 구약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과 똑같아요. 교회 예배당이 아무리 커도 세상에 비해서 매우 작은 공간에 불과해요. 주일 예배가 끝나면 우리 모두가 일주일 내내 교회로 살아야 돼요. 여러분들이 모였을 때에 여기가 모여진 수영로교회. 여러분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수영로교회가 된 거죠. 월요일날 흩어지면 그 순간부터 수영로교회라고 하는 이 공간은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사실은. 어디로 가요? 흩어지는 거죠. 수많은 곳으로. 그래서 내가 있는 그곳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영로교회로서 수영로교회 성도로서의 진가를 드러내는 거죠. 여러분 교회 안에서는 우리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흩어졌을 때 이제 일어나요. 세상 속에서 얼마나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게 어디에서 진가를 발휘해야 하는가 하면 세상 속에 있는 거. 그래서 우리가 주일날 몇 명이 모였느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몇 명을 세상에 파송했느냐는 예수의 제자로. 예. 교회 안에서 집사, 장로, 권사로 인정을 받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진짜 인정을 받아야 할 곳은 세상 속이라는 겁니다. 직장 안에서 예수의 제자로 인정을 받는 거. 아 저 사람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 안 믿는 배우자나 자녀들에게 인정을 받는 거죠. 이것이 바로 보냄을 받는 제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계속 보내시고자 합니다. 우리끼리만의 울타리에 갇혀 있으면 제자도의 심각한 결함이 생겨요. 세상 속에 보냄을 받은 제자로서 전도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쉽지만 직장 안에서 인정을 받는 일은 어려워요. 여러분 예수 믿으라는 말만으로는 요즘 안 되잖아요. 예 복음을 삶으로 보여줘야 돼. 지금 시대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요 예수 믿는 사람들 좀 오심해요.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뭔가? 그 믿음의 실체를 사실 오심하는 거죠. 왜 교회 전도하면 하면 왜 교회로 오라 하지? 요즘 그런 목소리들이 떠들어나고 있죠. 당신들 뭐 하느냐는 거죠. 당신들을 볼 때 난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막 화를 내 버려요. 우리는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하는데 세상의 사람들은 달갑지 않게 여기는 거죠. 여러분 교회가 이 전도를 할 때 뭐 하나의 막 교회 행사처럼 이 안을 되면 안 돼요. 우리는 전도가 요즘 어렵기 때문에 전도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막 개발해야 된다. 때로는 막 마케팅에 마케팅적인 어떤 전략을 막 도입하게 돼요. 그 굉장히 위험한 겁니다. 복음은 복음을 다른 것으로 포장해 포장해 하려고 했으면 안 돼. 복음이 너무 가볍게 다루어졌던 거죠, 오늘날까지.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소홀했던 겁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복음이 우리 안에서 먼저 깊이 경험되는 일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복음을 복음을 경험하고 복음을 살아내야 되는 거. 복음의 실체가 우리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야 하는데 이 복음이 우리 안에 먼저 녹아지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우리는 뭐 단순히 세상의 사람들이 비추일 때 뭐 술 안 먹고, 요즘은 뭐 술 먹는 교인도 많고 담배 안 피우고 술 안 먹는 정도가 예수쟁이의 전부가 되면 안 되는 거. 예수 믿는 사람이 더 이기적이고 잘난체하고 좋은 말은 골라가면서 사는데 왠지 매력적이지 않고 끌리지 않는 부류들. 이 자칫하면 우리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반감을 더 가지도록 부추기는 일을 할 때가 많아요. 여러분 전도는 단순히 교인 수를 늘리는 게 아닙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이 그 복음의 실체를 보여주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이 목이 말라서 이끌려 오게 되는 거죠. 뭐 강요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복음을 경험하면요 그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특성상 그 가슴에 그 복음의 불을 질러요. 그 복음 자체가 그 사람을 막 불을 질러 버려요. 바울 사도가 그 한 얘기가 그거죠. 복음을 내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죠, 바울 사도가? 쉬운 얘기가 아니에요.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가 지금 이걸 그냥 내 내가 경험한 이 복음을 내가 그냥 안고 있으면 미칠 것 같은 거예요, 사실은. 그 복음 자체의 폭발력이 있는 거에요. 폭발 막 다이나믹. 로마서 1장 16절에 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남입니다. 능남이 다이나믹 마인드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누가 뭐라고 해도 복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그 바울이 그걸 발견한 겁니다. 여러분 오늘 죄로 망가진 세상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다 망가져 있어요, 여러분. 그들어 보면 뭐 대단한 것 같은데 다 망가져 있어요. 뭐 별일 없어 사는 것 같지만 여러분 사람들 만나 보십시오. 들여다 보면 전혀 아니에요. 고통하는 거 신음하고 있는 겁니다. 그 원을 거슬러 가면 뭘까요? 죄입니다. 죄. 여러분 좀 코로나 바이러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으며 온 인류적이잖아요. 팬데믹 현상.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다양한 원인 분석들을 합니다, 과학자들이. 결국은 인간이 원인을 제공한 거예요. 그 원인을 거슬러 가면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탐욕입니다. 죄, 죄. 지금 뭐 여러 가지로 막 얘기하지만 것을로 가면 죄입니다. 인간의 죄가 딱 웅크리고 있는 겁니다. 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바이러스 이 문제 해결되지 않습니다. 바이러스 문도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어. 이젠 기우 이 자연재도 마찬가지예요. 전부 다 인간이 제공한 인재예요. 인간의 죄가 그 안에 있는 겁니다. 근데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인간의 인류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데 이 죄 문제를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가? 하나도 해결할 수 없어요. 아무리 그던 방법으로 어떤 대책을 세운다 할지라도 금방 우리는 한계를 드러내요. 우리는 문명의 끝 지점에서 지금 살고 있는 겁니다. 이 문명이 이 인류가 지금 100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 심각한 진단들을 많이 내리고 있잖아요. 누가 봐도 우리는 마지막 때에요. 죄로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해 낼 길이 있는가. 이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되죠, 여러분. 뭐 코로나가 지나면 뭐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돼요. 필립 얀시가 그의 책에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이런 짧은 얇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 끝부분에 이 필립 얀시가 어떤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건데요. 그 얘기에 이런 얘기가 유명한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얘기예요. 스트라빈스키가 한번은 아주 어려운 곡을 연주곡을 썼어요. 그리고 그 곡을 연주하도록 이제 전해받은 연주자가 몇 주간 그 스트라빈스키의 그 곡을 어려운 곡을 막 연습한 끝에 결론이 뭐냐면 너무 어렵다는 거. 연주를 할 수가 없어. 너무 어려워 가지고.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연주 자체가 불가능한 거. 이때 못하겠다고 이제 온 그 사람에게 스트라빈스키가 한 말이에요. 이해합니다. 근데 내가 의도하는 것은 뭔가 하면 어떻게든 연주해 보려고 했을 때 나오는 그 소리입니다. 애당초 스트라빈스키는 뭐 완벽한 연주를 하기를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어찌 됐든 연주자가 연주해 버리고 했을 때 나오는 그 소리를 기대했다는 거. 그렇게 하고 이제 이 곡을 만들었다. 필립 얀시는 여기서 교회의 이야기로 연결을 시켜요. 교회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세상에 들려주는 데는 한계가 너무 많아요. 오늘날의 교회가 복음을 완전히 이해하고 전합니까? 못 해요. 저도 복음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이 아니에요. 복음을 누가 과연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불가능해요. 임파서블해요.
[28:29]교회가 하나님의 메시지 이 복음을 세상에 들려주는 데는 한계가 스스로도 많아요. 그러나 그 불안정한 음이 남아 들려 들려 주려고 한 연주자와 같이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오늘의 교회가 불안정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부실한 면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에 복음을 전할 곳은 교회밖에 없어. 하늘의 메시지를 이 땅에 선포할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어. 세상은 갈수록 더 복음이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았다라고 하는 이 부분에는 굉장히 긴박감이 있는 거예요. 긴박감. 오늘 우리가 가진 복음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임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져요. 여러분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너무도 많습니다. 특별히 부산은 복음화율이 아주 낮죠. 전도가 힘든 도시에요.
[29:56]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해야 돼요. 복음을 전도를 해 보면 여러분 우리가 도무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우리의 생각들을 많이 할 수 있지만 그건 우리의 생각이에요. 복음을 전하다 보면 우리의 예측이 빗나갑니다. 코로나 시대 전도가 어렵지만 여전히 전도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얘기를 들으면 힘이 나요. 전도 집회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억지로 따라온 사람이요 복음을 듣고 그날 완전히 뒤집어지는 사람이 있고요. 너무너무 협조적이고 와 준 사람은 말똥말똥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길거리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사람을 딱 보면 너무 험상 굳어 가지고 어 잘못하면 한대 맞겠다 싶은데 그래도 용기를 내서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요. 어떤 사람은 너무 부드럽고 너무도 친절한데 복음을 전혀 안 받아들이는 사람. 신기한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요즘 여러분 가나안 성도들이라고 해서 교회를 떠나고 있는 분들 가운데도 교회를 돌아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분들이 교회 오잖아요. 요즘은 온라인이 막 많이 나가니까 온라인 설교를 듣고 이분이 마음이 바뀌어 가지고 교회로 돌아온 이승일. 우리는 세상에 줄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줄 건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줄 게 있어요. 그게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에요. 여러분 제자는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요. 세상 안으로 들어가 우리가 복음으로 살고 교회로 존재해야 돼요.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은 우리의 존재는 숨겨질 수 없다는 겁니다. 드러나 있어요. 내가 있는 자리가 보냄을 받은 곳이죠. 그래서 이 가라는 명령은 공간적인 이동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제자는 존재 자체로 주변에 파문을 일으켜요. 그 빛으로 있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있는 거.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어야 돼요. 어떻게 나는 내가 정말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찾아 물어야 돼요. 여러분 전도가 지금 힘들어진다고 하지만 복음을 전한다고 심각하게 핍박하는 세상은 아니에요. 뭐 드라마 까칠한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중동 국가와 같은 것과 비교해 보면요 우리는 핍박이라는 단어를 알지도 못해요. 요즘은 특별히 SNS를 통해서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나 좋은 이런 복음의 도구들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제자는 예외 없이 보냄을 받았어요. 나는 아니다라고 하면 안 돼요. 내가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건 좋지만 것에 빠져 구원받아야 될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거. 하나님은 열방의 하나님이시죠. 모든 민족들 가운데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는 교회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보내심을 받았다라고 하는 이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가라라고 하는 이 주님의 명령에 오늘도 기꺼이 순종하며 나아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는 또 12 제자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어요. 3장 16절에서 19절에 보니까 이 열두를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메와 마태와 도마와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롯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자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다양해요. 시몬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어요. 시몬이라 이 매우 성격이 다혈질적이고요. 변화무쌍한 사람이에요. 개성이 굉장히 독특하고 강한 사람입니다. 또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 나오는데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주셨어요. 우레의 아들 우레. 벼락이 막치는 거. 이 성격이 이렇다는 거, 성격이. 불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게 3년 동안 공동체로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야단 났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출신 성분도 다양했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로마 정부에 속해서 일을 한 사람이에요. 이 우리나라로 치면 이런 사람을 뭐 일본 일제하에 일본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친일파로 이렇게 규정하잖아요. 뭐 그런 거죠, 마태가. 근데 셀롯인 시몬이 나오는데 셀롯인은 열심당원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 민족주의적인 색체가 강한 애국주의자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로 치면 우파예요, 우파. 자 과격한 혁명 단체에 속했던 활동을 했던 이력을 가진 사람들. 근데 지금 로마의 정부에서 녹을 받고 일을 했던 마태와는 아주 극과 극이죠, 여러분. 정치적으로는. 근데 마태복음을 보면 마태는 세리와 열심당원 간의 친밀함을 강조해요. 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치적인 입장이 달라도 그들은 예수의 제자로 동력을 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죠? 국가에 대한 충성도 충성도보다 예수에 대한 충성도가 더 위에 있기 때문에 이게 가능한 거예요. 세상에 많은 차이들이 있어도 예수의 이름 안에서 녹아지는 거예요. 십자가의 능력이죠. 십자가는 모든 차이, 모든 계층, 모든 갈등, 모든 이념을 다 녹여 버려요. 하나가 되게 합니다. 그 위에 있기 때문에. 만약에 이게 잘 안 되는 분들은 아직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가 되게 하는 유일한 힘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어요. 복음은 큰 그림을 그리게 하죠. 폭이 넓어요. 옹졸하지 않아요.
[39:24]자 오늘 19절은 의미심장합니다. 또 가롯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씁쓸한 이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를 판 자예요. 12명 중에 하나. 여러분 어디에나 있어요. 아군 속에 적군이 숨어 있어. 하나님의 나라이 이래서도 어둠의 역사는 떠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방해꾼이 어디나 있다는 거. 12명의 제자 가운데 배반자가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시도는 어디에나 있어요. 다 뒤섞여 있는 거예요.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어두운 그런 반대 드레스 세력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완성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오늘 주님의 제자들을 볼 때 눈에 띌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요. 면면들을 보면 변변한 이력들이 없습니다. 평범하고 연약한 자들이에요.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에 대한 심사 기준은 좀 다릅니다. 사무엘상 16장 17절에 있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외적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제자들을 보면 결점 투성이들입니다. 왜 그들을 사용하셨는가? 자 고린도전서 1장 27절로 28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여러분 왜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29절이 답이잖아요.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인간적인 자랑을 다 제거했어요. 여러분 인간적인 자랑거리가 좀 있는 사람은요 그걸 다 박살을 내고 난 다음에 쓰자요. 인간적인 자랑을 제거하셔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돼요. 여러분 어떤 사람은 막 난 너무 부족해서 못 해요. 진짜 그게 진실이라면요 그게 딱 하나님이 일하시기 좋은 상태예요. 하나님의 능력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 얼마나 이 성경이 분명합니까,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이에요. 그냥 약한 존재란 말이죠.
[43:18]우리 믿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질그릇이에요. 질그릇이 중요한 겁니다. 깨어지면 그 안에 있는 보배가 드러나잖아요. 질그릇이 금이 쫙 가도요 그 안에 보배가 중요한 거죠. 우리가 빛날 이유가 없습니다. 자꾸 착각하는 경우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방식과 반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능력이 부족해서 쓰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잘 것 없어 쓰임 받는 거예요. 2000년 역사를 보면 입증이 됩니다. 갈릴리의 천부들 그 별 볼일 없는 12명 그 자시처럼 미미하잖아요. 근데 어떻게 그 물고기를 잡았던 베드로를 하나님 그렇게 쓰실 줄 우리는 몰랐죠. 어메이징해요. 어메이징해요. 주님이 하시는 일은 놀라운 겁니다. 자격 없는 자를 부르셔서 사용하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우리만 바라보면 소망이 없는 거잖아요. 여러분 왜 우울증 걸려요, 여러분? 나를 바라보니까 소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울증을 빨리 바꿔서 하나님을 바라봐야죠. 근데 계속 자기만 바라보면 우울증 걸립니다. 예. 여러분 우리가 자격에서 부른 것 아닙니다. 잘나서 부른 게 아니고요. 못나서 부름을 받은 거예요.
[45:28]약해서 부름을 받은 거예요. 저는 저를 봐도 그래요. 저는 정말 기적이에요. 목회하고 설교하고 있다는 게 정말 기적이에요. 기적이에요. 막 앞에서 막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고 막 부끄러워하고 시아인 사람인데 계속해 목회를 할 수 있는지. 시드니에서도 목회를 할 때 보면 사람들이 막 몰려는데 이게 매주이 무슨 일이야? 이 기적이 정말 기적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막 몰릴 말이 한꺼번에 몰릴 때는요 막 겁이 나더라고요. 내가 그냥 덜덜덜덜 떨면서 기도했어요. 설교했어요. 나 때문에 그런 게 아니죠. 주님이 주님이 하시는 거.
[46:34]모든 게 은혜예요. 우리의 실력이나 성품이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는 다 부족한 자들이에요. 그런데 부르셨어요. 이게 은혜죠.
[46:50]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빼 버리면 꽝이에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선택이었죠. 주님의 부르심. 그 다음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거. 여러분 적당하게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으로 편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군중으로 남아 있지 마시고요. 예수를 따르는 진정한 제자로 살아가시고요. 우리 모두는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 코로나19 팬데믹, 비대면 사회, 사회적 거리두기로 접촉점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은 우리를 세상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가라는 명령은 급박한 명령이에요. 오늘날 여러분 코로나 이 팬데믹 현상으로 온 세상에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죽음의 두려움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48:15]인류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48:26]우리가 전해야 될 복음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때예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낼 유일한 메시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이에요.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전령들로 이 마지막 추수 때에 이 복음의 능력을 가진 자로서 거침없이 담대하게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담장 안에 갇혀 있으면 안 돼요. 우리는 모든 것을 복음의 증거의 기회로 삼아야 돼요. 왜 이 코로나가 일어났는가? 그리고 이 코로나에 지속적인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실 일이 있고 그 하실 일 가운데 하나가 구원받아야 될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도구로 이 코로나 팬데믹을 사용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고 계세요. 고통하고 신음하는 세상의 한가운데 사람들은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더 분명해졌어요. 우리는 세상 속에서 승부를 걸고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교회에 자주 나오지 못하는 이제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 더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와 닿아요. 이제 흩어진 교회로서 내가 있는 곳곳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고 예 주일 예배가 아니라 일상의 예배가 더 중요해졌고 또 우리가 있는 모임의 예배뿐만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예배하고 증인으로 살고 교회로 살아가는 일주일 내내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 해야 될 때가 왔습니다. 세상 가운데서 울타리를 넘고 담장을 뛰어넘어 교회 바깥에서 우리의 믿음의 실력을 드러내고 구원의 이 나팔수로서 메신저로서 당당하게 전한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