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mbnail for | 다시보는 BEST 설교 | 갈등 어떻게 다룰 것인가? | 수영로교회_이규현목사 | 로마서 14:1~6 | by CTS BEST 설교

| 다시보는 BEST 설교 | 갈등 어떻게 다룰 것인가? | 수영로교회_이규현목사 | 로마서 14:1~6 |

CTS BEST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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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우리가 홀로가 아니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독도 또 이런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게 아니고 함께 살아야 되죠. 내 홀로 사는 살지 않고 함께 살아야 된다고 할 때 이 함께 산다는 게 참 어려운 것입니다. 특별히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면서 살아간다는 거. 이 쉬운 일이 아니죠, 여러분. 오랫동안 연애를 하고 서로를 굉장히 안다고 생각하고 결혼한 가정도 부부가 굉장히 갈등을 결혼한 순간부터 얼마나 다른 게 많은가 하는 것에 놀라면서 갈등을 하죠. 그래서 결혼한 신혼 부부들도 3년 동안 대판 싸우는 거 아니에요?

[0:46]교회가 어떻습니까?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는 거. 이거 기적입니다. 싸우는 게 정상이고 안 싸우고 있다면 그게 기적이에요.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인, 교회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은 없습니다. 로마에 있던 교회가 그렇습니다. 바울이 로마를 향하여 이 로마서를 편지를 보낼 때 로마에 있는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으로서 로마에 살던 유대인으로서 로마에 살면서 예수를 믿고 이제 신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유대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율법주의 아래서 음식을 먹는 것들을 가려 먹는 그 문화 속에 살았단 말이에요. 어떤 것은 먹어야 되고, 어떤 것은 먹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엄격하게 규정되어져 있는 그 유대주의적 배경에서 자라났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지만 여전히 그 문화의 배경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거죠. 목매인 것을 먹지 말게 하는 거, 피, 피를 먹지 않게 하는 거, 돼지고기를 먹지 않게 하는 거. 특별히 돼지고기나 이런 것은 굉장히 부정한 거. 한국 사람이 모두가 좋아하는 삼겹살.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굉장히 경멸했어요. 부정한 음식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레이기를 요즘 보지만, 큐티 책에서 보지만 이 규정이 굉장히 까다로운 것입니다. 특별히 이 고기들 가운데는 시중에 나와 있는 일반적인 고기들은 다 우상의 제물로 일단 들여졌다가 나오는 거죠. 마켓에 나온 모든 고기는 우상의 제물로 들여졌던 것. 그런 예식에 참여했던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런 것들을 먹는 걸 굉장히 꺼렸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삶의 그 배경이 우리 얽매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채식을 하고. 근데 이 이방인들로서 로마인들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그런 꺼리낌이 전혀 없어요, 먹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든 먹는다. 어떤 것이든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졌어요. 그러니까 고기를 마음껏 먹는 이방인, 로마인들이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이 사람들은 로마인들은 예수 고기를 먹지 않는 그 유대인 신자를 굉장히 경멸하는 거죠. 왜 그 복음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이전에 율법에서 다 자유로워지고 이제 더 이상 그 매이지 말아야 되는데 왜 아직도 매여서 고기를 못 먹냐. 업신여겼다는 거. 그러나 고기를 안 먹는 유대인 신자들은 어때요? 고기를 먹는 사람을 아주 또 비판한 거죠. 판단을 한 것입니다. 자, 이 먹는 문제로 인해서 교회 안에 논쟁이 벌어지고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서로 정죄하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고기를 먹는 것을 꺼리끼는 사람들과 꺼리끼지 않는 사람. 그 고기를 먹는 것이 마음에 꺼리껴서 먹지 못하는 사람을 믿음이 약한 자로 규정을 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사람을 강한 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오늘 여기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를 구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편에 들려고 하지 않고 바울이 강조하는 핵심은 3절에 있어요.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고기를 먹는 사람이나 먹지 못하는 사람이나 서로 무시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존중히 여기라. 이게 바울이 말하고 있는 기본적인 골격입니다. 자,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갈등이 일어나는데, 여러 가지 이슈로 갈등이 일어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 오늘 우리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 이것은 본질적인 게 아니에요. 비본질적인 주제입니다.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먹고, 먹는 것이 양심에 걸리면 안 먹으면 되는 거예요. 먹느냐 안 먹느냐 그게 중요한 주제가 아니라는 거죠. 고기를 먹으면 죄가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양심에 걸리기 때문에 안 먹는 거고, 걸리끼면서 먹는 게 그게 문제죠. 각자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배경과 경험 안에서 생긴 관점 차이로 일어난 이런 문제들. 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핏대를 올리거나 투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본질적인 주제가 아닌 지극적이고 부수적인 주제를 가지고 싸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본질적인 것은 흔들리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로마서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가 뭐예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거.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본질적인 진리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 그 싸워야 되는 거. 안 되는 거예요. 마틴 루터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 행위 구원으로 빠져버린 로마 캐톨릭의 그 당시에 교리에 반항한 거예요. 그 행위 구원으로 빠지니까 결국은 면죄부 판매가 가능한 거란 말이에요.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기는 죄를 짓고도 언제든지 헌금을 하고 공헌을 세우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오도해 버린 것이죠. 여러분 이것은 핵심적인 진리에 속한 것은 싸워야 되는 거죠.

[6:21]오늘날 우리가 종교 개혁을 지키고 있는데 개혁주의를 지키고 있는데 마틴 루터가 1517년에 95개 조항의 방방문을 비텐베르크 성 그 교회 앞에 대답을 걸고 싸움을 걸었어요. 이 종교 개혁을 우리가 기 계속 기념해야 될 이유는 늘 본질을 핵심을 재확인하는 거.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 리폼드, 오늘 우리 개혁교회라고 말합니다. 역사를 보면 항상 본질을 잊어버리고 곁길로 빠질 때가 많았어요.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모두가 선한 자기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그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다른 것으로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이 본질로 돌아가는 이 개혁, 특별히 종교 개혁자들이 내건 슬로건이 뭡니까? 오직 성경. 오직 성경.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이 종교 개혁자들이 가 내 걸었던 이 기치였습니다. 이 핵심적인 진리를 위해 신앙의 선조들이 생명을 걸고 싸워 오늘 우리에게 참된 순수한 이 진리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 주었습니다. 젊은 사제였던 한 사람 마틴 루터는 진리의 수호를 위해 거대한 로마 교회와 싸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는 바위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너무 고집을 피우거나 목숨을 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삶에 가져야 될 태도가 뭐냐 하면 진리는 바위처럼 비진리는 물처럼. 진리에 대해서는 본질에 관해서는 바위처럼 버티고 서며 물러서지 않아야 돼요. 그러나 비진리에 관해서는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물처럼 흘러야 돼요. 여러분 시냇물이 흐를 때 그 물을 보면은 거대한 바위가 가로막고 있어도 맞붙어서 싸우지 않아요. 시간을 세월을 보내면서 그 물을 채우죠. 그리고 그 바위를 쓰다듬으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부딪히고 싸우지 않는다는 거. 여러분 본질과 비본질을 잘 구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이 아닌데 갈등하고 대립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 우리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싸우고 갈등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안 좋은 싸움이 소모전입니다. 쓸데없이 에너지만 낭비하고 소득은 소득은 전혀 없는 싸움, 그것은 피해야 합니다. 집에서도 우리가 싸우는 주제가 뭡니까? 아프리카 에볼라 문제 때문입니까? 북핵 때문입니까? 인류의 평화 때문입니까? 금융의 위기 때문입니까?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싸우는 거예요.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후회할 유치한 주제들. 본질에 집중하고 본질에 충실한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문제보다 개인의 신념의 문제를 가지고 싸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도 대부분은 사소한 일들로 출발하죠. 카펫트 색깔을 뭘로 할 거냐? 그래서 어떤 교회는 카펫트 색깔을 두 파로 한쪽은 시편 23편 과 파. 그들은 푸른 초장이니까 푸른 색깔을 깔아야 됩니다. 한쪽은 그리스도의 보혈파. 붉은 색깔이다, 교회는. 이 시편 23편 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파가 싸운다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어떤 교회는 바자회를 준비하는데 누구를 회장으로 세울 것인가? 준비 위원장으로 세울 것인가? 그걸로 싸우는 거. 교육관을 세우는데 3층을 할 것인가, 5층을 할 것인가, 7층을 할 것인가?

[10:17]크리스마스 칸타타 발표회 하고자 하는데 성가복을 입고 할 것인가 산타 모자를 쓰고 할 것인가?

[10:26]창립 기념일에 떡을 할 것인가 수건을 돌릴 것인가? 이런 거 하다가 싸운다니까요, 진짜로. 유치하죠. 예배시에 어떤 악기를 사용해야 하는가? 성경 몇 절 몇 장 몇 절에도 없어요. 개인의 문화, 경험, 취향. 자신의 삶의 배경에서 나온 주장들이죠. 우리가 다투는 대부분은 진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 문제도 아니에요. 교회가 역사가 흐르면 전통이 쌓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정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근데 세월이 흐르면서 좋은 정신은 힘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좋은 전통이 초기에는 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했지만 나중에는 교회를 깨는 원흉이 될 수도 있어요. 좋은 전통을 지키는 것은 좋지만 전통이 성경보다 더 강조될 수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 전통은 깨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전통을 지키는 쪽일 가능성이 많고 오래되지 않은 분들은 전통보다 변화를 선호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동일해요. 문제는 접근 방식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목적 속에 갈등하고 대립하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그때 무엇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분명히 대답할 것이 있어야 돼요. 고기 먹는 문제 때문에 싸우다가 왔습니다.

[11:56]웃기는 얘기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다툰다고 결론이라는 것이 아닌 것들도 많아요. 교리 중에 전 천년설 후 천년설 우리는 신학적인 교리의 문제로 교파가 나누어졌어요. 근데 성경의 어느 쪽도 그 근거를 댈 수 있는 논리들이 있습니다. 근데 나중에 사실 가봐야 알아요. 전 천년설, 후 천년설 이게 어려운 얘기지만 이게 교파로 나누어지게 되는 하나의 배경이잖아요. 근데 언제 주님이 어떤 형태로 오시는 거에 대해서 다양한 신학적인 그런 논리들이 대변되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로서는 다 알 수가 없어요. 그냥 그렇게 여기고 있는 거죠. 여러분 교파라고 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왜 제가 저에게 장로교 목사가 되었느냐고 물으신다면 처음부터 장로교 교리에 심취하고 칼빈의 신학의 매력을 느끼고 장로교 목사가 된 게 아니라 내 우리 집 가장 가까운 곳에 장로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12:55]그 교회를 다니다 보니 장로 교인이 되었고 장로 교인이 되다 보니까 장로교 신학회를 하게 되었고 장로교 목사가 된 거예요.

[13:05]침례 교인들에게 물어보세요. 왜 침례 교인이 되었느냐? 아, 침례 받는 게 너무 처음부터 매력적이고 그 신학에 내가 심오함을 깨달아 침례 교인이 된 사람이 없어요. 자기 아버지가 침례 교인이어서 침례 교인이 된 거고. 친구가 침례 교인이어서 따라가다 보니까 침례 교인이 된 거.

[13:26]여러분 우리가 주장을 하지만 나중에 주님 앞에 서면 아무것도 아닌 신고한 주제를 가지고 갈등하고 싸웠으면 안 됩니다. 이단을 용납해서는 안 되지만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열린 태도가 필요해요. 항상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 에너지를 쏟고 생명을 걸 만한 일에 내가 생명을 바치는가? 열을 올리는가? 초점은 무엇을 먹느냐 안 먹느냐, 어떤 날이 더 나은 날인가? 그것은 본질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마다 자신이 가진 문화적 배경 속에 자신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고 핵심이죠. 오늘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전혀 관심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잘 알아야 돼요. 성경을 잘 알아야 돼요. 그래서 성경 안에서 언제나 본질에 집중하는 거. 우리가 큐티를 하면서도 매일 아침마다 성경을 볼 때 그 본문 앞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게 답을 얻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전혀 성경이 말하고자 아니하는 것에 내 관심을 쏟고 그게 시간을 다 바치면 그것은 낭비가 되는 거예요. 자,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가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자유하되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뭘까요? 오늘 6절에 보면 나를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요한 목표는 주를 위하여. 어떤 날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하는 것인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주일 성수에서도 무엇을 하지 않느냐에 대한,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한 논쟁을 많이 해 왔어. 두 돈. 그러나 주일날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했어요.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면하는 변화는 무엇인가? 우리를 얽매던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더 이상 우리의 삶에 제한을 가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먹는 문제가 까다로운 일이었습니다. 먹어야 할 것과 먹지 않아야 할 것들이 구별되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규정들이 율법에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는 그런 규제들은 전혀 의미가 없어졌어. 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그 모든 것들은 그림자들이에요. 빛이 임하면 그림자다 사라지는 거죠. 그래서 모든 것을 주신 것을 감사하게 먹으면 되는 거예요. 자유가 온 거죠. 여러분 복음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뭐냐? 자유예요. 우리의 인습과 우리의 삶의 문화가 있고 있는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세상의 잘못된 신하로부터 우리가 자유케 되는 이 은혜가 복음 안에 있는 거죠. 근데 단 자유를 누리되 몇 가지 염두에 둘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얻은 자유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면 안 돼요. 나의 자유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믿음이 있어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아직도 그런 단계에 이르지 않은 사람이 고기를 먹는 것을 꺼린다면 그것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고 받아들여 주라는 거죠. 또 자유를 누리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누릴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성숙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우리가 자유롭게 고기를 먹어도 돼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실족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성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기 먹는 게 죄가 되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사냐? 너희들 참 웃긴다. 난 먹는다. 그러면서 약을 올리면서 먹으면 안 된다는 거.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실족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성숙함이 아니에요.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는 배려하는 것이 성숙인 것입니다. 신앙이 강한 사람이 약한 자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아직도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유하되 절제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바울은 우리의 전체적으로 이 메시지 속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 우리의 공동체 속에 서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용납하고 품는 거. 너무 강한 주장을 하지 말라. 서로가 용납하고 품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 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주장이 없는 사람은 없죠. 다 주장이 있습니다. 주장하십시오. 그러나 적당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너무 강한 주장은 문제가 있어요. 내 생각과 내 말만 맞다. 그 내가 성경이죠. 그럴 수가 없는 거죠. 내 내 생각이 언제 올 언제나 옳다. 내 말이 언제나 옳다. 이 고집이 너무 강하면 그렇게 되는 거죠. 그게 그러면 내가 곧 예수님의 자리, 예수님만 그렇게 하실 수 내 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그건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거예요. 내 말이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 하는 이 논리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은 폭력인 것입니다. 신앙이 강하다는 게 뭘까요?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강한 게 아니고 약한 자를 받아들일 줄 아는 게 강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믿음이 강하다는 것을 상대를 꺾는 것으로 드러나면 그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결국 신앙의 성숙이란 탄력성입니다. 복음이 주는 능력은 탄력성입니다. 유연성입니다. 복음을 경험하고 나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유연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 혼자만 잘 믿고 있는 것 같이 착각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결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죠. 보통 아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한국에. 그런데 신앙의 그 경력을 무기 삼아 남편을 막 무시하고 우습게 여긴다면 그 신앙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아내가 더 많이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겸손으로 드러나야 되죠.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아빠를 올려 주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이 겸손, 그게 신앙인 것입니다. 내가 신앙이 좋은 것을 무기로 삼아 아내 남편의 길을 죽인다면 남편은 그런 예수를 믿고 싶지 않아요.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세지는 아내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내를 통하여 비추어진 그런 예수를 믿고 싶지 않은 거예요.

[20:33]보통 때도 말씀으로 아멘 하시기를 바라고. 아내가 상처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늘 조심해야 하는 것은 판단하고 정죄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 안에서 우리가 너무 오래 믿어왔다면 그게 자랑이 되고 훈련받고 믿어왔고 열심히 해왔던 그게 자랑이 되고 무기가 되고 의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돼요. 우린 그런 것들이 있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을 치죠. 그리고 그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다른 사람의 길을 죽이는 일에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술담배만 해도 마찬가지예요. 교회 올 때 깜빡하고 어떤 분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여전히 술 담배를 끊지 못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여러분 사실. 끊고는 싶었는데 끊어지지가 않아. 그래서 어느날은 교회로 오는데 너무 급하게 온 나머지 이 담배를 빼고 오지를 못하고 넣어두고 왔어. 근데 교회 입구에서 누구와 만나서 인사를 하는데 이게 인사를 너무 겸손하게 하다 보니까 떨어져 버렸어. 그럴 때 외계인을 쳐다보듯이 바라보면 안 돼요. 극악한 눈빛으로. 모른 척 해 주는 거예요. 막 눈을 홀기면서 아직도 그 모양이냐고. 그러지 말아야 돼요.

[22:22]오히려 장미 향기를 맡듯이. 결코 인상을 쓰지 않고. 자비와 긍휼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거. 그게 신앙인 것입니다. 웬만하면 용납하고 이해하는 태도를 가지는 게 복음 정신이에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도량이 좁아져요. 온고집이 되어 답답해져요. 앞뒤가 막힌 사람이 될 수가 있어요. 가능하면 양보해야 돼요. 져줘야 돼요.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인상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 곳에서나 십자가를 진다고 하지 말아야 돼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상대를 위해 죽어지는 것이 십자가예요. 자기 주장을 관철하고 자기 혈기로 싸우면서 예수의 이름을 걸면 안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고 얼마든지 논리로 그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그곳에는 십자가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이기는 그 순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돼요.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십자가는 자기의 주장과 권리를 내려놓고 조용히 죽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고집이 관철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 자기의 고집이 꺾기워지는 것, 그것이 이기는 길이에요. 십자가의 길이라 말이에요. 교회 안에서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고집과 혈기와 성질을 풀어내는 곳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는 길, 저주는 것. 그것이 십자가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앙의 연약한 그 사람이 신앙이 자라서 어느날 내가 이렇게 그때 그렇게 못 나고 그렇게 미련하고 그렇게 수 없는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의 신앙의 선배들이 넉넉하게 나를 받아주고 품어 주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다 고 고백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먼저 한 것 때문에 아직 믿음의 길에서 초보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 익숙해지고 나름 경험한 것들이 많아집니다. 이전에 경험을 무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이전 경험에 붙들려 있기가 쉽습니다. 해 오던 대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훈련도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또 직분을 받고 있다 보면 그 열심과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쪽으로 자기를 착각하고 포장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쪽으로 흐르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열심을 내고 난 다음에 문제예요. 열심을 내는 것까지 좋아요. 근데 열심히 너무 넘쳐 그것이 하나의 고집이 되고 그것을 절대화해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쪽으로 흐른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잘못된 신앙적 고집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때가 많아요. 신자들끼리만 끼리 싸우면요, 약도 없어요. 세상은 약이 있어요. 술. 한잔하고 화해도 해요. 근데 우리는 말짱한 정신으로 싸워요.

[25:30]그리고 그 싸울 뿐만 아니라 그 싸움에는 신념이, 신앙적 신념까지 끼어들어요. 그리고 누구의 이름까지 가지고 오느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까지 빌어 와요. 예수의 이름으로 싸워요. 그 한쪽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싸우고 한쪽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워요. 하나님이 누구 편을 드셔야 되죠?

[25:53]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싸움에 예수의 이름까지 걸고 싸우니까 우리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칫하면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육체로 마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늘 경계해야 되죠.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다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 우리 모두는 달라 다르다는 거죠. 우리가 실패하는 경력이 어느 곳인가 하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에 너무 열심을 낸다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의 우리 안에는 굉장히 이 양비론적인 게 있어요. 내 편 나쁜 편. 아주 극단적인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진리의 문제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나와 다른 것이 다른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주는 거. 삶의 배경이 다르고 각자의 경험이 다른 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정상이잖아요.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해 보십시오. 얼마나 다릅니까? 초기에는 싸우다가 불리다고 그래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일평생 살면서 알다가도 모를 게 여자들아 그러면서 알 만큼 할 때 돌아가시잖아요. 안 싸우는 게 이상해요. 싸워야 당연해요. 그러나 이 교회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와 함께 모여 살아갈 때 우리가 받아야 할 훈련은 뭐냐면 상대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 나가는 거. 우리는 몇 가지 아는 것으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다 안다고 속단하잖아요. 어떻게 다 알까요, 여러분? 10년, 20년, 30년을 살아도 다 모르는데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는 불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상대를 알아가는 이해에 가려고 하는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주장이 귀 기중하듯이 상대의 주장도 기중하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공동체는 강한 사람이 약한 자를 잘 품어 주는 것입니다. 성숙은 관영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신앙이 자랄수록 날카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넓어져야 돼요. 왠지 깐깐하고 고집스러워진다면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옳게 사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옳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옳고 바르게 살 뿐만 아니라 품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8:30]오늘 우리는 기독교가 무례한 기독교 이런 용어를 써요. 우리는 착하고 의롭고 다른 사람은 다 나쁜 놈처럼 여겨요. 굉장히 의인 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시켜 버리는 이런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더 품는, 이해하는, 용납하는, 서로를 존중하는 삶으로 가야 돼요. 흔히 회자되는 말 가운데 하나 있어요. 이 면이 며느리 될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대상이 누구냐? 시어머니 형이 어떤 형이냐? 강남에 사는 기독교 신자인 독자를 둔 어머니. 이 풍자하고 있는 얘기예요. 풍자하고 있는 거. 난 다른 건 모르겠는데 여기 왜 기독교 신자가 들어갔느냐는 거예요. 자칫하면 우리는 굉장히 까다로워지는 매몰찬, 깎아지는 조금도 빈틈이 없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상대를 힘들게 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가 있다는 거.

[29:45]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식 실수를 하고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연약함이 성숙으로 바뀌는 그 날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 받아주고 품어주는 먼저 된 신자들의 역할이 필요한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먼저 믿어온 신자들을 보고 저 사람 때문에 교회 다니기 싫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돼요. 오늘 우리의 행위가 먼저 믿어온 사람들의 행위가 거침돌이 되면 안 돼요. 많은 사람들이 저 인간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심지어는 더 확대하면 교회 때문에 예수를 믿고 싶지 않다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어요. 우리 교회의 모습이 예수의 모습을 가릴 수도 있다는 거죠. 오늘 우리 삶을 통하여 연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을 것인가? 아마 가정에서도 사춘기 아이들을 기르는 부모의 역할이 아마 그런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사춘기 아이들이 얼마나 몸살이 심한지 모릅니다. 근데 사춘기 때 그 아이들이 힘들게 하는 그 이유가 뭐냐? 자기도 알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이 나오는 거예요. 내 마음 나도 몰라. 사람도 아닌 것이 짐승도 아닌 것이. 이상한 행동이 나오는 것은 그 사춘기 시절에 있는 그 안에 있는 호르몬, 호르몬. 호르몬이 그렇게 만들어요. 그때 사춘기 부모의 부름이 뭐냐? 기다려 주고 품어 주는 거. 부모 역시 오늘의 부모 역시 지난날 어린 시절 품어 준, 기다려 준, 넉넉한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 있는 거죠. 나쁜 짓 할 때마다 다리 몽둥이를 부러 부러뜨려 놓았다면 여기 지금 제대로 그러다닐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어요? 여러분 신앙생활은 내가 얼마나 잘났는가를 드러내는 드러내는 싸움이 아니고 약한 사람들을 얼마나 품는 자인가로 신앙을 증명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연약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내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품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는 비교적 평안한 교회, 성숙한 교회가 되려고 하면 비교적 교회에 오래된 신자들의 말수를 줄이는 거. 그리고 헌신을 많이 하고 열심을 낼수록 겸손해지는 사람들. 헌금 많이 하고 자기 소리를 낮추는 사람들이 많은 곳, 그곳이 좋은 교회가 되는 거죠.

[32:33]교회는 정말 다양합니다. 너무 다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가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많아요. 오늘날 실제적으로 그런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잘난 사람들만 모인 곳이 아니에요. 약한 자와 강한 자가 공존합니다. 그 누구도 내쳐서는 안 되죠. 약한 자는 믿음이 강한 자를 통하여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 되고. 그리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서로 어떻게 함께 공존할 것인가? 그리고 서로 존중하며 비판하지 않고 누구도 무시하지 않고 함께 품으며 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이 훈련. 이것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이 4절에서는 이 바울이 이런 얘기를 해요.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여러분 남의 하인이 누구예요? 오늘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연약한 사람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 그 주님의 종들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음에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그가 넘어지고 서 있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손 손 안에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가 넘어지고 서는 그 가정 속에 그 주님이 언젠가 그를 세우실 것이다. 네가 관심 갖지 마라. 너는 네가 할 일만 잘해라. 그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할 일은 이제 이해하고 누구든 존중히 여기고 서로에 대해서 배려하는 이 훈련을 계속해 나갈 때 복잡하고 까다로운 여러 가지 이슈가 있지만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또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공동체로 세워져서 누구든지 교회로 나올 때 그들을 품고 그들을 녹이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멋진 공동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안에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관계 안에서도. 어떤 분들이 심히 이 부분에 은혜를 받은 부분 있는 거 같은데 박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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