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mbnail for | 다시보는 BEST 설교 | 부활신앙은 확실히 다르다 | 수영로교회_이규현목사 | 사도행전 4:32~35 | by CTS BEST 설교

| 다시보는 BEST 설교 | 부활신앙은 확실히 다르다 | 수영로교회_이규현목사 | 사도행전 4:32~35 |

CTS BEST 설교

23m 49s2,398 words~12 min read
Auto-Generated

[0:05]자 우리 삶에 가장 큰 주제 중에 하나 또 그대 담론이라고 그럴까요? 그게 있다면 죽음의 문제일 겁니다. 죽음의 문제. 우리가 좀 피하고 싶지만 평소에는 그것을 덮어두고 싶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을 가장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최대의 화두 인생의 주제. 내가 바로 죽음의 문제.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다 해체해 버리는 겁니다. 죽음이 찾아오면 모든 게 제로 포인트예요. 내가 싸웠던 모든 학식들, 경험들, 지위들, 어떤 권한들, 재산, 가족들, 모든 관계들, 모든 게 한순간에 끝이 나는 게 죽음이에요. 이 세상에 죽음의 권세보다 더 큰 권세는 없어요, 사실. 모든 영혼 혹을 또 그 앞에는 무릎을 꿇었어요. 저항하려고 인류의 역사들이 죽음에 저항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아무도 노바디 아무도 그 죽음의 저항해서 이길 수가 없었어요. 돈 있는 사람이나 권력 있는 사람이나 예외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류가 이것을 걷어낼 수 있는 힘이 스스로에게는 없어요. 죽음 앞에는 예외가 없어요. 어린 아이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예측 불허입니다. 여기 젊었다고 오래 산다. 말할 수도 없어요.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적용돼요. 저녁에 내가 잠을 잘 때 눈을 감는 건 내가 하는 일이에요. 아침에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안 뜨면 안 되는 겁니다. 끝난 겁니다. 게임 끝. 요즘 도련사 참 많죠? 아이들도 그렇고. 여러분, 죽음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부인해서 그렇지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의 생명과 죽음이 같이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한순간에 끝이 나면 죽음이 오는 거예요. 인류의 최초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러고 내가 죽는다라고 하는 의미 말은 내가 죽음에서 제외되지 않았다는 말이 의미 속에는 뭐가 있느냐면 내가 아담의 후예라고 하는 사실을 잘 알려 주는 거예요. 아담과 나와 창세의 아담이 나와 상관이 없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찾아온 죽음이 나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담과 나은 연관이 있는 거예요. 아담이 지었던 그 원죄가 오늘도 그대로 나에게 적용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죽음의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매일 마주치는 현실, 그 죽음이 우리의 삶에 매일 마주치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문제라면 부활의 문제 역시 우리의 오늘의 삶의 얘기예요.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의 문제라면 오늘 이 부활의 얘기는 먼 이야기가 아니고 관념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 매일 부딪히는 주제라는 거예요. 1년에 한 번씩 부활절 할 때 부활 뭐 기념하는 정도로 끝나는 게 부활이 아니고 매 순간 우리는 부활을 붙잡지 않으면 이미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내 인생은 끝난 인생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매 주일 주일 날 나와서 부활을 노래하는 거예요. 이 부활이야말로 오늘을 나를 살게 만드는 힘이요 내 삶의 존재 이유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절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중요해요. 너무너무너무너무 이거를 한 1분은 해야 되는데 너무너무너무 중요해요. 오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대한 증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신앙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명에 대해서 시간을 들을 이유가 없어. 이미 성경 안에 충분한 성경 안에만 해도 본문을 보면 충분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고 우리의 믿음만 가지면 그것은 의심할래야 의심할 리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말씀을 나누고 싶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에게 일어난 축복 현상이 뭔가? 그것을 세 가지만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는 부활이라고 하는 부활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찾아온 그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될 때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면 하나님의 생명 안에 동참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사건이 부활 신앙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에요. 사도 신 사도행전을 보면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1장부터 시작이 돼요. 그 부활의 초대 교회를 세운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신약의 교회 오늘에 교회는 세워질 수가 없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이 교회는 신약의 교회는 부활 공동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터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15장을 부활장이라 그렇게 부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부활에 대한 가장 강조를 많이 한 그런 어 장이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여러분, 집에 가셔서 고린도전서 15장 이렇게 보시면 바울이 가정법을 씁니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다면 이런 가정을 쓰는 거예요. 그런 일은 결단코 일어날 수 없다는 얘기를 강조하기 위해서 가정법을 썼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믿음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여기 나와 계시는 거예요? 나오실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무슨 뭐 믿음이 허것이 없고 부활하지 않으셨는데 지상의 삶으로 끝이 나는데 뭐 부활 뭐 없는데 내 마음대로 살다가 가자 뭐 적당하게. 주일 날 교통도 복잡한데 헌금까지 들고 와 가지고 별로 잘생기지도 않은 목사 설교를 들으면서 뜯은 거리고 있는 설교를 들으면서 뭐 선한 게 있겠어요, 여러분. 믿음이 헛거라는 거예요, 부활이 없으면. 두 번째는 뭐냐면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없으리라는 거예요. 뭘 전파해요? 전파할 게 하나도 없어요. 세 번째, 우리는 심각한 거짓 증언자가 되는 거예요,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인류 최대 사기극이에요. 사기지, 사기. 보통 사기가 아니죠.

[8:08]어마어마한 역사, 2천 년 동안 사기를 쳤으니 보통 사기가 아니죠. 바울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부활을 이야기할 때 여러분 선행되는 게 뭡니까? 우리의 삶이 지상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지금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인생으로 우리의 삶이 끝나 버린다면 말할 게 없잖아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죽음이 끝이라면 복잡한 게 하나도 없어.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진짜 시작은 리얼리티는 죽음 이후에 오는 거예요. 마치 엄마의 배속에 10개월 있으면 그 10개월 있는 동안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나와 보니까 10개월과 비교되지 않는 수십 년의 생애가 펼쳐지고 배 안에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있었잖아요. 열려잖아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살았지만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고 정말 이 세상은 일부에 불과하고 진짜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이 부활 신앙에서 오는 거거든. 그래서 CS 루이스는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에 불과한 거라는 거예요. 땅 그림자는 그런 표현을 썼어요.

[9:29]이 땅이 우리가 사는 게 그림자.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정말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되는 거예요.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에요. 우리 삶은 지금의 삶은 일부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 모두도 그 부활에 동참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는 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시작되느냐면 뉴라이프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안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 생명이 무슨 생명인가 하면 부활의 생명이라는 거. 그 부활의 생명이란 뭐냐 영원한 생명인데 이 영원한 생명이란 시간적 개념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영원으로 가면 그건 시간이 아닙니다. 삶의 퀄리티 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 진정한 삶, 그것이 이터니티 영원하게 펼쳐지는 그래서 그 생명은 어디로부터 근가 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근가 한다. 참 생명의 권원이신 하나님의 생명 안에 내가 접속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뭐냐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여기 생명이라는 단어를 써요, 생명이라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복음의 한 가운데서 기독교가 말해 주려고 하는 핵심적 주제를 하나 딱 붙잡으라 하면 생명이라는 단어예요.

[11:22]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뭐냐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왔다는 거예요. 왜 이 생명을 얘기합니까? 창세기에서 인간의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기 이전에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생명을 불어 넣으시고 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생명이 있는 존재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생명이 저주를 받게 된 거예요.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잃어 버리고 사망의 권세에 지배를 받는 일이 일어난 거예요. 그것이 저주예요. 그게 죽음이에요. 근데 이것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오심으로 죽음의 저주에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본래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시고 싶었던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 안에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작업이 부활 사건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 하고 하게 하고 그다음에 무슨 말이에요? 더 풍성히 얻게 하는 것이라. 여기서 더 풍성히라는 말은 뭐 돈을 더 많이 벌고 내 삶에 뭐 잘 먹고 잘 사는 얘기가 아니라 내 삶의 생명 자체가 풍성해진다는 얘기예요. 여러분 다 같은 생명이라도 생명이 다르지 않아요. 예를 들면 지금 연세가 굉장히 많으셔 가지고 거의 기진한 진이 다 빠져버린 노인분은 이제 이게 생명이라도 그냥 그냥 숨만 이렇게 쉬고 있는 생명이잖아요. 근데 이제 막 자라는 아이들 보면 매일매일 달라요. 그냥 그냥 뽀송뽀송 뽀송하고 아침에 일어나도 하고 뭐 상처가 덧나도 금방 나와 버리고 자고 일어나면 막 그냥 또 확 애가 꽃처럼 그 생명이 다르잖아요. 근데 그 육체적인 생명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으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올 때 풍성히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그 생명에 꽉 참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날 때 더 이상 저주와 세상에 그 모든 어두움의 세력에 짓눌려서 있는 그런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것과 다른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일어나서 우리가 날마다 부활의 영이 임해서 우리가 활기차게 소망 있게 넘치는 그런 에너지가 우리 안에 생명이 충만함을 느낀다는 말이야. 그 주일 날 와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가 그걸 느끼는 생명의 충만함을 느끼는 거예요. 세상에 나가면 죽음의 영 이런 자살의 영 살인의 영 온갖 사고들 그런 것들이 우리를 지배할 때가 있어요. 근데 주일 날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참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활의 영으로 다시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날 때 그게 풍성한 역사들이 우리 안에 일어나는 거 여러분 살아 있다는 것과 죽어 있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안에서 충만한 생명 가운데 우리가 있는 거예요.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거예요. 더 이상 죽음을 우리는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출입구예요, 출입구. 관문에 불과한 거예요.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영화로운 몸으로 변하 되는 그 날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그래서 여러분 부활의 복음을 붙잡으면 언제든지 죽음을 이겨낸 사람은 목이 못 이겨낼 시련이 없어요, 여러분. 가장 어려운 시련이 죽음 아닙니까? 죽음을 이겨낸 다음에는 내 삶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아멘. 아멘. 죽음을 이기면 끝난 거예요, 여러분. 두 번째는 부활의 신앙은 남을 살리는 신앙이에요. 부활의 신앙은 개인 신앙으로 머물러 있지 않아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한 가지 주제에 꽂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로다. 이 일이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

[15:52]사도행전을 들여다 보면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메시지는 너무더 선명하고 너무더 분명하고 너무더 확실해요. 딱 하나예요. 그분은 살아나셨다는 겁니다. 모든 인류의 저주를 한꺼번에 말갛게 제거하시고 온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영생의 복음을 증거하신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다시 살아나셨다. he is alive. 그는 살아나셨다. 그는 지금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애매모호하지 않아요. 사도행전은 한마디 한마디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이 일에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그런 터져 나오는 복음의 메시지가 있었어요. 여러분, 이것보다 더 위대한 소문이 없어요. 굿 뉴스에요. 여러분, 우리가 다시 산다, 영원히 산다. 이거보다 더 큰 굿 뉴스가 있겠습니까? 무엇이 이 세상에 굿 뉴스겠습니까? 굿 뉴스는 가장 위대한 굿 뉴스는 부활의 소식이에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니까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구원 얻은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뭐냐? 이제 우리를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사는 겁니다. 그게 뭘까요, 여러분? 부활 예수에게 전하는 겁니다. 내 혼자서 그냥 예수를 믿고 부활의 생명을 가진 채로 조용히 죽는 것은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건 이기적인 소멸이에요. 이 부활의 생명을 끊임없이 퍼뜨리는 역사. 이 부활의 생명이 수 없는 사랑의 전이 되도록 하는 일들. 그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은 거예요. 세 번째는 부활 신앙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내었어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32절에도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기이한 일입니다, 이거는. 34절에도 마찬가지고 그들 안에 희한한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 시작이 됐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부활의 신앙의 불이 붙었습니다. 120명의 시작된 공동체 안에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부활의 복음은 현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면 현실을 보는 시각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 변화가 뭡니까?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요. 오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새로운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결국은 가치의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거예요. 언제든지 이 세상은 끝이 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이 세상에서 승부를 걸려고 하지 않아요. 무슨 손해를 좀 본 일이 있어도 그냥 손해를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는 겁니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 때문에 오늘 삶의 현실이 일어나는 것으로 모든 것들을 판단하지 않는 보류하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 이민을 꼭 간다 생각을 해 보세요. 이민을 꼭 갈 사람이 뭐 이렇게 뭐 가져가지도 않을 것들 뭐 작게 놓 뭐 이런 거 뭐 기수 좀 났다고 막 전도 못 하고 그럴 이유가 없어요. 뭐 그거 좀 깨지든지 기수가 나든지 뭐 소용이 있어 곧 나두고 갈 건데 꼭 가니까. 여러분, 초대 교회 구체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바로 그겁니다. 이기심이 해체된 거예요. 여러분, 죄의 가장 뚜렷한 속성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이기심이에요, 이기심. 왜 우리가 불행한가 하면 이기심 때문에 그렇거든요. 부부 관계도 결국은 다투고 막 갈등 일어나는 게 다 죄 때문에 이기심, 이기심. 그 죄의 속성이 이기심으로 나타나. 지금이라도 이기심만 사라지면요, 천국이 와요, 천국이. 영어 영어도 보면 sin 죄가 sin이잖아요. 그 어떤 사람 그러고 그 한 가운데 뭐가 있어요? i가 있잖아, i. 그 죄라는 게 뭐냐 하면 모든 삶의 중심에 자기가 있는 거예요, 자기가. i. 이기심이에요, 자기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뭉켜지는 그게 그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거. 근데 사도행전의 부활의 신앙이 그들에게 임하니까 어떻게 해요? 이기심이 해체돼 버렸어요. 아무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일이라는 거예요. 왜요? 종말론적인 관점에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고 언젠가 이 세상의 모든 것 사라지고 말 것이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보다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현실에 내가 욕심을 갖지 않고 내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내려놓는 이기심이 해체되니까 자기의 재물을 팔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서로에게 빚을 갚아 줄 이가 없고 유무 상통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오늘 우리 일상에서 경험하는 실제입니다. 천 년만 전 살 것 처음 집착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끝이 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나라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성부처는 이 땅이 아니에요. 여기에 말뚝을 받고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살 사는 사람은 반드시 후회하게 돼 있어요. 여러분, 이 땅에서 모든 것을 평가받고 이 땅에서 모든을 성불 내겠다고 그러면 신앙생활을 못 합니다. 아, 이 세상 사람들과 맞받아치고 악을 쓰고 기를 쓰고 이겨야죠. 지면 안 되죠. 이 땅의 전부라면 죽을 때까지 막 그냥 빡빡 기든지 생명을 걸고 그냥 결투를 벌려야죠.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성불을 걸 사람이 아니에요. 부활의 신앙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참된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이 우리가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그 충만함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의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는 능력으로 부활 신앙이 찾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부족한 것들이 있고 모순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있고 억울한 일들도 있고 별별 안타깝고 아쉬운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다 잠재우고 우리의 부족하고 아쉬웠던 것들까지 다 회복시켜 주시면 완전케 하시는 생명의 충만함이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부활의 신앙의 바깥에 있을 때 죽음은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을 다 아사 가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부활의 생명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은 우리에게 잃어버렸던 것들까지 다 회복시켜 주시면 완전케 하시는 생명의 충만함이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부활의 신앙만 붙잡는다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니 이미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신다면 승리하신 백성들이요 하나님의 영생의 삶이 시작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들로 인하여 짓눌리지 않고 인류의 최대의 저주인 죽음을 걷어낸 생명의 충만함 속에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주의 백성으로서 매일매일 일상에서 여러분들이 승리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Need another transcript?

Paste any YouTube URL to get a clean transcript in seconds.

Get a Tran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