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왜 충돌이 일어납니까? 다르기 때문이죠. 다르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고 해석이 다르고. 어, 젊은 남녀가 그렇게 사랑하고 뭐 죽기 살기로 사랑했던 그 젊은 남녀가 결혼하고 얼마 안 돼서 힘들어하는 거죠. 어, 살아온 삶의 그 배경들 25년 30년 동안 전혀 다른 문화 또 집안에 살아왔던 그 배경들이 있잖아요. 성격의 차이도 있고 또 성의 차이도 있잖아요. 남자, 여자의 차이. 이거 큰 것이죠. 이런 삶의 습관도 다르고 어 그러니까 위기가 옵니다. 요즘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헤어지는 가정들도 많아졌습니다. 특별히 옛날에는 이 뭐 자녀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한 명, 두 명만 그 키우는 환경 속에 자라나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보면 음 본인의 개성이 충분히 존중되는 환경 속에 살았기 때문에 자기의 주장을 십살이 굽히기 싫어하는 이런 남녀들이 모여서 살면 이제 갈등이 일어날 게 되죠. 자 그런데 우리가 이 갈등과 다툼이 일어날 때 비본질적인 문제로 많이 다투게 됩니다. 뭐 정말 뭐 전쟁도 그렇고요, 우리 가정의 전쟁도 본질적인 문제로 그렇게 싸울 일들이 많지 않아요. 이 부부의 싸움도 여러분들 뭐 이렇게 이라크 전쟁 때문에 부부 그 이라크 전쟁을 논하다가 부부 싸움 하는 일들이 별로 없죠. 뭐 국이 식었네, 짜네 그러다가 한 판 하는 거 아니에요. 결혼을 준비하는 가정들도 보니까 이 혼수 문제로 깨지는 경우가 요즘 많더라고요. 사실 본질은 아니죠. 혼수는 하나의 부수적인 문제인데 결혼의 핵심은 본질은 사랑이겠죠. 근데 사랑을 본질은 상관하지 않고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다투다가 결국은 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 오늘 예수님과 그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부딪힘이 지금 이제 계속 이제 일어나는 장면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당시 유대주의 또 조금 좁혀 말하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그 당시의 종교적인 체제, 종교적인 지도자들과 예수님이 이제 충돌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 그래서 오늘 이번 주와 다음 주까지 이 본문을 가지고 2주에 걸쳐서 살펴보는데 굉장히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 오늘 여기에 싸움의 출발은 금식 문제입니다. 금식 하는 문제. 파스팅이죠. 18절을 보면 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 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이지만 사실은 십이에요. 십이를 거는 겁니다. 의도적이죠. 그 예수님은 이미 이제 예수님의 활동이 공개화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러면서 적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어떤 공격의 빌미를 찾고 있던 때에 지금 이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예수의 제자들이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에 대한 공격이지만 예수에 대한 공격이죠. 당신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제자들이 저 모양입니까? 이제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어 당신은 늘 보니까 먹는 거 좋아하고 그러더니 제자들도 금식하지도 않고 그러네요. 이제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당신의 스승의 당신이 스승의 자격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입니다. 우리들은 금식하는데 너희들은 왜 안 하냐? 왜 안 하냐? 이 전형적인 십이에요. 여러분 시비를 잘 거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성실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관습할 겨를이 별로 없어요. 여러분 다른 사람들에게 약점을 찾아내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잘 몰라요. 금식하는 건 좋습니다. 그 열심히 그렇죠 종교적 열심을 다하는 것은 필요하죠. 근데 문제는 뭡니까? 이것이 자기의 의가 되어 있다는 거. 자기 의. 종교적 우월 의식. 이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통해서 특권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 특권 의식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게 뭘까요? 그러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판단입니다. 정죄하는 것이죠. 자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언제나 변질되는 게 문제입니다. 본래 금식은 1년에 한 번 있는 대속죄일에 했습니다. 1년에 딱 한 번. 근데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바리새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하는 거죠. 탁월한 종교적 열심입니다. 이 자체는 나쁠 게 없어요. 근데 문제는 자신들이 열심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게 문제. 어 유명한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입니다. 어 유명한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입니다.
[5:40]그가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하는데 어떤 제자 하나가 좀 잘난 척하기 위해서 한 것 같아. 금식도 좀 멋있게 하려고. 죽을 한 그릇 딱 앞에 두고 금식을 하는 거예요. 죽 냄새가 살살 올라오는데도 음 나는 이 죽 앞에서도 난 시험들지 않고 나는 금식한다. 좀 잘 참아낸다. 이제 이런 걸 좀 보여주고 싶은. 금식도 좀 더 유별나게 하는 좀 우울감을 느끼는 거. 근데 어느 날 함께 금식을 하는 제자가 그 죽을 그냥 먹어 버렸어요. 여러분 그럴 때 분위기 어떻겠습니까? 전부 다 눈이 옆으로 확 노려보면서 인간도 아니라는 트로 모든 제자가 그 죽을 먹은 사람을 향하여 쭉 째려보는 것입니다. 이때 스승인 프란시스가 한 일이 뭐냐면 그 금식하다가 죽 먹은 그 친구를 제자를 책망한 게 아니고 프란시스가 같이 죽을 먹은 거예요. 스승이 죽을 먹으니까 금식을 다 하다가 스승까지 죽을 먹으니까 이 비난을 하던 아주 눈총을 보내던 이 제자들이 갑자기 머쓱해진 거죠. 프란시스가 왜 이 금식을 하던 가운데 죽을 먹은 제자를 책망하지 않고 함께 죽을 먹었을까요? 많은 그런 메시지를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식을 왜 하느냐는 거죠. 금식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다보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약점에 더 눈이 밝아진다면 도대체 그 금식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금식을 함으로 좀 더 너그러워지고 사람이 금식을 함으로 더 포용력이 생기고 금식을 함으로 오히려 자기의 그 죄를 발견하고 자기 안에 연약함을 더 깊이 통찰하고 회개해야 그게 맞는데 실수한 형제에 대해서 굉장히 비난의 화살을 보내고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 금식 잘못한 거라는 거예요. 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이 금식으로 인해 일어난 이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이 지금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는 이 부분에는 금식으로 인한 우월 의식이 있는 거.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바리새인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항상 염두에 둬야 되는 것은 그 일을 하는 동기입니다. 동기.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잘못된 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어요. 여러분 그리스도인 신자의 동기는 언제나 십자가입니다. 항상 우리는 그곳에 십자가의 정진이던가.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 선한 일을 통하여 십자가로 가까이 가야 돼요.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죽는 것이고 묻히는 것이고 사라지는 거. 자기의 선행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 자기의 공로를 드러내고 자기의 의가 강조되면 십자가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희생하는 것까지는 잘 해요. 근데 그 다음이 문제. 내가 수고한 자리에 십자가가 남아 있어야. 가장 안전한 삶인 줄로 믿습니다. 이 십자가가 나와야 돼. 우리 교회도 보니까 45년의 역사 가운데 아름다운 헌신을 하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이런 금물도 그렇지만 뭐 모든 것. 오늘의 역사까지 많은 성도들이 눈물, 땀, 헌신, 희생, 헌금 어마어마한 거예요. 예 어마어마한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이렇게 은혜롭게 온 것은 그 수고 헌신을 알아 달라고 소리치지 않고 조용히 묻혀지는 거. 예 여기도 그런 분들이 앉아 계세요. 정말 헌금 많이 하고 헌신을 많이 한 사람들이 조용한 교회. 그러면 건강한 교회인 것이죠. 왜냐하면 그게 십자가 있기 때문에. 금식이라는 고난도의 종교적 수행을 했다면 사람이 달라져야 정상이에요. 이전보다 더 더 부드러워져야. 더 품이 있는, 더 아름다운. 그런데 금식할수록 더 날카로워지고 공격적이라면 금식을 안 하는 게 나. 금식을 안 하는 게 나. 새벽기도 철야기도 열심히 한 사람이 안 하는 사람들을 정죄한다면 차라리 안 하는 게 훨씬 낫다.
[11:06]그렇다고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아이 난 철야기도 안 해. 새벽기도 안 해. 그 얘기가 아니죠, 여러분. 여러분 신앙생활이 잘못 세팅돼 있으면 열심히 할수록 그 열심히 자기 의와 자랑과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이 본문에서 가르쳐주고 있. 이 본문에서 가르쳐주고 있. 여러분 이전에 한국교회 안에서도 40을 금식하신 분들이 참 많았어요. 목사님들 가운데도 많았습니다. 여러분 40일 금식 이 단식인데요 물만 마시는 겁니다. 완전히 물도 안 마시는 금식도 있긴 한데 그거는 오래 하면 죽죠. 근데 40일도 마찬가지 단식도 40일 금식은 어렵습니다. 하다가 정신적인 쇼크가 온 분들도 계시고요. 그리고 어떤 분은 죽기도 했습니다. 40일 금식 어려워요. 근데 더 어려운 게 있습니다 여러분. 40일 금식한 것보다 더 어려운 게 있어요. 금식하고 난 다음 밀려오는 교만입니다. 교만. 나 40일 금식한 사람이야. 말은 안 해요. 말은 안 해요. 근데 어떤 분은 또 그 명함도 갖고 다니는 분 계세요. 40일 금식 3회. 명함에 그거 쓰고 다니는 분들도 계시긴 해요. 그런 분 말고. 그런 분은 대놓고 하니까 오히려 귀여워요. 40일 금식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봐라 그래. 여러분 엄청나게 밀고 오는 이 교만요. 무서운 거야. 그러면 이미 40일 금식은 아무 의미가 없어져요. 여러분 음식을 거부하고 정욕을 억제는 했는데 금식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교만은 꺾지 못할 때가 많아요. 주님에게도 40일 금식 이후에 마귀가 달려듭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센세이션을 일으키라. 만약 마귀의 얘기를 다 들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교만해지는 순간이죠. 40일이 아니라 100일을 해도 교만이 찾아오면 끝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오히려 십자가의 반대길로 가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열심을 내야 돼요. 그렇죠? 근데 이 열심을 잘못 내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극대화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극대화되어야 되는데 자기의 행위가 극대화되면 사람이 사나워져요. 거칠어져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일을 합니다. 신앙적 노력은 언제나 해야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그 행위를 통한 결과, 열매입니다. 금식을 할수록 형제에 대한 용납으로 나타나야. 프란시스의 얘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금식을 했는데 교만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우습게 본다면 꽝이라는 거 꽝.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거 아무 일도. 육체의 일이라는 거 육체의 금식이라고 하는 가장 거룩한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육체의 일이 되고 만다. 성도 여러분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가 아니라 내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얼마나 드러나느냐는.
[14:59]자 오늘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미 예수님 시대에 이 금식이나 신앙적 행위가 종교적 노력들이 변질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 주. 그 산상수훈에서 마태복음 6장 16절로 1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5:58]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보다 왜 하느냐를 물어봐야. 모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든 행위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금식했지만 실상은 심각한 위선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금식을 통하여 자기를 과시하는 종교적 우월 의식이 더 깊어졌습니다. 여러분 이 금식 굵기를 끊는 거 어 이거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 먹의 힘이 나잖아요. 근데 안 먹는다는 거 상당한 종교적 수행. 사실 여러분 금식의 유익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정욕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몰라요. 요즘과 같이 막 흘러 넘치고 막 넘쳐 흐르고 막 사람들은 다 포만감에 빠져. TV만 틀면 먹는 프로가 얼마나 많은지. 이게 해외에도 다 알려주더라고요. 해외 외국 사람들도 먹방이라고. 한국 먹방이라고. 자 여러분 우리는 먹는 것을 이 몸이 원하는 것을 거부하기 참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저녁밥 다 먹고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먹기로 굳게 결단하고 양치질까지 다 끝냈는데 어느 순간 보면 몽유병 환자처럼 나도 모르게 먹고 있는 거예요. 식탐은 음 음식 만의 문제가 아니고 영혼의 문제. 자세히 보세요 여러분 먹는 문제만이 아니 육체의 먹는 문제만이 아니고 그 문제가 영혼과 연결돼 있어요. 내가 늘 욕망하고 원하는 것을 채워야 하는 구조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적당하게 제동을 걸어야 되고 욕구를 억제하고 우리의 영적인 관심을 돌리는 이 노력을 해야 되는 거. 이거. 이거 이거 이거. 그래서 우리는 적당하게 제동을 걸어야 되고 욕구를 억제하고 우리의 영적인 관심을 돌리는 이 노력을 해야 되는 거죠. 그렇다면 당연히 금식을 통해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해야 돼요. 근데 자기 부인을 하지 않고 자기를 강화하고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를 극대화하고 자기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이 금식을 사용했다는 거. 그래서 자의 죽음이 아닌 자를 더 강화하는 도구로 금식을 사용하고 있. 자, 이 금식을 하지 않은 것으로 인한 시비를 거는 그들에게 우리 주님이 하신 답이 이것입니다. 19절로 20절의 말씀이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우선 주님이 금식 자체를 반대하지 않으셨다는 거. 주님도 금식을 하셨잖아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금식하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주님은 시기를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거.
[19:37]지금이 무슨 때냐? 여러분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요 때에 맞아야 그게 좋은 말이에요. 잔칫집에서도 때에 맞게 행동을 해야 되는 거야. 잔칫집에 가는데 상복 입고 가가지고 잔칫집 구석에서 다 어두운 얼굴로. 누가 뭐 주면 안 먹습니다. 분위기 다 깨는 거잖아요. 여러분 사실 그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율법의 강요로 백성들은 기쁨이 없었어요. 장례식 같았습니다. 웃음기가 전혀 없는 아주 경직된 그 종교적 분위기. 이제 그리스도가 오셨어요. 새 시대가 열렸다는 거죠. 그것을 가장 잘 알려주는 사건이 요한복음 2장에 가나의 혼인 잔칫집의 이야기입니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인데요. 이 잔칫집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2장 3절이죠.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여러분 포도주가 잔칫집에 떨어졌다는 말은 이 포도주 자체가 기쁨을 상징합니다. 근데 잔칫집이 뭐예요?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 근데 포도주가 없다는 거예요. 떨어졌다는 거예요. 이것은 당신의 종교적 상황을 잘 묘사하는 겁니다. 의무만 있고 규정을 딱딱하게 지켜내는 과주한 조항들을 지키는라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그 당시의 상황이에요. 기쁨이 바닥이 나버리는 거. 그래서 2장 6절에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이 정결 예식 유대인 유대교의 핵심 가운데 하나예요. 정결 예식을 행하는 거. 이 돌 항아리 여섯. 이게 유대교를 상징하는 모습이에요. 근데 아무런 거기에 기쁨을 줄 수가 없어요. 포도주는 다 떨어졌는데 예수님이 그 물 항아리 돌 항아리에 있는 물을 포도주되게 하신. 잔칫집을 다시 기쁨으로 출렁이게 만들었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왔는데 그 특징은 뭐냐면 기쁨의 회복이 일어나는 거.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 도래했어. 답답하고 어두웠던 시대를 걷어내고 신랑 되신 그리스도가 오실 때 모든 영역에 회복이 일어나고 밝아지고 활개가 생기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 어둠이 싹 사라져 버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참으로 모시면 분위기가 바뀌어요. 밝아져요 밝아져요. 여러분 신자의 진짜 신앙의 특징이 뭐냐면 밝아요. 밝아야 돼요. 요즘 우리가 이 마스크를 쓰고 오니까 아하 이게 참 밝지는 않아요. 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까. 얼굴을 우리가 표현을 못 하니까 그렇죠. 표현을 눈으로만 하니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밝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찬양이 넘치고 신약의 교회는 사도행전 2장에도 마찬가지요. 굉장히 기쁨이 넘치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내면에 깊이 찾아오면 우리의 절망의 모든 상황을 다 걷어내고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하게 하는.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가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랬어요. 여러분 당신의 유대교의 모습은 어두웠어요. 어두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면 종교적 열심으로 경쟁적 수행. 비교. 그리고 판단 정죄. 그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짓눌러서 백성들이 힘겹게 억지로 할 수 없이 율법의 조항들을 지켜내려고 하는.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로. 더 이상 비교할 이유가 없어요. 나는 나대로 내 있는 그대로 주님은 받아주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될 어떤 일도 남아 있지 않는 죄인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받아주신. 그래서 혼인집에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하면 되느냐. 지금 주님이 그 답변을 하신 것입니다. 근데 당신의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할 때 어두운 얼굴을 하고 근한 얼굴을 하고 그게 거룩이라고 생각하는 거. 금식할 때 온몸에 표를 내고 있었어요. 알아 달라는 거예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죄성이요 얼마나 쉽게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지 몰라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나를 극대화하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 특징이 뭐예요? 나는 다르다라고 하는. 그래서 신앙의 이름으로 열심을 내지만 그 일이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로 변질된 것입니다. 자 오늘 이 본문 속에서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러면 무엇보다도 본질의 문제라는 거. 금식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본질과 비본질의 구분이 이 우리의 분별력에 매우 중요한 요소예요. 무엇이 본질이고 본질이 아닌가를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면 아직 성숙에 이르지 않는 단계예요. 성숙이란 뭐냐? 그걸 분별해 낼 수 있다는.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그 금식이 사실은 자기의 본질처럼 모든 걸 다 걸고 있는 거. 근데 그게 아니라는 거. 사실 여러분 금식이라는 것은 기독교 안에서만 있는 게 아니고 다양한 종교단 안에서도 있는 일이에요. 이슬람의 라마단 유명하잖아요. 힌두교나 불교에서도 딱 금식을 해요.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서신서로 가면 금식은 거의 언급이 없어요. 비본질과 본질이 혼란스러워지면 우리의 삶이 복잡해지는 거. 자 여름에 이 여름 들게 성가대원들이 까운을 입느냐 벗느냐 예를 들면 하나의 예를 든다면. 자 이건 본질일까요? 비본질일까요? 오늘 안 입으셨네요. 예. 이 비본질이죠. 자 비본질이라는 말은 뭘까요? 입을 수도 있고 벗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 선택의 문제예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자 그런데 성가대원들이 그냥 성가 옷을 안 입는 것으로는 안 되니까 은언을 한대요. 논쟁이 벌어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근데 어떤 사람은 입어야 될 이 유에 대해서 막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그분의 얘기가 너무 압도적으로 강해 가지고 전부 다 붕붕붕 해가지고 입기로 했어요. 그러나 여러분 논리로는 내가 밀렸지만 더 그 얘기를 진전해 가지고 싸우게 되는 것보다는 뭐 그분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선택한 것은 평화를 더 원하는 거. 왜 그래서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누가 양보하느냐. 사실은 양보하는 쪽에 훨씬 더 비진리를 기꺼이 양보하는 쪽이 더 성숙하다고 볼 수가 있어요. 그것을 통하여 본질인 것처럼 막 투쟁하고 반드시 입어내리라 뭐 이러고.
[27:46]아니는 사람을 이단으로 취급한다면 그거는 비본질의 생명을 거는 것이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양보해 줘야 돼요. 왜 그분은 그것들을 뭘 걸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금식을 부정하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금식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바리새인들과 같이 금식을 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바리새인들의는 왜 금식을 하고 있는지를 사실 몰랐던 겁니다. 전통을 따라 익숙하게 반복하다 보면 왜 하는지를 몰랐어요. 금식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근데 그들은 절대적인 문제로 붙잡고 거기에 모든 에너지를 다 쏟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금식이라는 행위 자체보다 금식을 하는 목적입니다. 내가 왜 이 금식을 하고 있는가. 저도 금식을 뭐 옛날에 해 여러번 이 할 때마다 경험했던 게 뭐냐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금식을 위한 금식을 할 때는 너무 힘들어요.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어요. 이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면 괜찮은데 그러지 않을 때는 그냥 기계적 수행을 하는 거죠. 내가 금식을 한번 해 보았다라고 하는. 이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근데 과했던 거죠, 여러분.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뭐냐면 얼마나 열심이었으면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하는 거.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것까지도 새측을 만들어서 복잡하게 섬기여다 보니 결국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도 이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고 비본질이 아니라 본질을 붙잡고 살아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39:50]내 의가 아니요 내 자랑이 아니요 내 공로가 아니요 내 이름이 아니요 나의 어떤 것들을 싸움하면 그건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은 금식이며 기도며 구제며 많은 것들을 사람에게 드러내며 자기를 과시하는 이 종교적 활동에 지쳐 백성들을 얽어매고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더 힘들게 하고 압박하고 기쁨을 빼앗아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