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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BEST 설교 | 성령의 세례 | 수영로교회_이규현목사 | 마가복음 1장 6절 ~ 8절

CTS BEST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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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우리는 세례 요한이 마가복음 출발쯤에 이 세례 요한의 역할을 보게 되는데요. 그는 그리스도의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그런 사명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그의 행적들을 보면 눈길을 끄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증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어 모습이 비추어지는데요. 오늘 6절을 보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랬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여기 낙타 털옷은 요즘처럼 잘 이렇게 어 가공된 무스탕이 아닙니다. 또 여기 가족띠를 했다니까 명품 수제 혹시 가족 벨트를 한 건 아닌가? 또 어떤 사람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니까 유기농을 먹었구만 뭐 이런 얘기를 합니다.

[1:02]여기 낙타털 옷이란 요즘과 같이 이런 그런 것들이 아니고 어쩌면 그냥 그 털 옷이죠. 투박한 옷. 또 그가 먹었던 음식들은 광야였기 때문에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메뚜기, 석청 최소한의 영양 공급을 받으며 살았다. 뭐 이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보면 좀 반 문명적이죠. 빈들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현실과는 좀 거리가 먼듯한 듯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모습은 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이해한, 그래서 한 가지에 집중하고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뭐 자기가 이렇게 하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에 몰두하고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자기의 신변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을 쓸 수 없는 그런 환경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세례 요한을 금욕주의자로 볼 수도 있는데요.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금 금욕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금욕적인 요소는 있죠. 그러나 금욕주의는 아닙니다. 금욕주의는 금욕 자체가 목적이 된 사람들이죠. 세례 요한의 삶은 절제되어 있고 또 그의 삶은 검소한 것은 분명합니다. 조금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요한이 그렇게 살려고 예를 썼다기보다 그가 추구한 것에 집중하다 보면 저절로 삶이 단순해진다는 것이죠. 세례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빈들에 있었고 또 자신의 삶을 비교적 단순하게 모든 것을 비워낸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먹는 것 입는 것 무시하라. 이런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적절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 근데 자신이 받은 사명이 너무 중대하면 또 그것에 집중하다 보면 내가 무엇을 먹는가, 마시는가, 입는가 그런 것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나게 되죠. 그런 것들에 쓸 에너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장 많이 에너지를 쓰는가를 보면 그의 인생이 보입니다. 내가 어디에 가장 돈을 많이 쓰는가, 어디에 가장 많이 시간을 사용하는가를 보면 그의 인생이 보이고 미래가 보이겠죠. 그래서 먹는 것 또 입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것에서 영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기본적인 필요만 채워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위해서 그 시대 대중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에서 배울 것들이 참 많이 있는 거 같아요.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이렇게 살 수는 없지만 오늘 우리의 삶이 과도하게 세상에 치우쳐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문화를 잘 지켜보고 또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이 세상에 빼앗겨 버리기가 매우 쉬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문화에 흡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속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을 집어 삼켜버리는 이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세상의 특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소비주의적입니다. 가능한 많이 소유하라고 닥달을 하죠. 창세기 3장에 나온 것처럼 사단이 하와에게 유혹했던 것처럼 보안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들이 사실 오늘 우리의 주변에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에 애착을 가지다 보면 그 애착하는 것들이 자꾸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애착의 강도는 강해지고요. 그 애착은 집착이 되고 집착은 중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 아주 소박한 것으로도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었는데 우리의 욕망에 불이 질러져서 통제할 수 없는 단계까지 가면 아무리 많이 소유를 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세례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우리의 삶의 초점이라는 것입니다. 초점이 흐려지기가 쉽다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놓쳐버리는 겁니다.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내지 않으면 신앙의 길은 신앙의 길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산만해지기 쉬운지 세례 요한은 빈들에서 아주 심플 라이프, 단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빈들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집중력을 가질 수 있는 곳을 말합니다. 복잡하고 요란한 이 세상의 소리로부터 일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면 우리는 도시에 살아도 빈들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산다는 것은 고도의 영적인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요즘과 같이 이 핸드폰, 인터넷, 이 TV를 붙들고 살면 하늘과 교신하기가 어려워요. 핸드폰을 붙잡고 사는 동안에 성경 책을 들 손이 없습니다. 영상 문화에 익숙해지면 성경 난독증 정세를 보이게 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할 여력이 없는 것이죠. 성경을 읽으려고만 하면 머리가 띵하면 이미 영적 상태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의 문화에 포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제된 이 삶은 탐욕과의 싸움에서 가능해집니다. 소비주의 시대는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부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만드는 게 아닙니다. 시간도 엄청나게 쏟아부어야 합니다. 영적인 집중력을 가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름진 음식으로 포만감에 빠져 계속 살면 어떻게 되죠? 육신의 힘은 점점 넘칠지 모르지만 영의 세계는 허리 퇴지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금식을 선택하죠. 다니엘이 바벨론의 왕실이 주는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했다는 것. 그리고 채식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얘기도 아니죠. 다니엘이 이것을 선택한 것은 다니엘 왕이 그 왕이 바벨론의 왕이 주는 그 음식과 이 포도주는 단순한 음식의 문제가 아니고 문화가 바벨론의 문화 안에 있었어요. 그 화려한 그 음식 문화 안에 숨어 있는 그 유혹의 실체를 다니엘이 보았습니다. 한번 세상의 풍요에 길들여지면 더 이상 그 정력을 뿌리칠 의지가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 수신 상태는 떨어지게 되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맑아야 별이 보이듯이 영혼이 맑아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신자는 세상의 다양한 유혹에 저항해야 합니다. 바울에게서 우리는 그것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로 12절을 보면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떤 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러분 이 바울의 이 고백은 딴 게 아니에요.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어떤 것 그것이 궁핍이든 그것이 풍요든 그것은 내 삶의 중요한 주제가 아니에요. 주된 관심이 아니라는 거. 여러분 세상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채움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가졌다고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우리가 압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최상의 환경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는 욕망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욕망을 자제하고 필요를 쫓아야죠. 그러나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모두 다 채워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필요하지만 꼭 필요하지 않는 것들도 오늘날 너무 많습니다. 현대 상업주의는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게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가지게 만듭니다. 오늘 세례 요한의 단순한 삶, 이 절제된 삶, 그것이 광야의 영성입니다. 늘 밀고 들어오는 허영과 탐욕과 싸워야 합니다. 무엇을 할 때마다 내가 꼭 그 일을 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영적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다가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찮은 것에 몰두하다가 귀중한 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할지라도 영원한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내가 왜 존재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 나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또 묻고 물으면 우리의 삶은 저절로 단순해집니다. 큰 그림을 보아야 되죠. 하늘의 음성이 분명해지면 세상의 다른 소리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소리, 이 정욕의 소리에 귀를 먼저 기울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너무 복잡해져 있습니다. 영적 수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음입니다. 세상의 풍요에 치어 영적 풍성함을 놓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문제가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갈수록 우리의 삶이 선명해져야 합니다. 오늘 이 세례 요한은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그의 존재의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이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 외에 다른 것에는 거룩한 무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모든 초점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 외에 어떤 것들이 우리의 삶의 주된 관심이 되지 않도록 힘을 쓰는 우리의 삶의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 세례 요한은 자신을 낮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데요. 오늘 7절을 보면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랬습니다. 자 여러분 세례 요한은 400년의 침묵을 깨고 나타난 선지자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출현을 통하여 충격을 받고 그의 영향력은 한 순간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갑니다.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광야로 몰려듭니다. 그리고 수 없는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의 출현은 당시 유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카메라가 그에게 집중되고 취재진들이 몰려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무대의 조명이 커지고 사람들이 환호가 터지고 박수를 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이 혼미해지죠. 마음이 흔들립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는 것은 매우 짜릿한 일이고 그 순간 사람들은 중심을 잃기가 매우 쉽습니다. 자 그러나 세례 요한은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그런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교만이란 무엇일까요? 교만은 자기의 위치를 벗어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를 어떻게 벗어나죠? 자기가 누구인가를 모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교만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이란 되게 자신이 맡아야 할 배역을 찾지 못한 배우와 같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지를 알지 못한 채 일평생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곤혹을 치르는 사람들을 잘 보십시오. 딴 게 아닙니다.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 앉아 있는 거요. 사고는 거기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높은 자리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앉을 자리에 앉을 줄 아는 것이 겸손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있습니다.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 신발끈은 누가 푸는 것입니까? 그 당시 종들이 풀었습니다. 노예들이 푸는 일이에요. 근데 요한은 무슨 얘기합니까? 그 푸는 것조차도 내가 감당하지 못하겠다. 그 종이 하는 역할마저도 나로서는 너무 과분하다. 세례 요한은 더 이상 자신을 내려 낮출 곳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미 낮아져 있는 사람이 낮아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목이 집중되고 환호를 받는 가운데 자신을 내려놓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 그런데 요한은 이런 얘기를 하죠. 요한복음 3장 30절에 유명한 얘기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참 기가 막힌 고백을 합니다. 그는 늘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여러분 세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면 우리 자신의 위치, 역할이 분명해집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맡은 배역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빛 자체이시고 자신은 빛의 반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빛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는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런 존재들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할 때 우리의 가치는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인가를 사역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자꾸 나를 극대화시키려고 하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의 이름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역할을 맡아도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요. 우리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아멘. 주님을 위해 사역을 하다가 때로는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일을 한 만큼 충분한 보상과 인정을 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 시험 들면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에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들어간 것 때문에 은근히 좋아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근데 감옥 안에 있는 바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이 감옥에 들어온 것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해주면 안 되는데 해준 사람이 있어요.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복음을 전하다가 이 감옥까지 왔는데 내가 감옥에 있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되죠. 그러나 바울이 입장을 정리합니다. 여하간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의 관심은 그가 내가 무시를 당하는 것도 좋고 또 그가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도 상관없고 어떻게 되었든 그의 입술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전파되고만 있다면 나는 상관이 없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이름이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을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특히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는 세계에 빠지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여론과 평판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 않아야 한다는 거.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은근히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위험한 인물이에요. 대중들 앞에 서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잘 보십시오. 누구를 주목하게 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자기에게로 이목을 집중시키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요주의 인물이에요. 대중을 선동하고 멋있는 구호를 외치지만 알고 보면 자신의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길이 없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조회수 경쟁을 해요. 사람들이 이목을 집중시키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유혹으로 가득 찬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역자들은 이런 위험한 문화들과 싸워야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유혹은 늘 있죠. 우리는 그 그런 위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내야 합니다. 특별히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사역을 할 때 그 열심 그 안에 있는 동기를 들여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과연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하고 있는가?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목사에게 집중되는 교회는 아닌가? 우리는 늘 살펴 보아야 합니다. 탁월한 사역자로 일꾼으로 칭송을 받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조심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더 적극적으로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고 선교를 하고 어떤 봉사를 하더라도 모든 초점은 오직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 우리 부서, 우리 사역 그게 강조되면 안 돼. 열심히 하고 난 다음 좋은 결과가 나타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주목을 받을 때 빨리 조명해서 비켜 나와야 돼요. 무대에서 내려와요. 박수 소리를 즐기지 말아야 합니다. 철저히 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헌신을 하고 희생하는 것까지는 다 해요. 거기까지는 다 가는데 그 다음에 실패합니다. 희생을 자랑과 훈장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 문제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헌신하고 희생한 것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사고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수고와 공적을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신을 낮춘다고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예요. 그리스도를 온전히 높일 때 세례 요한 역시 존귀한 자로 쓰여집니다. 그리스도를 높일 때 그의 존재감은 확실해집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높이는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 세례 요한은 세례 요한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맡은 일이 비록 하찮은 일이라도 그 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면 그 일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 실패한다면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찮은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공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실패해도 괜찮아요. 우리의 이름은 묻혀도 괜찮아요. 아니 묻혀야 해요. 우리의 이름이 묻히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의 희생을 통하여 점점 그리스도의 이름이 흥하여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거. 생명 걸 일은 우리의 이름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 여러분들의 삶의 목적이 되고 이유가 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뭐 사업을 하든 직장에서 무슨 생각 활동을 하든 아니면 우리가 어떤 공부를 하든 어떤 어떤 역할과 어떤 사역과 우리 어떤 봉사에도 마지막 남은 그 자리에 오직 한 분의 이름만 남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세례 요한은 자신과 그리스도가 얼마나 다른가를 소개하고 있어요. 오늘 8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우리는 앞에서는 요한의 의한 세례를 살펴보았습니다. 자 오늘은 성령의 세례가 주제요. 이 세례라고 하는 단어가 아주 매우 중요한 단어로 우리에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례는 그냥 단순한 의식으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돼요. 세례 받아라. 여러분 이 세례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는 이 그대한 터닝 포인트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깨닫는 존재론적인 각성이 일어나야 돼요. 마치 이사야의 고백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자신의 죄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영혼을 감싸고 있는 이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이 터닝 포인트가 한번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에요. 다내적 사건이지만 강력한 사건입니다. 여러분 이 세례를 받으므로 구별된 백성이 되는 것이죠. 마치 구약의 할례와 같습니다.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 새로운 인생의 출발. 모든 우리의 삶을 가름하는 기준이 죄를 어떻게 처리했느냐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물 세례는 죄로부터 깨끗하게 함을 받은 사건입니다. 자 세례 요한이 이 회개를 선포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메시아가 나타나 로마로부터 자유해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선포한 것은 전용도한 거예요. 회개하라는 거예요. 그 말의 의미를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로마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해방. 애굽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정치적 해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거요. 죄로부터의 해방이 없다면 다른 것은 다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실 분은 오직 한 번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세례 요한이 지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면 비로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 자 이 말은 무엇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 용서함을 받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한 단계 더 나아가라는 겁니다.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일어난다는 거요. 성령의 세례는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이 부어지는 세례. 요한의 세례는 그 죄를 용서함 받았다라고 하는 어떤 외적인 표징으로 주어졌다면 성령의 세례는 이제는 그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갔던 사람들을 이제는 죄의 포로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우리는 복음서의 제자들을 보면 그들은 물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사도행전 5순절에 임한 성령으로 인하여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죄 문제를 끌어안고 늘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생에서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살아가게 되는 위대한 터닝 포인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가장 많이 낭비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딴 게 낭비가 아니고요.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게 낭비입니다. 죄의 문제를 우리가 극복할 수 없으면 일평생 죄를 짓다가 그 죄를 짓다가 세월 다 버리고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부산물 후유증 그 뒤치닥거리 하다가 인생 볼일 다 가는 거예요. 여러분 죄는 매우 적극적이고요 독성이 매우 강한 바이러스예요. 우리 지금 이 신종 코로나가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질병으로 이 바이러스로 지금 그렇지만 여러분 죄는요 그거보다 비교도 할 수 없 정도로 강력한 것입니다. 파괴적이에요. 그 죄의 힘은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인류를 지옥으로 몰아가는 그 죄의 능력을 꺾지 못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기는 고사하고 죄의 어물을 뒤집어 쓰고 살아간다. 그럼 성령의 세례를 약속하는 이것은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성령의 세례가 실제적으로 일어난 지점으로 사도행전입니다. 복음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는 시점이죠.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으로 선포되고 퍼져나가기 시작할 때 성령의 오순절 사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120 문도에 문도들이 불과 바람처럼 임하신 성령이 임하심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물 세례와 다른 겁니다. 성령의 세례는 제자들의 내면에 부어집니다. 물 세례가 영적 출생을 의미한다면 성령 세례는 예수의 제자로 태어나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는 경험입니다. 물 세례가 죄의 용서를 받아 죄인이 의인이 되는 신분의 변화의 일이라면 성령 세례는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내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역할의 변화예요. 성령의 능력은 죄의 힘보다 훨씬 더 강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의 힘을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죄의 지배를 벗어나면 삶은 강력해져요,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에너지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가속도가 붙고요 삶의 질량이 높아지고요 삶의 방향이 분명해지고 모든 게 선명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죠. 아멘. 여러분 죄는 삶의 에너지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분산시켜 버려요. 쓸데없는 일에 죄는 우리의 에너지를 다 소진시켜 버리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달라지는 거예요. 삼손을 보면 참 안타깝죠. 구약에.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엄청난 재능과 파워. 그러나 여자들 꽁무니 따라다니다가 엉뚱한 곳에 다 에너지를 소모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죄를 짓는 삶이란 초점이 없는 삶이에요. 끌리는 대로 사는 거예요. 그 목표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근데 성령의 세례는 뭐예요? 위로부터 부어지는 능력입니다. 성령은 내적인 확신을 줍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삶은 분명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이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셨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불과 바람은 자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바람이 불이 임하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고 마는 것이죠. 위로부터 임한 성령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성령이 임하시고 난 다음에 완전히 달라진 것 하나가 뭡니까? 그 이전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것 자체도 부인하고 어린아이, 여자아이 앞에서도 겁을 먹은 그래서 예수를 부인해 버렸던 그 베드로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 사건 이후에 사도행전 바로 2장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그 세게 몰아치며 무슨 얘기하죠? 너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얘기합니다. 비로소 예수를 과감하게 증거하고 드러내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세례 사건입니다. 성령이 이미 2000년 전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시고 오늘도 우리 가운데도 임하시고 성령의 그 세례와 성령의 충만을 통하여 우리를 통해서도 이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주어진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랬습니다. 아멘. 오늘 세례 요한은 바로 이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죠. 이 각성을 깨달았던 것이고 그 성령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하여 오늘 신약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성령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부어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그 성령이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목적을 위해서 분명히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자 2000년 전이나 오늘과 비승한 사람 상황입니다. 그때는 초림 예수를 맞이할 준비가 백성들에게 되어 있지 않았어. 준비되지 않은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 세례 요한이 무엇을 외쳤습니까? 회개하라는 겁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뭘까요? 오늘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 성령 안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아멘. 세상을 여러분들 보십시오. 어디를 보아도 답이 없어요. 어디에 소망이 있습니까? 아무리 눈 닦고 봐도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어요. 누가 이 소요와 분쟁과 갈등과 비극과 불행과 고통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오직 메시아는 한 분밖에 없어요. 아멘.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신없이 세상에 치에 살지 않아야 합니다. 이 혼탁하고 복잡한 이 세상 가운데 우리의 영적 수신 상태를 확인하셔야 돼요. 하나님과 교신을 긴밀하게 할 수 있어야 돼요. 깨어 있는 자로 하늘의 음성을 날마다 듣고 그분의 말씀의 인도를 받는 영적인 깨어 있는 신자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살아야 할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내 이름과 내 명예와 나의 어떤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출세와 성공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살아가야 할 존재, 우리의 어떤 열심과 노력의 그 모든 목표도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일에 여러분들의 생애가 쓰임 받게 되기를 바라고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위해 열심히 다름박질치는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주님을 환영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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