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그런 존재로 비유가 됩니다. 그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 갈 수 없다. 그렇게 작고 무력하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존재. 예 모습을 가져야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 얘기했다면 오늘은 좀 더 그 어린아이와 대조적인 인물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와는 매우 대조되는 인물이 오늘 나오고 있습니다. 자 오늘 이 부자 청년의 얘기는 공관복음의 모두 다 나옵니다. 오늘 여기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로 와서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참 좋은 질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누구나 이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이 보이죠. 놀라운 질문을 갖고 왔습니다. 되게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주로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병을 고치게 해 달라 라든가 자기의 일신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께 대부분 왔습니다. 오늘 또 우리가 교회 찾아오시는 분들도 어떤 이유를 가지고 다양하게 어떤 이유를 가지고 다가오시죠. 자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은 다른 차원의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근데 오늘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하나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질문, 영생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 이 질문을 던진 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가 오늘 이 마가복음은 어떤 사람이라고 했고요. 마태복음은 청년이라고 그랬습니다. 누가복음은 어떤 관리라고 했습니다. 그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공통점은 부자다 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부자다. 근데 그냥 부자가 아니고 큰 부자였더라. 그부라고 얘기할 수 있죠? 자 종합해 보면 이 사람은 부 그리고 권력 그리고 젊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뭐라고 얘기하죠? 성공했다 그럽니다. 성공한 사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이룬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에 있다면 부러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젊은 나이에 부를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상당한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올라 있습니다. 자 그런데 그가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다는 겁니다. 이건 특이한 일입니다. 엄청난 부와 권력과 젊음까지 간 가진 사람이라면 가장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성공과 출세를 한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삶을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하겠죠. 요즘 영끌이라는 말을 씁니다. 영끌. 영혼의 힘까지 끌어모아. 그런 말이 있죠. 투자하자. 뭐 이런. 영혼의 그 힘까지 다 끌어모아 오늘 현재의 삶에 집중하자는 거잖아요. 우리 시대가 그렇습니다. 풍요의 시대에요. 어느 때보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목이 말라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를 잃어버린 시대죠. 더 가지고 싶은 욕구 그 갈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대적으로 적용해 본다면 이 부자 청년은 재테크에 관심을 가져야 어울립니다. 현대인들의 관심은 미래보다 현실에 있습니다. 철저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의 대화의 내용을 들어 보면 주로 대부분 현세에요. 재산을 어떻게 정식 시킬 수 있을까? 주식 시장의 변화? 부동산? 아니면 건강 관리? 취미 생활? 조금 더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은 노후? 여러분 무엇보다도 물질적 부유는 영혼을 어둡게 만듭니다. 물질은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다 장악해 버려요. 그리고 그 가진 부를 즐기기에 바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부류라면 영적인 것에 별 관심이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물질적 풍요가 영혼을 얼마든지 빈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고 성공한 젊은이가 영적인 문제로 목사를 자기 발로 찾아와 상담을 요청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은 무엇인가 달라요. 그는 영생에 대한 질문 이터널 라이프. 영생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왔어요. 예상 바뀝니다. 특별한 일입니다. 자 오늘 17절을 잠시 보십시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세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에 놀라운 장면이 하나 있어요. 그 사람이 예수님께로 달려왔다는 거예요. 마가는 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아주 기자 같아요. 레포터 하는 것처럼 어떤 인상적인 장면을 그대로 포착을 하고 스냅처럼 딱 찍어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거예요. 달려왔다는 거예요. 달려왔다. 자 이런 뜨거운 팔레스타인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나라 이런 여름처럼 아주 뜨거운 태양이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날씨에 그것도 돈 많고 젊은 사회적 신분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지금 달려왔다는 것은 이건 특이한 일입니다. 왜 달려왔을까요, 여러분? 절박한 거예요. 가볍게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온 게 아니고 매우 절박함을 가지고 왔습니다. 자, 달려올 뿐만 아니라 올 보면 달려와서 꿇어 앉자 그랬어요. 여러분 태도를 보면요. 그 사람을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상담을 와도 그 태도를 보면 아주 절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한번 들어 보려고 이렇게 온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근데 이 사람은 너무도 간절하요. 그리고 진실한 모습, 그리고 매우 겸손한 모습. 여러분 성공에 도취된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우쭐거림이라는 게 있죠? 너무 일찍 출세하거나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부를 가진 사람은 그걸 주체하기 어려워요. 어딘가 모르게 거만함이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근데 이 청년은 달라요. 그는 예수의 권위에 존경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졸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꽉 찬 사람.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인생에 진지한 태도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태도입니다. 매우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자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19절에 내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십계명의 말씀입니다.
[9:43]자 그런데 이 이 말씀에 청년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20절.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계명을 다 지켰는데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거예요. 대단한 것입니다. 계속 지금 이 청년을 보면 우리를 다양한 영역으로 길을 죽이고 있어요. 돈과 권력을 가진 젊은이가 율법을 지키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의 도덕성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는 얼렁뚱땅 교인이 된 게 아니에요. 여러분 돈을 버는 것과 예수를 열심히 믿는 일이 양립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잘하고 돈도 잘 버는 거 쉽지 않아요, 세상 속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검은 돈을 찾지 않고 정상적인 방식으로 돈을 버는 거 어려운 거예요.
[10:47]백과 줄을 대지 않고 올곧게 높은 지위에 오른다. 이건 쉬운 게 아니에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부자 청년은 외형적으로만 보면 이 청년 그냥 패스예요. 인증이에요. 그리고 이 청년의 모습에 자신감이 엿보입니다. 나는 다 지켰습니다. 선생님이 더 지키라고 하면 또 하겠습니다. 그런 이미 어딘가 도달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부와 지위와 젊음, 종교적 성취까지 이뤘습니다. 그렇다면 만족할 만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왜일까요? 다 가진 겁니다. 다 이루었어요. 근데 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까? 여전히 목이 마른 것입니다. 많은 부와 성공에도 종교적 열심에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 뭔가 모르는 내적 불안. 여러분 무엇인가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고 성취해 본 사람들만이 느끼는 뭐가 있어요? 목마름이요. 이 청년은 매우 정직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되기는 이런 영혼의 목마름을 무시하고 살아요. 다 눌러 버려요. 배부른 소리 하지 마. 근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 정직한 사람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이 청년은 한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때 다 지켰습니다라고 하는 그 청년을 향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결정적입니다. 21절의 말씀.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랬습니다. 예수님 이 말씀은 부자 청년에게 참 물을 끼얹었습니다. 그가 무엇인가 칭찬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근데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는 거예요. 비수를 들이댄 겁니다. 충격적인 말씀을 하세요. 내가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 내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핵심을 건드렸어요. 아니 거부로 있는 이 사람에게 그것을 다 팔아라는 거예요. 가 가혹한 것 같아요. 근데 여러분 예수님은 이 청년의 걸 가혹하게 대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21절을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 이르되 그랬어요.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여러분? 예수님은 그를 매우 귀하게 여기고 계세요. 그를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진정으로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고 싶었어요. 주님은 그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다가오는 이 진지한 영혼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어요. 진심으로 영생의 길로 인도하고 싶어 했던 거죠.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신분과 사회적 조건을 다 갖추고도 주님에게 달려왔겠는가? 주님은 그 마음을 읽고 계신 거죠. 주님의 처방은 간단하고 명료했습니다. 모든 재산을 팔아 나누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위협적으로 들렸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주님의 진정한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자 이때 청년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14:49]의외로 빠르게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청년의 결함은 무엇입니까? 그가 처음 주님에게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을 얻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선한 선생님,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 것 안에서도 그의 관심이 무엇인가 도덕적 행함에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선을 쌓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인간적 어떤 열심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킨 사람들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열심은 자기 만족이지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 의를 자랑해도 흠이 있습니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아. 바울도 회심하기 이제는 율법의 의로은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건 어느 정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 보면 심각합니다. 습은 자기 의에 대한 만족은 위험한 것입니다. 영생은 우리의 힘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호의입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여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열심히 교회 다니고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봉사도 합니다. 열심히 하는데 무엇이 문제가 될까요? 그 열심의 주도권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열심, 자기 확신, 자기 만족. 여러분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도 좋아요. 그러나 구원은 나의 확신의 유무와 상관이 없어요.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구원의 확신이 들었다가 열심이 식어지면 지옥에 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 구원은 날마다 오락가락 하는 것이죠. 자기의 감정의 상태에 따라, 자기의 열심에 따라. 나로부터 출발한 열심은 결국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으로 끝이 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구원이 자기의 행동에 달려 있는 거. 사실 모든 종교가 그래요, 여러분. 인간의 행위에 구원이 다 매달려 있어요. 이슬람이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열심에 달려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구원이 불안할수록 더 열심을 냅니다. 오늘 부자 청년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무지가 참 무서운 거예요. 그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했습니다. 무엇인가를 계속 찾고 있었던 것이죠. 노력하지만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행위에 기반을 둔 신앙의 약점이죠. 여러분 열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열심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거. 자기 열심을 신앙으로 착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다 무너져 버려요. 그는 자기가 가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구원 얻는다는 얘기를 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소유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면 안 된다 하는 것도 아니에요. 기독교는 금욕적인 것이 있지만 금욕주의를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을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부와 가난은 구원과 상관없어요. 가난하다고 구원을 받기 좋은 상태인가? 말하기 어려워요. 가난해도 탐욕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부자들이 많이 언급됩니다. 아브라함 거부였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와 가난이 구원의 기준이 아니죠. 부를 가지고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들이라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신앙의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을 잘 조절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름답고 멋지게 사용할 줄 압니다. 성숙한 신앙이란 뭘까요, 여러분? 물질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성장도 하지 않은 채 신앙은 하나도 없는데 돈이 계속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으로 더 멀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돈의 유혹은 강력한 것입니다. 돈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한 둘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요. 지금까지 지켜온 것 가운데 한 가지만 더 지키면 영생에 이른다는 그런 뜻도 아니에요. 예수님은 지금 부자 청년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켜왔다는 것 그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착각을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그의 연약함이 드러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세요. 누가 하나님을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각 개임마다 아킬레스 끈이 하나씩 있어요. 결정적인 결함. 어느 어느 것 하나를 건드려 보면 실체가 드러나고 있어. 사람마다 그 결함이 다를 수 있는 거죠. 오늘 부자 청년의 착각은 무엇입니까?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우리가 부르로 나누죠.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 5경 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 사랑하는 거. 자 이 계명은 이 청년은 5계명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어려서부터 얘기했어요. 근데 문제는 1계명, 2계명을 어기고 있어. 여러분 십계명 가운데서도 앞부분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1계명이 중요합니다. 1계명을 깨면 다 깰 수 있습니다. 근데 이 청년은 지금 하나님 왜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거예요? 뭐예요? 맘몬이라는 신이에요.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나머지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역시 온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삶이 아니면 다른 계명은 소홀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찌 이웃을 온전히 제대로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청년이 1계명을 깨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지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결국 여러 가지 중 하나가 아니라 결정적인 결함. 그가 얼마나 물질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이 마지막 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00]그런 물질을 넘어 서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물질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드러내시기까지는 숨겨져 있었어요. 그는 모든 계명을 잘 지킨다고 좌호했습니다. 그러나 실체가 다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자아 도치, 자아 만족, 자기 의, 자기에 대한 무지의 결정판이에요. 성도 여러분, 신앙의 실체를 확인해야 합니다. 주님이 실상을 드러내면 달라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가 어려서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종교적 모범생.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 오늘 22절을 다시 한번 봐야 돼요. 그 사람은 뛰어 주세요. 그 사람은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자 여러분, 이 부자 청년은 한 순간에 슬픔에 빠졌어요. 여러분 여기에서 근심하며 가니라 할 때 이 근심은 단순히 근심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원어적 의미를 찾아보면 절망의 상태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에요. 고통을 동반한 절망적인 근심. 성도 여러분, 선택의 길에서 결정을 미룰 때 근심은 길어집니다. 하나를 포기해야 다른 하나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언제나 그래요. 무엇을 포기할까? 그는 예수의 말씀 앞에서 저울질한 거죠. 영생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과 이 순간과 영혼을 선택해야 되는 이 기로에서 그는 결정해야 되는 거요. 그는 영생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그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영성도 있었습니다. 영생을 갈망했습니다. 그동안 누구보다도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에게까지 찾아왔습니다. 극히 근접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에요. 바로 앞이 바로 앞에서 빛이 비치고 있는데 그는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돌아가 버린 거요. 그의 중심에는 세상의 보화가 이미 무섭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번 숨을 고르고 다시 이 본문에 집중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돈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소름 끼치게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 영생에 대한 갈망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진지함이 있었습니다. 상당한 대가를 치 치를 지불할 용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많은 돈의 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어요. 그래서 오늘 22절 하반절에 나오는 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가니라. 그가 선택한 길입니다. 슬픔이 밀려온 거죠. 그 말씀 주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는데 왠지 내 영혼을 짓누르는 슬픔이 밀려오는 거예요. 왜 여러분 근심하며 떠나 한 거예요? 그냥 룰루랄라 가면 되지. 나는 내 길이 있다 하고 가면 되지. 나이 쌓게 그냥 탁 돌아서 버리면 되는데 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간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영생의 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생의 길을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그 재산의 힘이 나를 짓눌러. 그 재산의 많음으로 인하여 떠나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슬픈 거예요. 영원한 구원의 길을 주님으로부터 들었는데도 순종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환심한 거요. 분명히 뭐가 있는데 그걸 붙잡아야 되는데 그걸 그렇게 붙잡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이 엄청난 자신의 부유가 자기의 발걸음을 돌아서게 한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런 자기의 만족과 자기 도치에 빠져서 그냥 살았을 거요. 그러나 진리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의 그 가까이 왔다가 그런 실패를 하고 만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24절, 25절이 그 답을 해 주는 거요. 자 이 본문을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요 구절은 다음 주일 살펴볼 내용이에요.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구절이 이 구절이에요. 기대하시라. 다음 주일 기대하시라. 불길한 예감이 드시는 분은 다음 주일 안 나오셔도 돼요. 이 구절이. 그게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란 말이죠. 오늘 부자 청년을 통해 우리에게 우리를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각자 적용이 다를 수 있어요. 나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중심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내가 진짜 사랑하고 있는 게 무엇인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그 무엇. 여기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간단한 싸움이 아니에요. 여러분 신앙은 뭐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이 부자 청년의 얘기처럼 얼마나 리얼하고 얼마나 현실적인 얼마나 실제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거요.
[29:51]여러분 신앙은 신앙의 길은 리스크를 요구하는 겁니다. 넓은 길이 아니에요. 좁은 길이라는 거요. 여러분 마가복음을 계속 강해를 하는 가운데 이 말씀 그대로 설교를 하면 우리는 감당이 안 돼요. 그 저는 굉장히 많이 수위를 낮추고 낮추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의 길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거요. 히브리서 11장 26절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시는 이심을 바라봄이라. 여러분 이 구절이 이해가 됐어요, 여러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 고난, 핍박, 환난. 모든 걸 다 내어 빼앗긴 그 삶이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야, 엄청난 얘기예요. 이는 상 주시는 이심을 바라봄이라. 이 구절을 더 알고 싶으면 이번 주 금요 철야 설교를 들으시면 참고가 될 것입니다.
![Thumbnail for [이규현 목사] 한 젊은 부자의 고민 | 막 10:17-22 | CGNTV 말씀강해 by CGN](/_next/image?url=https%3A%2F%2Fimg.youtube.com%2Fvi%2F_0Zvvl-GeMI%2Fhqdefault.jpg&w=3840&q=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