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자 우리는 이 로마서 12장을 계속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공동체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공동체. 커뮤니티 이 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그래서 한 개인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지만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고 개인과 개인 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지난 금요일 철하를 철하예배 때 굉장히 중요한 설교를 하셨는데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을 이용하시면 되겠어요. 공동체가 중요하고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세요.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를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할 때 우리라고 할 때 나가 아니고 우리 이렇게 우리 공동체의 개념을 늘 이해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보면 유명한 얘기가 나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 어몽됨 그들 가운데 있다. 그러니까 관계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겁니다. 공동체를 참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적 의미에서는 우리가 지연도 있고 혈연도 있고 굉장히 중요한 관계가 있지만 성경적 관점은 지연 혈연을 뛰어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동체가 더 중요합니다. 아마 예수를 믿으시면서 점점 거기에 느껴질 거예요. 물론 혈연이 지연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언약 안에서 맺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관계는 우리의 인간적 혈연을 넘었음. 우리가 서로서로의 관계 관계들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이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은 우리가 이 공동체를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고 이 공동체를 세워 가기 위해서 기프트 은사를 주셨다고 그랬습니다. 어떤 일을 잘 수행하도록 하나님이 각자에게 맞는 은사를 주셨다고 그랬어요. 어빌리티를 주셨어요. 어떤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재능을 주신 거죠. 그런데 그 은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은사의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따라와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캐릭터 이 성품이 없으면 은사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거. 이 교회 안에서 여러분들 일을 잘 하긴 하지만 뭔가 사람들 안에 분열을 일으키고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하는 경우들이 있죠? 그러니까 은사, 일은 잘 하는데 사람들에게 관계를 깨고 또 불평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어요. 그렇게 사랑이 붙여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지난 시간에는 은사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가 오늘 바울은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에서도 동일한 패턴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은사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13장에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대단한 은사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띵 꽝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자, 고린도 교회가 은사가 많았지만 그 은사로 인하여 교회가 굉장히 갈등이 많아졌어요. 분열이 일어나고 은사를 가지고 서로 경쟁하고 키재기 하면서 교회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 은사에 사랑이 더해져야 한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교회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뭘까요? 그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데 액기스 가장 핵심 가장 중심에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공동체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맺어 가는데 핵심은 결국 사랑인 거죠. 근데 이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그냥 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자, 오늘 이 9절의 말씀 첫 부분은 뭘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거짓 없는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41]자, 여러분,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우리의 관계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근데 문제는 사랑의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랑을 얘기하고 사랑 사랑을 하고 있지만 거짓된 사랑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때 중국에서 뉴스가 됐던 것 가운데 하나가 아이들이 아기들이 먹는 분유가 가짜를 만들어 냈어요. 분유를 가짜로 만들었어. 워낙 짝퉁이 많은데 이 분유를 어찌 가짜를 만드는 거. 얼마나 그 위험한 것입니까? 매일 먹고 자라야 할 그 분유가 가짜라는 거예요. 여러분 지폐가 위조 지폐가 막 돌아다닌다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굉장히 혼란하겠죠, 이 사회가. 신뢰할 수가 없을 거예요. 여러분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게 뭐냐면 사랑의 거짓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분유를 가짜로 만드는 것보다 위조지폐가 돌아다 다니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가 있어요. 왜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가고 사랑으로 호흡하고 사랑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공동체 안에 거짓된 사랑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월이 흐르면 관계가 깊어져야 마땅합니다. 근데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관계가 깊어지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다면 이유가 뭘까요? 거짓된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짓된 사랑의 거짓이 들어가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관계가 깊어질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이 거짓에 굉장히 익숙해 있습니다. 거짓말도 사실 말을 많이 하면 거짓말이 막 섞여 가잖아요. 또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 속에 우리가 끊임없이 죄의 문제, 이 거짓의 문제가 끼어들고 있어요. 근데 무엇보다도 사랑의 거짓이 끼어든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피해가 큽니다. 거짓된 사랑은 관계가 깊어지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환멸을 느끼게 만듭니다. 여러분 가 면을 쓰고 사랑한다면 서로가 친밀해지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다양한 다양한 가면을 씁니다. 살아갈수록 위장술이 발달하죠. 위장술 착 하는 거 아닌데 그런 것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우리를 위선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 위선도 오래하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노련해집니다. 소위 요즘은 이미지 메이킹 시대라고 얘기하죠. 가상이 현실보다 더 멋있게 만드는 가상을 현실보다 더 멋있게 만드는 기술이 매우 발달이 있습니다. 겉 모양을 기가 막히게 포장하는 거죠. 우리 인간 관계도 그런 위선이 그렇게 발전이 되는 거죠. 그래서 겉으로는 굉장히 아름다워요. 참 아름다운데 뭔가 뭔가 섬뜻한 그런 아름다움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위장은 분명한 위장을 분명히 한 것 같은데 가짜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기가 막히게 위장을 하는 거. 위장술이 발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으로는 분노가 부글부글 끌어오르는데도 겉으로 멋있게 미소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앞과 뒤가 다른 것이죠. 사랑을 하고 있는데 숨은 의도가 따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거짓된 사랑은 관계가 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짓된 사랑은 관계를 친밀한 관계를 거부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교제하는 것을 원합니다. 친밀해지는 것을 부담스러워요. 많은 사람들이 왜 그럴까요? 친밀해지면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충 사귀는 이유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거예요. 더 깊이 알면 알수록 더 친밀해지면 어떤 부담을 내가 안게 된다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사랑하는 관계는 왜 고통이 오죠? 그 왜 자식들로 인하여 부모들이 고통을 겪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랑은 책임이요, 사랑은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고통이 있는 게 또 사실입니다. 자, 그런데 책임 있는 사랑,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할 때 이 관계는 언제나 급도는 거죠. 피상적인 만남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아무리 만나도 서로가 속내를 꺼내 놓지 않아요. 그래서 급도는 얘기만 계속 하다가 헤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원합니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우리는 그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에게 그런 모습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주님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습니다. 수제자였고 주님을 그렇게 따랐던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 다시 부활하셨다면 그를 따라야 되는데 그와 관계를 거리를 두기를 원했어요. 친밀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거죠. 친밀해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거를 알았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다니다가 결국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찾아온 그 아픔을 그가 아는 거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디비라 바닷가로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의식적 도피였습니다. 자, 왜 그랬을까요? 관계 안에서 가장 흔한 모습들입니다. 도피예요. 여러분 역기능적 가정에서 아이들이 자라면 어릴 때부터 도피적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괜히 진실을 얘기했다가 큰 일 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기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부들은 싸울 때마다 남편이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아요. 힘들어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함께 풀어 가야 되는데 싸우다가 그냥 일방적으로 문을 닫고 나가 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계 안에서 방어적이고 도피적입니다. 깊이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마주 대하는 순간 많은 문제들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죠. 대화를 해도 피상적인 얘기만 오고 갑니다. 깊은 대화가 없어요. 그걸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만나도 부부가 일상적인 얘기만 합니다. 영수증 처리했어? 뭐 이런 거. 하수구 막힌 거 뚫었어? 뭐 이런 거. 내 옷 입어 놨어? 다려 놨어? 뭐 이런 거. 생활 잡기에 관한 것 이상을 이야기하잖아요. 공동체 안에서도 깊은 관계를 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냥 이전에 인간 관계로 인했던 그 상처들이 그 상처들로 인하여 받았던 아픈 경험들이 있는 거죠. 친밀한 관계 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 그런 분들이 의외로 많아요. 그래서 늘 피상적인 만남으로 다 끝내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 가면을 쓰고 적당한 수준에서 교제합니다. 그리고 항상 방어적이에요. 그리고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노출을 하지를 않으려고 합니다. 특별히 이것은 우리의 어린 시절의 가족 관계 속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받았던 상처들의 후유증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건강한 관계 안에서 행복과 만족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 안에 있지 못했어요. 마침내 어떻게 해요? 친밀한 관계 안에 있지 못할 때 가출을 하고 맙니다. 큰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와의 의무적 관계만 있었지 친밀함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어요. 큰 아들 역시 집에서 일을 열심히 하긴 했지만 아버지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 역시 탕자죠. 여러분 다윗의 구약의 다윗을 보면 결혼 생활이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첫 아내 미갈과 어떻게 결혼을 했죠? 진정으로 사랑하여 얻은 아내가 아닙니다. 사실은 다윗이 전쟁에서 싸움에서 이긴 대가로 그 사울과의 관계 속에 정략적인 결혼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몇 명의 아내들이 있었죠. 모두 진실된 사랑으로 얻은 아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거짓된 사랑은 결코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밧세바와의 성적인 범죄는 우연히 터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였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21장을 우리를 그러다 보면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로 도피해 버린 이제 베드로를 찾아가시죠. 부활을 보고도 도피한 제자를 주님은 다시 찾아가십니다. 아침 시간에 숲불을 앞에 두고 우리 주님이 대화를 시도하시죠. 갑자기 찾아오신 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때 베드로가 굉장히 어색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어색함을 줄이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 빛이까에 이 숲불을 피워 놓으셨어요. 주님 얼굴 보기가 좀 민망하니까 이거 보라고. 근데 사실은 이 베드로는 숲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요즘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데 이 트라우마가 숲불에 대한 트라우마가 뭡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야바의 그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 안에 있을 때에 그 숲불을 쬐고 있을 때 한 그 한 여종이 찾아와서 예수님에 대한 같은 이 당이 아니냐고 물을 때 예수님을 그 곳에서 부인을 했단 말이야. 그 숲불을 쬐고 있는 동안에 세 번이나 부인을 했습니다. 근데 오늘 주님이 이 숲불을 피워 놓고 그와 대화를 시도할 때 아마 그때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났을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주님이 던졌던 질문은 의외의 질문이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과거를 끄집어 내려고 하지 않았어요. 어떤 책임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어떤 부담을 주지도 않으셨어요. 주님이 확인하고자 하시는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거짓 없는 사랑이에요. 주님은 베드로와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을 던지시죠.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21장. 세 번 질문을 하는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는데 우리의 말로는 똑같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세 가지의 단어는 다르게 나와요. 첫 번째, 두 번째 질문할 때 예수님은 아가파오의 질문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할 때 그 사랑을 아가파오에요.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 변함이 없는 사랑, 늘 여전한 사랑, 순수한 사랑, 깨끗한 사랑, 오염되지 않은 사랑, 완전한 사랑. 변함이 없는 이 사랑을 하느냐라고 물을 때 베드로의 두 번 계속 대답은 동일하게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필레오는 불완전한 사랑이에요. 연약한 하나님, 나는 그런 아가파오의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필레오의 사랑밖에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예. 그때 세 번째 예수님이 아가파오로 두 번째까지 물었던 예수님이 세 번째는 다르게 단어를 사용합니다. 베드로가 썼던 필레오로 내려가십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읽으신 거죠. 그가 여전히 연약하고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그 베드로의 진실을 알아냈어요. 이제는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장담했었어요.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이제 주님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여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따라갈 수 없지만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면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정직한 고백 그리고 주님에 대한 그 순수한 사랑을 표현할 때 거짓이 없는 그는 대단한 장담과 공략이 아니라 진실된 그의 마음을 표현했을 때 우리 주님이 그를 받아들이시죠. 그러면서 그 장면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이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순수한 마음을 아시고 또 베드로 역시 주님의 그 마음을 그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다시 그를 불러 주실 때 베드로가 베드로의 연약함까지 책임을 지시겠다는 뜻이에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베드로가 더 이상 자신을 숨기거나 도망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경험하면 십자가의 복음을 경험하면 더 이상 내 자신을 내가 스스로 변호하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어요.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나를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다 감당하셨기 때문에. 여러분 세상을 보면 세상에는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해요, 여러분? 연약함이 드러나면 인정사정 없잖아요. 요즘에 인터넷까지 동원되어져서 약점이 드러나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공격하여 완전히 숙대밭이 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요즘은 뭐 장관 이렇게 청와대에서 불러도 이렇게 아내들이 다 말린대요. 뭐 뭐 조금이라도 나면 이제 집안이 그냥 여기 대한민국에서 살 수 없을 정도로 공격을 받으니까. 혹시 여러분들에게도 청와대에서 부르거든랑 반응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4:46]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자신의 연약함을 기꺼이 털어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복음의 역사가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누가 정직할 수가 있어요? 복음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거짓된 모습으로 자신을 숨기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왜 복음이 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연약함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내 약점과 내 허물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숨길 이유가 없어요. 그의 허물이 나의 허물이요 그의 약점도 그의 모습도 다 내가 안고 있고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요즘 만년하고 있는 우울증은 무슨 병인가 하면 숨는 병이에요. 감추는 병이에요. 자신을 드러내고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자꾸 숨는 거예요. 드러내는 것을 드러나져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숨길수록 병이 깊어집니다. 여러분 육체의 질병도 그렇잖아요. 숨기면 병이 더 깊어져요. 사실 병원에 가는 것 힘든 일이잖아요. 정밀 분석을 하려고 하면 뭐 옷을 다 벗어야 되고 여기저기 온통 돌리고 뭐 넣고 뭐 막 이래. 피곤한 일이지만 내 안에 깊이 숨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그래서 나를 치료하는 거 아니겠어요? 드러내야 돼. 내 자신의 연약함을 기리낌 없이 누군가와 얘기할 수 있는 공동체, 그런 소그룹이 있다면 그 사람은 너무도 축복된 사람이에요. 여러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한다는 게 어려울지 모르지만 십자가의 복음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 싸운 명성과 사회적 신분 등으로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일 숨 막히는 삶을 살아야 돼요. 왜 이 가면 때문에. 여러분 우리 모두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완벽할 수 없어요. 완벽해 보이려고 애를 쓰지 말고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복음 안에서 드러내려고 할 때 하나님의 자비하심 속에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 그리고 나를 더욱 더 복음 안에서 드러내고 나의 약점을 기꺼이 밝힐 때 그것이 복음 안에서 치유된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용기를 주고 얼마나 많은 회복을 가져오게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 바울은 이제 거짓 없는 사랑을 이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합니까? 그 거짓 없는 태도는 이제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으로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상대의 실수와 연약함을 받아들여 준다고 해서 악에 대해서 허용적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과 악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악에 대해서 애매한 태도를 가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된 관계는 그 관계 안에 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서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악에 대해서까지 미온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얘기하는 거. 사랑한다면 때로는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정직하게 말해 줄 용기가 필요합니다. 죄인은 미워하지 않으면서 죄와는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워한다는 말은 강한 단어입니다. 변하던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증상은 죄에 대한 분명한 태도 우리가 이전에는 죄에 대해서 분명하고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살지 못했습니다. 죄에 대해서 두리뭉실했어요. 죄에 대한 기준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기준이 죄에 대한 기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애매모호한 그런 태도를 가지고 살았어요. 그러므로 당연히 죄에 대한 태도가 허용적이고 죄의 힘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참된 사랑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악을 가려내게 됩니다. 죄인은 미워하지 않아야지 하지만 죄는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거. 사랑은 악에 대해서 허용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적극적인 소극적인 교훈에서 적극적인 교훈으로 이동합니다. 여기 선에 속하라라고 할 때 이 속하라라고 하는 이 단어 역시 원문으로 보면 굉장히 강력한 단어에요. 이 속하다라고 하는 단어로 쓰는데 사실은 이것은 그 본드 같은 이렇게 접착제와 같은 의미로 쓰여집니다. 그러니까 속하다라고 하는 이 말은 헐겁게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아주 단단하게 강력하게 묶인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할 때 붙는다라고 하는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고 하는 것처럼 이 붙는다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악 이 선에 속하라라고 하는 거. 자, 여러분 신앙은 붙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붙느냐의 싸움이에요. 어디에 붙을 것인가? 붙어도 확실하게 붙어야 되는 거. 하나님께 우리가 느슨하게 붙어 있다면 다른 것에 끌려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신자는 일평생 동안 선한 것에 강력하게 붙들려 있어야 되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께 붙들려져 있는 강력하게 본딩이 돼 있는. 그때 우리 안에 거짓 없는 사랑이 흘러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요즘 우리가 표절 문제가 많이 이슈화 됩니다. 사회 이슈와 논문을 표절하는 문제 이 표절이 우리가 굉장히 이슈가 되고 있는데. 여러분 이 좋은 표절도 있어요.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절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C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가장합시다. 가장을 합시다라고 하는 이 내용을 쓰고 있는데 그는 두 가지의 가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쁜 가장이에요. 이것은 진짜를 밀 밀어내는 가장. 실제로는 하지 않으면서 하는 척 하는 거. 이게 나쁜 가장이에요. 근데 좋은 가장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진짜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이에요. 친밀감을 보여야 할 사람인데 친밀감이 생기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정말 친밀한 관계로 살아가야 되는데 내 안에 친밀감의 감정이 생기지 않아. 그럴 때 최선의 방책은 뭐냐면 마치 자기가 실제보다 더 친절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그런 태도를 보이면 놀랍게도 얼마 있지 않아 내 안에 큰 친밀감이 생겨난다는 거. 사랑의 마음이 없지만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말하잖아요.
[32:26]그 위선이 아니라는 거. 사랑의 감정은 없지만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물론 착 하는 것은 위선이지만 더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적극적인 행위 자체는 위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그것은 진실을 가장한 진실된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자, 이것을 로마서 13장 14절에서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고 하는 말 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
[33:00]여러분 옷은 뭘까요? 옷은 자신의 하나의 신분을 의미하는 거죠. 신분. 자, 여러분 이 우리가 비행기를 타면 스튜어디스들이 아 그 옷을 딱 입으면 갑자기 옷을 입는 순간 딱 미소를 짓는 거야. 이게 이제 옷이 주는 힘이에요. 우리 특별히 한국 이 항공기에 스튜어디스는 세계적입니다. 제가 호주의 이 콴타스를 주고 다 타고 다닐 때는 이런 무서운 아주머니들이 막 던져 줘요. 던져 줘. 그럼 받아야 돼, 받아야 돼. 뭐 밥이 떨어지고 막 이게 잘못 받으면 어 힘들어. 그래서 저는 주로 이 한국기만 다려고 그랬는데. 아 이 옷을 입으면 나이스해지고 아주 상냥해지고 아주 우리 한국 스튜어디스는 거의 무릎을 꿇잖아요. 메뉴판을 들고 와서 무릎을 꿇고 뭘 더 시킬까? 기가 막혀요. 이게 옷이에요. 여러분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표현이 그런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 수 없지만 그리스도로 옷을 입을 때 그리스도가 살았던 삶을 방식을 흉내 내는 거죠. 그것을 위선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말은 내가 그럴 만한 능력이 없지만 그리스도가 살았던 삶의 모습을 살아가려고 흉내 내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근데 어느 순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러분 우리 어린아이들이 그렇죠. 엄마들 아기들 키울 때 말도 못 알아듣는데 젖을 먹이면서 그 엄마들 보면 내 말을 하죠. 아이고 예뻐라. 아이고 뭐 뭐 뭐라 뭐라 맛있는이 어쩌니 뭐 계속 얘는 옆에서 보면 뭐 혼자 독백이죠. 근데 그 아이가 어느 날 어느 순간부터가 옹아리를 하죠. 옹아리를 해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말을 알아듣기 시작해. 어느 순간부터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스스히 스스히 어느 날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재 알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어요.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우리가 그 사랑을 느끼지도 못했어요. 근데 어느 어느 순간부터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기 시작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그 사랑을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익혀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제 새로운 공동체 안에 거짓된 사랑이 아니라 참된 사랑을 우리 가운데 흘려 보내기를 원했어요. 여러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가짜 사랑, 거짓된 사랑, 위선적인 사랑에 질리지 않으셨습니까? 거짓된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가 없어요.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경험한 사랑의 눈을 뜨시고 이제 우리의 관계 안에 그 사랑을 드러내는 흉내, 거룩한 사랑의 표절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공동체 안에 깊이 들어오셔야 돼요. 그래서 사람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흉내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오고 가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그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는 거죠. 여러분 그리스도를 나도 모르게 닮아가게 되는 거죠. 어디에서요? 우리의 관계들 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서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거짓 없는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서로가 필요하다는 거죠. 참된 사랑 안에서 친밀해져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짓 사랑은 상처를 만듭니다. 절망으로 마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친밀한 관계 안에서 온전해지도록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홀로는 행복할 수 없어요. 홀로 사랑할 수 없어요. 홀로 자신의 필요를 채우거나 만족할 수 없어요. 홀로 성숙해질 수 없어요.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속죠. 네가 너의 필요를 채워라. 네가 너를 만족시켜라. 네가 너 홀로 온전해질 수 있다. 여러분 거짓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에게 공동체를 만드시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거짓 없는 사랑을 통하여 우리의 관계가 친밀해지기를 원하고 그 관계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소극적이지 말고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어 가셔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길 뿐만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으셔야 돼요. 이제 거짓된 사랑을 멈추고 거짓된 가면을 벗어 버리고. 가면 대신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사랑을 표절하세요. 여러분들의 관계들이 지금 깊어져 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가족 관계 안에서 가족 관계 안에서 정말 친밀해지고 있는가. 여러분 부부가 우리과 자녀와의 관계 속에 세월이 흐르면 그 관계는 깊어져 가야 돼요. 깊어져야 돼요. 그게 정상이에요. 근데 살아갈수록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다면 그 안에 거짓이 들어있는 거. 우리 안에 가면을 쓰고 첫 날 만날 만나도 안 되는 거. 혹시 여러분들의 관계가 급돌고 있지는 않아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날마다 스트레 쌓이는 관계 안에 있지 않습니까? 오늘 정직한 공동체, 진실한 공동체, 갇혀서 관계들이 더욱 더 깊어지기를 하나님이 원하시고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이 더 성숙하게 세워가기를 원하시고 또 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복음 안에서 가면을 벗으시고 투명하고 진실된 모습으로 거짓 없이 다가가시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안에 관계가 새로운 관계로 발전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