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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BEST 설교 | 경계선을 넘으신 예수 | 수영로교회_이규현목사 | 마가복음2:13-17

CTS BEST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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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여러분 우리도 모르게 이 외국이 돼요. 외국. 옆으로 치우치거나 우리가 본질 핵심을 놓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복음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또 그리스도가 어떻게 행하셨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고요, 자주자주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져야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은 나의 열심히 중요하지 않아요. 열심히 굉장히 위험해요. 그 열심의 근거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 열심이 건강한 열심인가? 내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열심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리스도적 관점,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이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복음서는 매우 중요한 그런 책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자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은 가는 곳곳마다 거대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당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는 그리스도는 너무 크신 분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을 가지게 되죠. 주님의 파격적인 행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고요,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불이 붙으면서 뜨거워지면서 반향 반대도 만만치 않게 일어납니다. 자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당신의 제도권의 종교 지도자들 간에 이 충돌이 벌어집니다. 지난 본문에서 이미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 신성모독이로다 그랬습니다. 이 신성모독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 신성모독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작은 죄가 아닙니다. 이 전운이 감돌죠. 굉장히 심각한 충돌이 이제 벌어질 것을 이미 지난 본문에서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알페의 아들 세리 세리였던 레이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장면입니다. 세리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거 이건 굉장히 그 당시의 사회에서는 충격적인 일입니다. 자 레이가 예수를 믿기로 따르기로 함으로써 예수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시고 또 그 세리였던 레이의 친구들이 함께 예수님과 음식을 나누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식사를 같이 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식사를 같이 한다. 이거 굉장히 친분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용납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시는 광경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시비를 겁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죠. 자, 이런 세리는 누구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친 로마,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기의 동족들의 등을 쳐 가급적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여서 일부는 자기가 착복하고 일부는 로마의 정부에 바치는 여러분 식민지 국가로 살아가면 이미 경제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습니다. 더 나올 게 없어요. 그 안 내면 어때요? 강제 징수를 하고 아주 압력을 가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헌금 이 세금을 긁어내는 이 세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앞잡이, 우리 일제 시대를 경험했던 것과 같습니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는 거죠. 유대인의 관점에서 세리들은 반역자입니다. 민족의 반역자입니다. 비인간적인 거죠. 그래서 백성들을 지어짜면서 세금을 긁어내는 그때나 지금이나 세금 좋아하시는 분 별로 안 계시죠, 그렇죠? 그 세금을 내는 것을 힘들어하는 그 시대 속에서 이 반역자로 살아가는 자들이 세리였기 때문에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죄인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정결 예식, 손을 정결 예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음식을 먹을 때 그런 정결 예식을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 정결 예식을 행하는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고 먹는 그 세리 죄인들이야말로 막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도둑들이나 강도와 똑같은 사람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렇게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새인의 관점에서 보면 상관할 수 상관할 수 없는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불효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오늘 16절에 보니까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자 여기 바리새인의 서기관, 바리새인이 나오는데요. 바리새인은 누구입니까? 마가복음에서는 처음 등장하는 부류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구별된 자들 다르게 표현하면 분리주의자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적 가장 주류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자 애를 쓴 사람들이에요. 자 문제는 뭐냐면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을 잘한 사람들이에요. 당연히 이들은 영적인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고 종교적 모범생들이었습니다. 규칙을 잘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그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규칙을 잘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를 감시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비판적인 논을 갖고 있죠. 그래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세리와 죄인들은 X예요, X. 인간 이하로 가능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람들. 바리새인들은 규칙을 강조했습니다. 자신들이 정한 울타리 안에 들어와야 될 사람과 들어오지 못할 사람을 분류했습니다. 우리 청년들 얘기로 하면 인싸와 아싸가 있어. 인사이드에 들어올 사람인지 아웃사이드로 취급해야 될 사람인지. 자신들이 만든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언제나 판단한 겁니다. 그 기준 안에 들지 않으면 X, 들면 O. 그런 면에서 세리와 죄인들은 X예요. 그리고 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예수도 X가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과의 눈에 보면 예수의 행동은 거의 미친 행동이죠. 여러분 사람이 누구와 같이 밥을 먹는가는 중요한 이슈가 됩니다. 누구와 밥을 먹느냐는 그 사람의 신분을 의미하죠. 유유 상종. 대게는 동질감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습니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말은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요. 자 이 일은 예수님이 죄인과 세인들과 밥을 드시는 것은 음식을 드시는 것은 이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을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을 거예요. 위험한 일을 하신 거죠. 이 일이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분류하고 분리시키고 이런 일들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 분리된 분류된 사람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자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분의 예수님의 친구들의 리스트는요. 그 안에는 그물급이 인싸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늘 친구들이 창녀, 과외가 있는 여인들, 나병 환자, 세리들, 거짓들, 평범한 어부들.

[9:00]예수님의 그 족보인 마태복음 1장이 그러하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보다 높은 지체 있는 사람과 만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고 나면 어떻게 해요? 반드시 자랑하죠. 나 누구누구와 밥 먹었어. 그 말은 뭐예요? 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아는 사람이야. 여러분 그런데 주님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하향 조정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은 예리했습니다. 엄격하고 또 매몰찼습니다. 그들은 높은 기준을 세워 사람들을 차비로 한 거죠. 그래서 어디를 가나 우리는 끼리끼리 그룹을 형성합니다. 이해 관계에 따라 혹은 친 출신에 따라 성향에 따라 모입니다. 우리 한국 사회는 사회적 갈등이 심한 사회입니다. 당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밝히라 강요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적으로 규정하고 몰아붙여 버립니다. 바리새인들의 볼 때 예수님은 반대편에 서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우리 편이 아닌 거 같아. 충돌이 일어난 거죠. 예수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은 것으로 봐 이는 분류해야 되는 아웃사이드해야 될 대상으로 본 것입니다.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는 척결의 대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죠.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 오래 있다 보면 왜곡된 기준이 일어납니다. 나도 모르게 의인이 되고 교회 바깥 사람을 상종 못할 죄인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구원받은 것을 마치 자격증 딴 것처럼 그리고 종교적 우월 의식을 얻는 거죠. 세상은 죄악된 곳이기 때문에 선을 분명히 긋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술 담배 하지 않는 것으로 도덕적 우월주의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남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을 우리는 현대판 바리새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분리주의자입니다. 나와 너는 달라. 여러분 우리는 늘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만 만나고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오랜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안 믿는 사람을 만날 겨를이 없어요. 우리도 모르게 우리만의 세상 안에 갇혀 살게 됩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계속 성을 쌓아 올리죠. 우리끼리 지내면 편안해지고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왠지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우리를 수를 인정해 주고 세워 줍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목사님. 여러분 목사도요. 교회 안에서는 너무 좋아요. 목사님 뭐 얼마나 좋은지 몰라. 바깥에 나가면 아저씨 차 왜 이렇게 됐어요? 막 이러고 막 갑자기 교회 목사님 하다가 나가면 갑자기 헷갈릴 때가 있어요. 잘 안 나가요. 교회 안이 너무 좋은 거예요. 세상에 나가면 전혀 교회 직분을 안 알아 줘요. 오히려 놀려요. 집사람해. 집 샀어? 뭐 이러고.

[12:46]거칠어요. 다 놀려요. 그럼 우리는 어때요? 다시 편안한 곳을 찾아요. 우리끼리 모여. 아멘 할렐루야. 그건 좋은데 왠지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는 이질적 집단으로 점점 변하게 됩니다. 언제부터인가 세상 사람들이 신자들에 대해서 불편해 합니다. 교회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거. 요즘도 많은 이슈들 때문에 그런 일들이 생겨요. 분명한 그들의 오해도 있지만 우리의 편에서 원인 적용한 면들이 있습니다. 세상과 경계선이 분명히 그어져 있다는 거예요. 우리도 꺾고 그들도 꺾어 버렸어요. 우리의 모임들은 대부분 불신자들과 상관없는 모임들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만들어 놓은 그 경계선을 넘어가 버리셨어요. 예수님은 어떤 특정 그룹에 속한 분으로 규정하기가 어려워요, 성경을 보면. 주님은 사람들이 예측을 넘어서 행동하셨습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규칙을 허물어 버리셨어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의 시비를 걸어 왔을 때 주님의 답변이 오늘 17절입니다. 유명한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아멘. 자 이것은 주님의 관점입니다.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지상에 삶의 관점이에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14:50]의사가 경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다는 거예요.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 자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행동이 그들의 규칙을 깨는 것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규칙이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어요. 그 규칙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떤 특정한 부류로 정리되기 어렵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이 만든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판단하려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평가는 기준은 언제나 겉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거룩하다고 여겨서요. 그러나 주님이 보시는 관점은 달랐습니다. 죄인이라는 기준은 겉모습이 아니라 안에 문제, 속에 문제. 주님이 보시기에는 바리새인들이 훨씬 더 더러워 보였습니다. 감추고 있는 그들의 속은 세리나 죄인들보다 결코 더 깨끗하다고 볼 수 없었어요. 겉은 거룩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착각이죠. 여러분 중요한 기준과 관점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혼란에 빠져버립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오늘 본문과 잘 오버랩됩니다. 매칭이 됩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들어왔을 때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태도가 중요하죠.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하는 아버지. 근데 큰아들은 분노합니다. 그야말로 아버지를 바라볼 때 정상이 아닌 아버지로 보는 거예요. 왜 이런 관점이 생겼을까요? 이 아들은 탕자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저 아버지 왜 저러나?

[16:57]아버지의 재산으로 창녀들과 함께 놀아났던 자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줘. 이 말이 되느냐는 거예요. 저런 아들은 쫓아내야 되는 거예요. 아싸예요. 그냥 아웃사이드예요. 내쫓아야 되는 거예요. 집안의 명예를 더럽힐 뿐만 아니라 집안의 재산을 다 망가뜨리고 그리고 아주 창기와 함께 살았던 저 더러운 자식과 어떻게 우리가 다시 뒤섞일 수가 있는가? 그래서 여러분 본문을 보면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이 형은요. 절대 자기의 동생을 동생이라고 하지 않아요. 당신의 아들 그래요. 아버지를 향하여 동생을 얘기할 때 당신의 아들이라고 나와 상관없는.

[17:44]그러니까 이 형은 동생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일에 열심을 내요. 그와 나는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기쁨으로 연 잔치에 결코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큰아들이 전형적인 바리새인입니다. 아버지는 다르죠. 전혀 다른 관점과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32절에 보니까 이 내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멘. 이 큰아들과 아버지의 이 어마어마한 관점의 차이. 여러분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관점이 바로 이거예요. 여러분 교회 안에서 정치적인 관심 표현하는 것도 좋고요. 사회 운동 강조하는 것도 좋고요. 때로는 복지에 관한 열심을 내는 것도 좋고요. 다 좋아요. 그러나 그 어떤 목소리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보셨던 이 관점이에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것. 그것보다 더 위에 있는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이게 본질이니까. 그 외는 다 비본질이에요. 주님이 가지신 관점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 앞에서 다른 모든 것은 다 밀리게 돼 있어요. 주님은 구원을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바리새인들로부터 비판받는 거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비판이 두려웠다면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지도 않았을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예수의 행동은 파격적이었지만 주님에게는 매우 당연한 일이에요. 매우 당연한 일이에요. 주님은 왜 그 일을 위해 오셨기 때문에.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주님의 존재의 이유였어요. 주님은 당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초점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욕먹는 것에 초점을 맞추셨다면 저는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요.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 쏟아질 비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하신 것입니다. 오해받는 일, 욕먹는 일 그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 시대보다 훨씬 더 비난하게 좀 모며 위기들이 널려 있습니다. 요즘 SNS를 통하여 무차별 악플로 공격하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쏟아내는 이 베스렐의 문화들. 주님이 군중들에게 노출되면서 동시에 공격하는 자들이 막 늘어나요. 요즘처럼 무차별 악플 공격이. 그러나 주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당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해도 상관없어요. 한 가지는 양보할 수 없어요. 나는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존재한다.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시겠다는 태도를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의사의 존재 가치는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입니다. 좋은 의사라는 평판을 유지하려고 위급한 환자의 수술을 꺼린다면 그런 좋은 의사라고 할 수 없어요. 레이의 친구들은 모두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었습니다. 의사는 성한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보다 병든 사람과 접촉하는 일이 많아야 정상이에요. 주님은 영혼의 의사로서 죄인들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로는 여러 가지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선택한 것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해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려고 하면 우리가 가져야 될 분명한 가치예요. 그게 뭐냐면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이 삶의 모습입니다.

[22:17]오늘날 주님이 오신 이 목적을 우리의 오늘의 교회와 연결을 시켜 보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이 이 본질이고 핵심이고 전부라는 사실. 그래서 누가복음 19장 10절에 유명한 말씀을 우리 주님이 직접 스스로 말씀을 하셨어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아멘.

[22:47]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인자가 이 땅에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교회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어요. 오직 일관된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영혼을 구원하는 일,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 여러분 교회가 이 방향을 놓치면 안 돼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뭐냐. 예수님도 당신 스스로 살지 않으셔 마음대로 살지 않으셨어요. 주님은 언제나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어요. 주님은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움직이셨어요. 그 뜻이 뭐예요? 인자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예수를 끌어당겨요. 주님이 사람을 대하신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인가 아닌가. 그가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정치적으로 좌파든 우파든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하는 것. 주님이 보셨던 시선은 항상 그거였어요. 여러분 2천 년 전 유대 사회 역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갈등 이상으로 복잡했습니다. 주님 역시 유대인으로 태어나셨고 유대의 정치적 상황을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정치적 혼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휩싸이지 않으셨어요. 개열된 정치적 논리에 끼어들어 논쟁하지도 않으셨어요. 제자들이나 주님의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가 정치적 메시아 혹은 경제적 메시아로 나서 줄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로마 정부와 들입각도 세우지 않으셨어요. 세상은 편 가르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요. 어느 편인가 적이 인가 아군인가 흑백 논리가 강합니다. 전투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도 유사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일관되게 행동하신 게 있어요. 이유는 주님이 지상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입니다. 아멘.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세리와 죄인들을 친구로 삼으신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비난하고 공격할 것을 아시면서도 불구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친구가 되셨던 그 주님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오늘도 우리가 주님처럼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직장에서도 회식이 있으면 2차 안 가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2차 안 가. 2차는 줄로 서요. 안전 안 되잖아요.

[33:57]그러면서 제 생각에 뭐냐면 우리의 성도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고 하는 질문이 던져요. 모이는 교회로서는 힘들지만 흩어지는 교회로 지금 과연 살고 있을까? 여러분 우리는 모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많이 가졌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모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큼이나 흩어진 교회로서 살았는가에 대한 확인을 해야 돼요. 우리는 홀로 고고하게 깨끗한 척하고 사는 것을 주님은 원하시지 않아요. 나는 달라, 나는 깨끗해가 아니라 이전에는 상종도 하기 싫었던 사람에게로 가야 돼요.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의로운 사람들도 아니에요. 우리도 여전히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괜히 잘난 척 거룩한 척하면 안 돼요. 그것은 바리새인 일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고 하는 우월감을 가지면 만날 사람 없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내가 손가락질 하던 그 사람이나 나나 50보, 100보입니다. 자꾸 사람을 편 가르지 말고 성을 쌓지 말고 길을 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동떨어진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의 교회가 돼야 돼요. 교회가 담을 자꾸 싸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35:35]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담장이 없어요. 누구든지, anybody. 주님에게로 오는 것을 막지 않는 교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비가 없었어요. 주님은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어요. 어떤 제한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무엇 무엇 때문에 안 돼. 그런 게 없어요. 주님의 긍휼은 경계선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제한이 없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너무도 강력한 도전이에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전면적으로 바꾸라고 하는 메시지예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기울어져 있는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무엇인가? 나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아가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아멘. 교회는 죄인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성경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기도를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하는 이유는 더 많이 분별해 내고 악을 판결해 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죄인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해야 돼요.

[37:19]아멘. 주님은 우리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편하지만 관용하지 않아도 아니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그들과 뒤섞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7:36]그들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처럼 경계선을 넘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의 친구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친구들이 많습니까? 나는 이제 세상 친구 다 끊어 버렸어.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하고만 만나.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현대판 바리새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38:17]오늘 저는 이 말씀을 저에게도 적용하면서 굉장히 큰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시선과 관심이 어디에 기울어져 있는가? 우리끼리의 잔치. 우리만의 기쁨. 우리만의 천국이 아니라 세상 안에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하여 기꺼이 낮은 곳으로 험한 곳으로 사람들이 거부하는 사람들이 배제하고 베타하고 거부하고 매몰차게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들어가 예수의 사랑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에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 오늘 우리의 존재의 이유요. 오늘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요. 아멘. 은혜받는 이유요. 아멘. 모이는 이유요. 아멘. 그 목적을 위해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어때요, 여러분?

[39:24]이번 주간에 안 믿는 사람 친구 한번 사마보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안 믿는 사람을 만날 접촉점이 많이 없어 가지고요. 가끔 가는 미용실 머리 깎아 주는 분에게 한 번씩 만날 기회가 있는데 요즘은 또 재벌이 깎아 주는 분이 생겼어요. 예수 믿으시는 분이 집사님이.

[39:51]그마저도 차단이 됐어요. 다시 이제 그만하고 세상 속으로 많은 사람들을 안 믿는 사람들과 뒤섞이고 친구가 돼요. 소금처럼 빛처럼 녹아 들어가 예수의 사랑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여러분 어떤 젊은이는 그래요. 아 우리 직장은 예수 믿는 사람들 사장님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로 있어서 예수 믿고 너무 좋다고. 그럼 너무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더 좋은 일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 한 사람도 없는 직장. 나를 그곳에 보내셨어요. 그들을 모두 예수 믿게 하시려고 나를 선교사로 보내셨구나. 할렐루야. 할렐루야가 아멘이 별로 없지만 쉽지는 않아요. 예수 믿는 사람끼리 모이고 우리끼리 만나고 우리끼리 좋아하고 우리끼리 내게 간 같던 평화 부르고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삶이 아니에요. 가라 세상 속으로.

[41:14]내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왔노라.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왔노라. 냄새 나고 망가지고 깨어지고 세상의 한가운데 들어가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니 핍박이 오고 시련이 오고 때로는 억울하고 때로는 답답하고 그런 분들이요. 주일 날 교회 와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기도할 때 이 불이 붙는 기도를 해요.

[41:46]하나님 오늘 은혜 안 주시면 내가 이번 주 못 나갑니다. 세상 속에 못 갑니다.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길 수가 없습니다. 힘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시고 말씀 주십시오. 이게 나오는 거야. 이게 나오는 거야. 이 야성이 있는 기도가 나와.

[42:02]우리끼리 모이는데 무슨 기도가 그렇게 불탈 기도가 뭐 있어요, 여러분? 주님 너무 좋습니다. 온천탕 종교. 아 좋다. 그러다가 끝내는 인생이에요. 비난받아도 욕을 들어도 우리 주님 욕 들으시기로 작정하셨어요. 아니 저런 인간들과 함께 하다니.

[42:28]우리 제가 나온 신학교에 옛날에 한 유명한 교수님 한 분 계셨어요. 가나베 교수예요. 하비칸이라고. 이분은 미국 분이신데요. 아주 뭐 보수적 신학을 하신 교수님인데 한국에서 무슨 사회를 했냐면 신학교 가르치시고 남은 시간에는 율락 여성들하고 그 동네 가 가지고 전도하시는 거예요.

[42:54]그들과 삶을 같이 나누면서. 그러니까 항상 율락 여성 있는 그 환락가 왔다갔다 하시는 분이야. 잘못 오해하는 거죠. 저 왜 저기 덜렁거리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던.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어떻게 저런 사람들하고 요즘 돌아다니지? 욕을 들을 수가 있어요. 욕 안 먹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아니에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요. 교회의 존재의 이유예요. 거기 없으면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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