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자 지난 시간에 설교와 지금 오늘의 설교는 좀 이어집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왜 충돌이 일어나는가 잘 봐야 됩니다. 이게 우리의 신앙에 매우 중요한 요소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오늘 설교도 그렇게 뭐 확 이렇게 밝은 그런 주제는 아닌데 그러나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좀 통과를 하고 우리가 다루어져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시비를 끄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론이 있었죠. 예수님의 반론. 물론 음식을 먹기 전에 떡을 먹은 것은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은 것은 분명히 장로들의 전통, 유전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이제 이렇게 공격을 하셨어요. 그들의 열심히 열심이지만 그 안에 영적인 심각성이 있다는 것을 주님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열심은 잘못된 그릇된 열심입니다. 아 위험한 열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열심이 다 좋은 게 아닙니다. 그들은 열심히 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던 것이죠. 그것은 그 이유는 그들이 행하는 외적인 행위와 내면에 숨겨진 의도 동기와 달랐기 때문에 안과 밖이 달랐다는 거죠. 이것을 우리는 위선이라고 얘기합니다. 위선. 여러분 위선이란 자신의 재성을 교묘하게 감추는 것입니다. 이 위선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가 하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고요. 그리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모든 게 그러면 허구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30년, 40년, 50년 아무리 남 보기에 대단한 믿음을 소유한 것처럼 보여도 위선이 그 안에 있으면 다 꽝이 됩니다. 헛수고가 된다는 거죠. 근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늘 있어 왔던 일이 이 위선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지난주간에 살피 말씀했지만 너희들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물다. 말로는 다 할 수 있죠. 멋있는 말도 하고 멋있게 보일 수는 있어요. 그러나 마음은 내게서 멀다. 이렇게 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뿐만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선을 고발했습니다. 화려한 의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열심은 있었지만 그들의 종교적 위선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드리는 충실한 제사, 그 수 없는 의식, 희생의 재물을 드렸지만 그것이 나중에 하나님이 보시기는 역겨웠대요. 제발 그만 들어라. 그런 제사는 드리지 말라고 그렇게 하나님이 하셨던 것입니다. 근데 이게 위선입니다. 자 오늘 본문은 먼저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이 되는데요. 10절에 보니까 모세는 내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이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는 굉장히 강하게 강조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십계명에서도 이미 오계명에 내 부모를 공경하라. 또 그뿐만 아니라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는 돌에 맞아 죽는 일. 그런 큰 죄입니다. 자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계명을 지키는 것 같았지만 교묘하게 어겼습니다. 11절에 보니까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들어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예수님이 지금 바리새인들을 지적한 겁니다. 이 고르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렸음, 하나님께 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고르반을 부모의 부모 공경의 책임을 회피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실제로는 부모를 공경할 마음이 없었는데 고르반이 명분을 준 겁니다. 요즘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 헌금하고 나니까 부모께 부모님께 드릴 돈이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는 부모에게 할 도리를 하나님께 할 도리를 다 한 그 그것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대한 면제를 받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들로 보일 뿐만 아니라 부모도 공경한 것처럼 보이고자 했지만 교모하게 속인 거죠. 그 안에는 탐욕과 이기심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 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의 열심은 포장되어 있다는 겁니다. 위선이에요 포장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만족에 거쳤다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 잘못되면 여러분 이전보다 나아지는 게 아닙니다. 더 나빠집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명분으로, 말씀을 도구화해서 자기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전에 졌던 죄들보다 하나가 더 덧해지는 거죠. 위선의 죄까지. 종교를 빙자한 죄의 종류와 방식이 더 늘어나게 됩니다. 그게 더 월스 나빠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하다 보면 아는 게 많아져요. 말씀을 배우고 아는 것이 많은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근데 말씀을 자기식으로 이용하는 편법도 늘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몰라서 짓는 죄가 아니라 알아서 짓는 죄입니다. 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끌어당기는 거죠. 그래서 성경을 모르는 게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교묘하게 자기화시키는 거죠. 자 오늘 이 부모 공경에 관한 부분에서도 이미 그들은 신앙의 굉장히 도구가 되고 이용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게 형식주의적인 신앙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다 할 것도 하고 하나님과 공경하고 부모도 공경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하나님도 사람도 다 공경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자들. 자 오늘 이 정결함에 대한 논쟁이 이제 이어지는데 지난주간과 이 연결이 되는 말씀이죠. 15절, 16절 보니까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매우 원색적인 표현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던지시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가, 안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하는가. 안에서 들어온 것이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결함이 내면으로부터인가 외면적인 것으로부터인가 하는 것을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이거 매우 이제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요소예요. 과연 손과 그릇만 열심히 씻으면 되는가. 겉만 깨끗하면 깨끗해진 것인가. 옷만 깨끗하게 입고 다닌다고 깨끗한 사람인가. 이제 그 얘기를 하는 것이죠, 여러분. 그들은 의식을 철저히 지켰지만 거룩과 거리가 멀었다는 거. 무엇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것인가. 여러분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것에, 외형적인 것에 집중을 했다는 겁니다. 손을 씻고 그릇을 씻는 것으로 정결하게 된다고 여겼던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우리를 결코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음식은 거룩과 상관이 없다. 근데 바리새인들은 거기에 모든 것을 다 걸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치명적인 결함은 무엇입니까? 겉 모양에, 겉 모양에 겉만 깨끗했다는 거예요. 외적으로만 깨끗하는 것. 그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본질적이고 핵심을 다루십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니.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자랑스럽게 붙들고 있던 것들을 통째로 흔들어 놓으십니다.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들. 여러분 손을 씻는 이 정결함의 의식들은 구약적 요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모든 게 다 달라졌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시선을 옮기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산상수훈이나 이런 우리 예수님의 복음서를 보면 모든 초점이 외형적인 것에 내면적인 것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자, 그런데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미 마인드셋 생각에 딱 고정이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를 못해요. 왜? 외형주의, 형식주의에 이미 고착되어 있는 그들은 예수님이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 18절을 보면 제자들조차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외적인 열심에 집착해 왔기 때문에. 외적 정결 의식. 그것이 그들의 중심부에 있는 전통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요소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역시 바리새인의 길로 갈 위험성이 있습니다. 경건 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는 전혀 의미가 없는 활동들로 분주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열심들이 우리에게 없는지 오늘 매우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특히 한국 교회는 신앙적 외형주의 혹은 활동주의가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활동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정작 집중해야 할 마음은 도외시한 채 경건의 탈을 쓴 위선자로 전락할 위험성이 높다는 거. 자 오늘 주님은 의식적인 정결의 허점을 이제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19절, 20절의 말씀을 보면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 먹은 것은 그렇대요.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음식물은 깨끗하다. 물론 외적인 정결을 무시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요즘 우리가 여러분 손을 많이 씻습니다. 손을 굉장히 많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일어난 현상 중에 하나는 손을 너무 열심히 씻었어요. 저도 손을 얼마나 씻었는지 이 건조해져 가지고요. 그 핸드크림이 요즘 진짜 필요하더라고요. 막 건조해지고 끄칠끄칠해졌어. 무척이나 예민해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손을 씻는 일은 중요하죠. 특히 손으로 음식을 먹는 문화 속에서는 손 씻는 일은 위생과 건강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짜 무서운 것은 손에 묻어 있는 것이 너를 더럽게 하는 거 아니야. 진짜 더러운 게 어디 있는지 아느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것은 손으로 씻는 그 문제로 되는 게 아니라 너의 마음에 있다. 너의 인생을 치명적으로 손상을 입히고 너의 삶을 위하게 하는 것은 손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불결함에 출발한 손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모든 더러운 것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부터 흘러나온다는 거예요. 손을 씻는 의식을 치른다고 마음의 더러움이 없어지는가. 이미 마음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있는 그 더러운 것을 다루지 않고 아무리 외적인 청결을 노력한다고 해도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을 참 오래해도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왜 이렇게 변화가 안 일어나는가. 오늘 이 본문에서 답이 있어요. 마음을 다루지 않으면 외형적인 것에 아무리 열심히 내어도 소용이 없어요. 외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우선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요구하는 몇 가지 기준에 맞추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 출석 열심히 하고 양육받고 선교에도 참여하는 것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외적인 기준들을 지키는 일로 우리의 신앙을 다 자리매김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는 것과 신앙적인 활동에 익숙해져 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모습들이 그런 거죠. 겉으로는 매우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 어느 날 보면 망가져 있습니다. 무너져 내려 있습니다. 중직자이기도 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한 사람인데 영적으로는 심각하게 망가져 있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루게 하는 것은 언제나 내면입니다. 내면.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주시해야 한다는 거예요. 외적인 활동이 아니라 마음을 주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쉬지 않고 죄를 생산해 내는 거대한 공장입니다. 공장. 우리 마음이 모든 더러운 것을 쏟아내는 진원지가 마음에 있다는 거. 그게 성경이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마음 안에는 죄의 오염 지수가 계속 높아져 가고 있다는 거. 온갖 죄를 짓게 하는 원천, 원천. 여러분 마음의 정원을 방치해 놓으면 온갖 죄들이 사악의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고 번식을 합니다. 마음의 깊숙한 곳에는 죄의 독버섯이 은밀하게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우리는 마음 다루기보다 외적인 활동에 더 치우쳐 있다는 거. 그게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어요. 여러분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고 있지만 정작 그 마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사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죄를 그대로 둔 채 다른 것에 몰두하고 있는 이 모습. 바로 바리새인들의 모습이고 그 바리새인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 그게 마음이었어. 여러분 마음속에 그들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숨기고 외적인 것으로 치장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열심으로 그것을 커버하고.
[14:22]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 안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습니까?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과 마주대해야 합니다. 내가 손을 얼마나 깨끗이 하느냐, 얼마나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느냐, 얼마나 예배 의식에 참여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창고 안에 채워져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창고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 열거하십니다. 21절로 2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5:32]참 다양하죠. 여러분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것도 참 많습니다. 주님은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시죠. 마음 안에 들어 있는 이 더러운 것들이 바깥으로 흘러나온다는 거. 우리 안에 악한 생각들이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악하고요, 생각이 악하다는 거죠. 그 그 악한 그 본성, 마음 안에서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가. 예수님은 가장 먼저 오늘 본문에 보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첫 번째 뭘 얘기합니까? 음란과 그랬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음란을 다루어야 합니다. 마음의 음란은 음란은 그대로 두고 아무리 손을 열심히 씻고 의식을 치른다고 한들 예배에 수없이 참여한들 무슨 변화가 일어날 거냐는 거죠. 결혼 생활을 하고 음란한 음란히 배우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음란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배우자 앞에서는 전혀 표를 내지 않지만 그냥 그냥 말로는 당신밖에 없다고 하는데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여러분 여자분들은 주로 드라마를 보는 시간. 남자들은 드라마 잘 안 보거든요. 여자분들이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조심해야 돼요. 남자들은 드라마 대신에 뭘 봐요? 포르노그래피를 봐요. 요즘은 동영상. 음란한 음란물들. 마음속으로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여러분 오늘 이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이 마음속에 들어 있는 더러운 것들에 대한 얘기는 첫 번째 음란을 얘기하는데요. 성적인 죄에 대한 언급이 세 가지입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 음란이 나오고요, 간음이 나오고요, 음탕이 나와요. 마음속에 이 음란의 문제가 숨겨진 채로 그대로 둔 채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느냐는 거. 그 다음에 여러분 도둑질과 살인이 나옵니다. 구약의 다윗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왕이었습니다. 모든 걸 다 가졌습니다. 근데 도둑질합니다. 무슨 도둑질이요? 남의 아내를 빼앗습니다. 간음이죠. 도둑질과 간음이 붙어 있습니다. 자신의 충신이고 빼앗은 그 여자의 남편이기도 한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죄를 범합니다. 도둑질, 간음, 살인죄 다 붙어 있습니다. 죄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둑 중에 도둑입니다. 상도둑입니다. 살인자 중에 살인자였습니다. 그런 끔찍한 죄가 어디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마음에서부터 나왔습니다. 한 여인을 둔 한 여인을 품고 음란한 생각하지 않아야 될 생각을 품었던 그 마음, 그 마음 안에서 이 엄청난 끔찍한 죄들이 막 줄줄이 흩어 나오는 거. 그래 이스라엘 존경받는 왕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영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인이었습니다. 근데 추락했습니다. 어디로부터요? 마음 안에 더러운 것들이 있었다는 거. 오늘 여기 예수님은 또 뭐를 얘기합니까?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너의 탐욕. 그렇게 모든 것을 가지고도 더 가지고 싶은 마음. 왜 세상이 이렇게 전쟁터 같습니까? 마음의 탐욕 때문입니다. 왜 불행합니까? 못 가졌습니까? 아닙니다. 탐욕 때문입니다. 주식 투자를 시작할 때는 가볍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커집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부추깁니다. 친구들로부터 한순간에 얼마 벌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갑자기 내면 안에 있는 이 탐욕이 발동을 합니다.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탐욕은 점점 커집니다. 그리고 그 탐욕이 나를 집어삼켜 버립니다. 악독이 나옵니다.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사건들은 여러분 이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이 살짝 드러난 것뿐입니다. 가까운 사람도 죽이잖아요. 어린아이를 자기 배에서 난 아이를 죽이기도 하잖아요. 이게 악독입니다. 질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남 잘 되는 거 못 봅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에 대해서 칭찬하지 못합니다.
[20:04]목회자도 비슷해요. 저보다 설교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은근히 디스하고.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을 보면 괜히 우울해지는 이유. 질투예요. 여러분, 여자가 질투를 많이 할까요? 남자가 질투를 많이 할까요?
[20:27]남자분들은 여자분들 질투가 많다 그래요.
[20:33]제가 보니까요. 똑같아요. 인간의 내면에 질투가 있습니다. 사랑방에서도 누가 남편을 자랑하거나 자식을 자랑하면 눈을 감습니다. 듣기 싫다는 얘기입니다. 안 그럼 화장실로 갑자기 갑니다. 시기와 질투.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이 불행한 불행이 아니죠. 상대가 많이 가진 것 때문에 불행해 하는 사람들. 우리 마음이 매일 그런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비방이 나오죠, 여러분 비방. 요즘 사람들 보세요,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실수나 말 한마디도 걸고 넘어집니다. 고소, 고발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무합니다. 남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와 죄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영락없이 바리새인의 모습을 닮아 있어. 비방과 교만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의 결점을 보는 눈이 발달해 있습니다. 남을 잘 판단한 사람들 보십시오. 틀림없이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교만은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죠. 자신에 대해서는 과장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축소하는 성향이 교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보다 세리들과 다르다는 것으로 우쭐해 하는 이 우울 의식. 마지막으로 우매함을, 우매함을 주님이 다루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우매함이 있어요. 이 우매함은 어리석음을 얘기하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 안에 이 어리석음. 참 어리석도다. 깨달음이 전혀 없는 마음에 황폐한 상태, 우둔한 상태. 오늘 주님은 이 우리의 마음 안에 이 더러운 것들이 있다는 거예요. 더러운 것들이. 가장 악취가 나는 진원지. 예레미야 17장 9절이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22:46]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성도 여러분 이 요즘 음식물 찌꺼기 이런 며칠 놔두면 막 취가 나죠. 근데 오늘 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본다면 그 악취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악취는 그것을 훨씬 더 능가하는 가장 최악의 부패한 상태. 바리새인들이 이걸 놓친 것이죠. 바리새인들의 심각한 착각은 몇 가지 의식을 열심히 지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 뿌리는 전혀 손대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잎사귀만 바라보고 있는. 여러분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느냐, 얼마나 많은 공적을 세웠는가, 얼마나 많은 큰 역사를 참여했는가, 얼마나 큰 교회를 목회했느냐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그런 것에 감동받지 않으셨어요.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치중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코로나 팬데믹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죄의 심각성. 그리스도인이 바라봐야 될 관점이죠. 손을 씻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 어디를 정결하게 해야 되는가. 손과 잔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파일러서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죄. 이 더러운 죄가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인류를 사망의 길로 치닫게 하는가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돼요. 코로나 팬데믹보다 인류에게 치명적인 죄는 우리의 내면에 있는 죄.
[24:34]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던 것이죠.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죠? 겉 모양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겉을 꾸미는 일에 몰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너무 의식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강박 관념에 빠져 있어요. 다 사람,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많이 의식하고 자기의 수준과 자기의 상태보다 훨씬 더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 그래서 어떤 데는 도덕적 결벽주의적인 현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는 죄가 그를 갉아먹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많이 의식하는 거. 이게 문제예요. 참 목회자 이런 설교는 정말 저 자신에게는 뭐 두려운 설교예요. 목회자에게 찾아오는 욕입니다.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받을 때 자기 자신을 괜찮은 목사 인 것 처럼. 무엇인가 특별히 보이려고 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연약한 모습은 가능한 잘 감추고 멋있게 보이려고 욕하는 유혹을 받아야 돼. 그래서 우리는 내면적인 것보다 표면적인 것을 더 우선시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이 외적인 것에 다 집중돼 있어요. 교회 안에서도 몇 가지 조건에 충족되면 직분을 주잖아요. 대체적으로 기준이 외적인 조건들입니다.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러분 열심히 활동을 하는 것은 좋지만 허점이 있어요. 사람의 눈에 들도록 하는 건 쉽다는 얘기예요. 그런 기준은 일시적인 것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결국은 직분을 받고 나면 돌변하죠.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문제이긴 하지만 그 직분을 준 교회의 잘못도 더 큰 것입니다. 표면적인 것만 보고 속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여지지 않는 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면에 숨겨진 것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는 것은 소홀히 귀중히 여기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소홀히 할 가능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것. 이게 영성입니다. 내가 얼마나 멋진 말들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야.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항상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드러난 것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나와 보여진 나의 갭이 커져가면 위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겉으로는 모범적인 가장이고 교회에서도 칭찬받는 사람인데 불미한 사건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기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겉만 보고는 알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인데 의외의 사고를 내고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게 하는 일들. 평신도에게서도 있고 목회자들에게도 일어나는 오늘날의 현상.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일들. 유창하게 기도는 잘 하고 기도의 열심히 참여하지만 영적으로는 심각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도적 교회 안에 규격화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양한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지만 자기 기만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다 그 일을 하고 있을 때마다 그 일을 할 때마다 내 내면의 동기를 묻고 또 묻고 또 물어야 돼. 열심히 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원하는 내적인 욕구가 있다면 위선의 길로 걷게 될 위험성이 높습니다. 죄는 주로 고도로 은폐되어 있고 외적인 선행은 포장되기가 쉽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의 타락은 은밀하게 서서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사건, 사고들, 법정에까지 가서 치열하게 싸우는 사건들의 첫 발원지는 어디에 있나요? 마음 아닙니까?
[29:04]우리는 여전히 타락한 본성에 지배 아래 있습니다. 겉으로는 온갖 칭송을 다 받고 있다 할지라도 속에는 도무지 역학이 그지없는 악을 품고 있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그 모습을 주님이 보신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뭐라고 말씀하시죠? 회칠한 무덤들아 그랬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고 종교의 실태가 될 수 있다. 여러분 교회가 지속적으로 영혼에 관련된 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교회는 세속의 한가운데 들어갈 위험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목회자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목회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 자칫하면 외식자를 양산해 내는 공동체로 전락할 수도 있어.
[30:03]정말 진실한 신자들의 공동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외식자를 만들어낼 것인가. 목사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신자들이 되게 하면 위선자들이 우글거릴 가능성이 있어. 그러므로 기능적인 것보다 인격적인 것에 집중하고 외적 열광보다 내적인 경건을 사람보다 하나님에게 집중하도록 목회자는 도와야 한다는 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내면에 숨겨진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뿌리 부분을 다루어야 돼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을 다루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예레미야 17장 10절에 이런 말씀하죠.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패부를 시험하고 각 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그랬어요. 우리의 행위를 사람에게는 숨기는 게 쉬워요.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거.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어.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작은 악한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어. 우리의 작은 생각까지도 우리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거. 로마서 8장 5절로 7절의 말씀 유명한 말씀이죠.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성도 여러분 이 생각의 한 조각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는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 되고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거예요. 성경의 관점을 우리는 염두에 두니다.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 건가. 우리 마음 안에 생각의 한 조각마저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내면에 내면을 어떻게 들여다보고 있느냐는 거. 내 안에 시작된 작은 죄의 징조, 징조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는 거. 그것이 내 인생을 집어삼키고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적 정결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껍데기가 아닙니다. 외적 열심이 아닙니다. 어떤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라는 거.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왜 새 것이 되었다고 얘기합니까? 예수를 믿었다고 뭔가 바뀌었습니까? 바뀌지 않았습니까? 겉은 똑같아요. 새 것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 안에 일어난 변화를 말합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우리의 관심은 겉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뀌어야 돼요. 우리 마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오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는 우리 마음. 우리 마음에 욕망이 일어날 때 그 욕망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벗어나 버려요. 언제나 우리는 우리 마음의 중심에 십자가가 와야 돼요.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돼야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이 날마다 일어날 때 내가 사람들에게서 화려해 보이고 사람들에게서 칭송받고자 하는 그 욕망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핵심이 뭐냐?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일치될 때, 겉과 속이 일치될 때 우리 안에 평안이 오고, 기쁨이 오고, 자유가 오고, 만족이 오는 거예요. 로마서 7장 19절에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죠.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여러분 이게 모습이 뭡니까? 오라 공고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내가 원하는 것은 선인데 악을 행하는 나의 이 모순, 이 갈등, 그 번민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죠. 이전의 모습이죠. 여러분 겉으로 드러난 내 행동과 내면의 마음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으면 갈등하고 괴로워하게 될 거다. 마음의 평안이 없어. 근데 그것이 통합될 때 갈등이 사라지고 자유가 오는 거예요. 여러분 위선자는 평안이 없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늘 누군가를 의식하고 어떤 행동 하나하나에도 부자연스럽고 뭔가 자기를 꾸미고 가식이 있고 너무너무 불편한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동이 일치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정말 선한 생각을 한다면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이 통합. 이 속사람을 우리가 날마다 바라봐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배 의식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다 하는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거. 남을 돕는 구제에 참여하는 것도 좋지만 정말 진실한 사랑으로 하는 거. 자신이 하는 일보다 멋있게 보이고자 꾸미려고 하지 말라는 거. 연기를 하지 말라는 거, 여러분.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지. 척하는 것을 버려라는 거예요. 무늬만 그리스도인. 겉만 화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되고 무엇을 하든지 진심을 담아 행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을 거부해야 합니다. 과분한 칭찬이 있을 때는 과감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혹시 누가 나를 비방하면 화부터 내지 말고요. 그 사람이 비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내 내면에 악이 있는가를 살펴봐야 돼요. 사람들로부터 이목을 집중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평판에 끌려다니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중에 허무해집니다. 내, 나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누군가의 시선, 누군가의 평판에 의해서 내 인생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인생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담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담는 것은 외형이 아닙니다. 그분의 인격입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죠. 시편 51편 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랬어요. 너무 멋있는 기도예요. 밧세바 사건으로 일어난 그의 범죄 이후에 나단 선지자의 고발로 회개하며 그가 지었던 시안이겠습니까?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시오. 깨끗한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맑아져 가고 투명해져 가기를 바랍니다. 포장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벗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가장 결정적인 죄는 자기 기만이에요. 자기를 속이는 거예요. 여러분 도, 오늘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위선에서 돌이키라는 거.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위선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돼. 우리가 위선에서 돌이킬 때 하나님을 우리가 진실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걸 하나님이 받으시고요. 그 그 위선을 벗길 때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실이 일치를 이룰 때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줄로 믿습니다.
[39:00]아멘. 지금까지 나의 신앙의 길을 다시 한번 돌아보시고 껍데기 신앙. 겉만 꾸미고 겉만 화려했던 우리 신앙의 패턴들을 돌아놓고 외형적 활동주의의 신앙의 위험성을 우리가 인식하고 이제 내 마음을 날마다 돌아보고 내 마음 안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이 죄의 충돌들. 이 더러운 생각들.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루고 진실한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죄된 마음들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청산하고 제거하여 우리 안에 정직하고 새로운 영으로 충만하여 우리가 이웃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고 우리의 열심을 다 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아멘. 오늘도 우리가 마음을 집중합시다. 중심을 날마다 바라보시고 내 안에 작은 죄라도, 작은 나쁜 생각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다룰 줄 아는 그 열심이 외적 열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른 믿음 생활, 중심이 잡힌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