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초점이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초점이 흐려져요. 초점이 흐려지면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쏟게 되죠. 사실 뭐 신앙생활이나 또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점을 잘 맞추는 거 렌즈를 아주 맞추는 작업. 초점이 흐려지면 이 분산되잖아요, 에너지가. 우리의 삶은 제한돼 있는데 어 제한된 유한한 인생에 우리 초점을 잘 맞추고 그 본질에 집중하는 거.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어 로마 교회 안에 지난주에 이어서 로마 교회 안에는 바울이 그 형편을 볼 때 로마 교회 안에는 그 먹는 문제 때문에 이견이 생긴 거죠. 먹는 사람들은 먹지 않는 사람을 판단하는 거죠. 왜 그런 걸 먹냐? 부정한 음식을 왜 먹냐? 판단하는 거죠. 또 먹는 사람들은 그것도 못 먹냐? 없어서 못 먹지 다 먹지 먹으면 되지 그거 가지고 그렇게 부정하다고 야단이냐 율법 아래 아직도 매여 있느냐 복음 안에 왔으면 다 자유해야지. 사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배경 안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차이가 있는 거죠. 이 갈등은 언제나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갈등이 일어나면 갈등을 너무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당연한 겁니다, 여러분. 예 부부끼리도 갈등 당연한 겁니다. 죽을 때까지 그 갈등 안 끝납니다. 갈등 안고 사시는 거죠, 사실은. 그러나 이 갈등이 분열을 일으키는 이제 좋지 않은 모습으로 나아갈 때가 많은데 이 여기 여기서 바울이 얘기하려는 것은 그런 것 안에 내면에 숨어 있는 것이 동기가 뭐냐는 거죠. 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 안에는 은근히 자기들 안에는 뭐가 있느냐면 내가 너보다 낫다는 거잖아요. 이게 신앙의 엽길로 빠지는 겁니다. 그 우리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기도 열심히 하다가 주님을 더 깊이 만나고 또 주님을 닮아가는 이것으로 가야 되는데 기도를 많이 하다가 보니까 안 하는 사람들이 자꾸 눈에 띄는 거예요. 아, 기도도 안 하고 예수 믿냐? 그 기도 안 하는 사람을 판단하는 쪽으로 간단 말이죠. 또 기도 안 하는 사람들이 판단받은 사람들은 또 내가 기도를 못 하는구나 내가 기도 열심히 해야지 이쪽으로 안 가고 너 잘났다. 뜻으로 이제 판단하고 이제 무시하고 이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 이 신앙의 본말이 전도되는 거죠. 우리가 가야 될 목표가 아니고 다른 쪽으로 빠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바울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붙들려야 될 신앙의 그 초점을 다시 한번 이렇게 카메라를 맞추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각자 자신을 살피라는 겁니다. 자신을 살피라. 10절에 네가 어찌하여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 여기느냐. 지난 주일 본문하고 같은 거에요, 사실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고기를 먹든 먹지 않든 그런 문제로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3:12]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피라.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10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12절에 이로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짓고 하리라. 다른 사람의 일로 서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각 사람이 자기 일로 자기의 일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심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언젠가 다 심판하실 거예요. 내가 이렇게 심판한다고 그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이 중요한 거죠.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힘쓰라는 거죠. 그래서 신앙생활에 늘 초점의 일이 우선순위는 자신의 영혼이에요. 자신의 영혼. 다른 사람의 일에 늘 창견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그러다가 정작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보면 자꾸 남의 신앙을 가지고 왈가 왈부 할 때가 많아요. 예 사실 이 공동체 안에 떠도는 간 관계를 깨는 게 뭐냐면 자꾸 다른 사람이 얘기해요. 얘기를 들어보면 다른 사람을 자꾸 평가하는 거에요. 비난하는 거. 또 얘기할 때는 또 고상하게 얘기를 해요. 막 막 얘기하다가 기도해야지 말은 기도로 마치는데 사실은 비난해요. 그 안에는 막 서로 비난하는 얘기들로 가득차 있는 거예요. 여러분 바울은 오늘 엄중히 경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리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다른 사람의 문제로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는 거. 각자의 성적표를 가지고 개인 성적이 안 돼요. 각자의 성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 될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것을 심판받을 건가? 마태복음 12장 36절, 3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주님이 우리의 심판을 하시는데 말에 대해서 심판하시겠다는 거예요, 말. 우리가 한 말. 무익한 말. 그 무익한 말은 심판하신다는 거예요. 왜 말을 심판하신다 그래요? 말은 말이 아니잖아요, 여러분.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닮고 있는 거죠.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도 무슨 책망을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2장 34절에 보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악하기 때문에 선한 말이 안 나온다는 거예요. 말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어요. 마음에 가득한 것으로 입으로 그것을 입으로 말한다는 거. 그래서 여러분 남을 비난할 때 그 비난하는 그 마음의 상태가 건강한 상태가 아닌 거죠. 마태복음 7장 1절에서도 주님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고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으리라. 단순히 여기에 비판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그 영혼의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가. 그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약점이 뭐죠, 여러분? 자신의 상태,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3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다른 사람의 작은 거는 볼 수 있는데 자기 안에 있는 엄청난 큰 것은 전혀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비판하는 사람들의 약점인 것입니다. 이 외식하는 사람들 보십시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해요. 근데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굉장히 인색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자기들은 의롭게 여기는데 다른 사람은 이 지옥 갈 인가들이에요. 나 빼고는 다 지옥 갈 사람들이에요.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시선이 그래요.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늘 집중되어 있는 거. 다른 사람 다른 사람 내 다른 사람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거에요. 여러분 어때요? 화를 낼 때 뭐 때문에 화를 내요? 나 때문에 화를 내나요? 내 나의 나의 연약함 때문에 화를 냅니까? 다른 사람의 실수와 연약함 때문에 화를 많이 내세요? 화가 날 때 언제 화가 났어요? 예, 나 때문에 화를 줄어 잘 낸다. 손을 들어 표현해 주실. 순수하게 손을 드시는 분이 계시는데 아, 그 괜찮은 분이에요, 그러면. 나 때문에 화를 내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에요. 주로 언제 화내요? 다른 사람들 때문에 화를 낸다는 사람. 막 그냥 막 열을 내는데 그 가만히 들어보면 자기기 때문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에요. 한국 사회가 이러는데 사실은 자기는 막 그러는데 열은 토하는데 사실을 보면 자기는 운전도 안 교통도 안 지키는 거. 학생들이 뭐 대학생들이 막 어 대학 운전 투명하게 하라 투명하게 하라 투명하게 하라 막 데모 하는데 시험 칠 때는 막 커닝 열심히 하고 무슨 된 삶을 사는 거에요, 무슨 된 삶을 사는 거에요. 모순 투성이라는 거예요. 자기는 남을 비난하는데 모순을 안고 있는 자기는 여러분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뭐라고 얘기하죠? 투사라고 얘기해요, 투사라고. 투사라는 얘기를 써주죠, 여러분? 자기에게 있는 어떤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 버리는 겁니다. 이게 많은 우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투사를 많이 해요. 책임을 전가하고 책임을 회피해 버리는 거죠. 자기가 더 많은 문제가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막 비난을 쏟아 부으므로 자기는 은폐하나 자기를 숨겨 버리는 거예요. 심리학적으로 이 투사를 굉장히 우리가 많이 해요, 사실은.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사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문제로 분개할 게 아니고 자신의 문제 때문에 분개해야 돼요. 그게 정상입니다. 근데 이게 거꾸로 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볼 때 비판보다 자신을 한번 돌아볼 기회를 삼아야 합니다. 나도 저 사람의 위치에 있었으면 저 사람보다 더 했지.
[10:01]저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로 보는 거죠. 사실 우리 인간은 오십보백보에요, 여러분. 지금 굉장히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어도 내일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몰라요, 사실은. 내가 그렇게 실수 안 한 것은 오직 주의 은혜이지. 내가 잘 나서 그런 거 아니잖아요. 이 겸손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우리가 남을 나를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바라보고 시선 고정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이제 그런 삶을 살게 될 때 그 말 그 말 그 비난하고 그 다른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그 말을 하나님 심판하시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11절에도 모든 무릎이 내게 무릎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자신을 늘 살피는 사람은 사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이렇게 말을 하지 않아요. 자신의 문제를 늘 볼 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쉽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길을 걷다 보면 언제나 다가오는 도전이 뭡니까? 내 문제예요, 내 문제. 저는 목회를 하면서 늘 제가 우리 교육자들하고 나누는 얘기가 그거예요. 목회를 해보니까 교인 문제는 하나도 없고 남 문제밖에 없어. 예, 전 문제밖에 없어.
[11:33]사실 설교를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돌보는 일보다는 제 영혼을 돌보는 거에요. 이 설교자가 가지는 최고의 해택은 뭐냐면 이 설교를 설교자 자신에게 하는 거에요. 예, 내 영혼이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 영혼이 기름지고 살찌워져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섬길 수가 있는 거잖아요. 사실 설교한다는 건 굉장히 큰 도전이에요. 이 많은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고 하면 이게 보통 도전이 아니에요. 고 맥도날드 목사님이 얘기한 것처럼 설교는 영혼의 설교자의 영혼의 디스플레이 전시한다 전시한다. 전시장에 쇼윈도에 딱 전시해 놓는 것처럼 목회자 자신의 영혼을 전시하는 게 설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40분 정도 설교하는 동안에 제 영혼이 노출되고 있는 거예요, 끊임없이. 숨길 수 없는 이 만인 앞에서 서서 할 때 제 영혼을 돌아보지 않고 이 설교단에서 설교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에요. 목회를 하면서 늘 도전은 제 자신을 돌보는 거에요. 목양의 일번지가 어디냐? 목사 자신의 영혼.
[12:47]여러분 우리 자신이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거에요. 저 한국 교회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는데 주께서 저에게 주시는 말씀은 너나 잘 해. 한 목사가 한 교회에 목양을 할 때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잘 섬기는 거예요. 한국 교회가 잘 되려고 하면 우리 수영로 교회만 잘하면 될 줄로 믿습니다. 뭐 남 교회 걱정 다 할 필요 없고요. 뭐 그 교회 이 교회 얘기할 거 없고 우리 교회만 잘 하면 돼. 근데 우리 교회가 누구예요, 여러분?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수영로 교회만 잘 하면 돼, 그런데 내가 빠지면 안 되잖아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거에요. 뭐 한국 교회에 열을 막 낼 필요도 없어요.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을 돌보는 거에요.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이 부실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내 안에 믿음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은 관전평은 너무 잘 해요. 축구 경기할 때 보면 TV를 우리가 볼 때 월드컵 뭐 이런 거 볼 때 우리가 앉아서 볼 때 이 한 마디씩 하는 거 보면 대단해요, 보면. 아, 저 때는 안 저게 안 되는데. 본인 보고 뛰어 보라고 그러면 안 돼요. 신발하고 그냥 공하고 같이 날라가요. 관전평이 내 실력이 아니잖아요, 여러분. 평가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평가를 잘 한다고 내 신앙이 좋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연약함 때문에 시험 들 이유가 없어요. 사실은 내가 내 나에게 시험 들어와야 돼요. 많은 사람들은 나 어떤 사람들 때문에 시험 든다고 얘기하는데 자기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시험을 얼마나 주고 있는지는 망각하고 있잖아. 사실 여러분 내가 남에게 시험 들 때도 있지만 내 모습 때문에 시험 든 사람 한두 명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이죠.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자신의 연약함을 들여다보는 거.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보다 그 연약함을 바라보며 기도해주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연약과 실수를 볼 때마다 나를 한번 더 쳐스스로고 나의 연약함을 바라볼 줄 아는 기회로 삼는 거.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선다고 생각하면 오늘 이 바울의 의미 속에는 말씀의 의미 속에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가난한 관대하게 대해주라는 거에요. 비판하기보다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떤 말을 할 것 같아요? 하나님 좀 봐주세요. 아마 그렇게 할 것 같아요. 하나님 내가 뭐 대단하게 제대로 잘 살았습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막 왕백장 내드릴 사람은 없을 거 같아요. 우리 다 하나님 앞에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 좀 봐주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딱 하신 말씀이 뭔지 아시게겠습니까, 여러분? 너도 남 좀 봐줬냐? 예, 너도 남 좀 봐줬냐? 너도 남에게 긍휼을 베풀어 줬냐? 긍휼을 베푼 자에게 내가 긍휼을 베푼다. 여러분 가능한 남에게는 관대하게 대하고 나에 대해서는 좀 더 엄격한 잣대를 대고 신앙생활을 하심으로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는 신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의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이냐? 오늘 8절에 보니까 우리의 삶의 초점이 아주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어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아주 멋있는 말씀이에요. 의미 심장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 심장한 말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얼마나 삶의 초점이 정확하게 맞춰져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왜 삽니까? 대명제죠. 여기에 대한 뚜렷한 답을 얻지 못하면 인생은 방황하게 됩니다.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을 건가? 저는 이 질문에 빨리 답을 얻는 인생이 복되다고 믿어요. 죽는 문제, 사는 문제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붙어 있어요. 어떤 분은 사는 것도 힘든데 죽는 걸 어떻게 생각하냐? 죽음 이런 거 생각할 틈도 없고 내가 지금 바쁘고 살기 위해서 바쁘고 공자도 그런 말을 했어요. 사는 것도 모르겠는데 죽는 걸 어떻게 아냐? 공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근데 여러분 아니에요.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삶의 문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가 분명해지면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동적으로 답이 나와요. 삶과 죽음이 너무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어요. 여러분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를 답을 얻지 못하면 삶은 미로에 빠져 있는 겁니다. 그냥 살기 위해서 사는 거 얼마나 힘든 거예요, 그게. 왜 사람들이 허무한 곳에 에너지를 쏟고 헛된 곳에 에너지를 낭비합니까? 죽음에 대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삶의 파워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를 가의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을 때. 멋진 인생을 사신 분들 보십시오. 예외가 없어요. 모두가 생명을 바칠 만한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에요. 보십시오. 누구든지 그래요. 생명을 바칠 만한 것을 발견한 인생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은혜를 받고 말씀을 듣고 깨달을 이 경험할 때 그 은혜 중에 은혜가 뭐냐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전율이 흐르듯 그 말씀이 내 가슴에 폐부를 찌르며 그래 이것을 위해서 살아야 돼. 이것을 위해서 내 삶을 바쳐야 돼. 이게 오는 날 그 날이 내 인생이 바뀌는 날이에요. 그 날이 BC와 AD를 가르는 역사의 분기점이 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찾아올 때 여러분 그 복음이 주는 은혜가 뭐냐면 그 복음을 경험할 때 눈을 뜨는 거예요. 이제는 내 삶이 어디에 바쳐져야 될 것인지 어디에 내 재물이 내 삶을 재물로 바쳐야 될 것인지 딱 한 번 밖에 없는 생명을 어디에 바쳐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게 복음의 은혜잖아요. 여러분 근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은 뭘까요? 전부 다 죽는 걸 두려워하잖아요. 왜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죽음을 절망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은 끝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절망이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심판이 저주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삶의 질이 달라지죠. 여러분 죽음의 두려움을 이긴 사람에게는 삶의 쾌력이 나옵니다, 쾌력이. 그렇잖아요, 여러분. 죽음을 죽음의 힘을 권세를 이기면요 다른 문제는 다 지나갑니다. 죽음보다 더 큰 파워가 어디 있습니까? 죽음보다 더 큰 그 에너지가 어디 있어요, 여러분? 그걸 이겨내면 다른 건 다 통과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허덕이고 있어요. 세상의 사람들은 살아있기는 하지만 죽음의 힘이 더 커져요. 그래서 늘 죽음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거예요. 죽는 게 두려운 거예요.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신자는 달라요, 여러분. 죽음의 문제를 뛰어넘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이 우리의 삶의 저주가 아니고 죽음이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니고 죽음은 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세계로 진입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죽는 게 두렵지 않고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생명을 바쳐야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 여러분 죽음의 힘을 넘어 서고 나면 서고 나면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어요. 죽음을 이긴 자의 생명은 너무도 기중한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얻을 때 우리의 최고의 축복이 뭡니까? 이제 그 사망의 권세 아래 짓눌려 있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를 이겨낸 참된 생명, 영생의 생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그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알게 되는 거예요. 그냥 헛되게 그냥 별별로 없는 삶으로 인생을 살다가 끝나는 게 아니라 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양의 그 생명을 바치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귀중한 거를 알기 때문에 헛된 곳에 이 생명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 죽음의 문제를 뛰어넘고 나면 생명의 위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생명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이 생명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는 거예요. 얼마나 귀중한 생명 아무 곳에나 바칠 수가 없다. 이 생명이 너무나도 기중하기 때문에 이 생명의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헌신할 때 내 생명은 정말 멋진 인생이 되는 거라. 그렇잖아요, 여러분. 값을 매길 때 어떤 게 더 가치 있는가 그걸 비교하잖아요. 이것보다 이게 낫다고 그러면 이것을 위해서 이게 희생될 수 있는 거잖아요. 왜? 이게 더 높은 가치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너무나도 존귀한 가치 있는 존재기 때문에 절대 아무 헛된 곳에나 우리 생명을 바치면 안 돼. 돈을 위해서 바쳐서 안 되고 명예를 위해서 다 사라져 버리고 말 것들을 위해서 내 유한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위해서 내 생명을 바칠 수 없단 말이야. 왜? 우리의 생명은 너무도 귀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실 만큼 우리의 생명은 너무도 귀중한 존재기 때문에.
[22:54]우리의 생명을 주신 주님을 위해 우리 생명을 드린다면 그것보다 존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바치면 우리의 생명은 낭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귀한 낭비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 신자들에게 있는 특별한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다 주를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어떤 생생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어떤 업적주의가 아니고 단지 주를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 자신이 드러내는 게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거.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수영로 교회도 우리 교회를 드러내는 게 아니에요. 우리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할 때 그 가치가 발생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내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게 아니고 내 교회만, 내 가정만, 내 남편만, 내 자식만을 위해서 살면 거기에 만족도가 낮아요.
[24:22]어떤 성도는 주일 아침에 남편만 교회에 데리고 오면 신앙 생활 다 한 줄 알아요. 남편 끌고 오다가 남편 구원 시키다가는 그 인생 망쳐 버려요. 자, 남편을 끌고 오는 것은 주님이 주신 비전 때문에 끌고 오다가 결국은 내가 남편에 매이고 남편에게 내 모든 에너지 다 쏟아 버리고 남편 바라보다가는 남편도 못 살려요. 남편도 못 살리고 나는 죽는 거예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한 것이에요. 남편을 끌고 올 때 우리는 내 영혼의 관점으로 내가 주님을 닮아가고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남편을 섬기는 거에요. 나를 위해서 남편을 끌고 오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그러니까 이 루산이라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뭐냐면 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내 남편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내 자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것.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뭡니까?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25:27]우리가 살든 죽든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가 죽어도 살아도 주의 것이로다. 이 아름다운 복음의 메시지를 품고 있는 우리의 삶은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것을 고귀한 낭비라고 부를 수 있는 거죠.
[25:54]여러분 우리 각자의 삶은 우리의 가치로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의 생명은 너무나도 귀한 거예요. 돈으로 매길 수가 없어요.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