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mbnail for | 다시보는 BEST 설교 | 사랑은 여기 있으니 | 수영로교회_이규현목사 | 요한일서 4:7~10 | by CTS BEST 설교

| 다시보는 BEST 설교 | 사랑은 여기 있으니 | 수영로교회_이규현목사 | 요한일서 4:7~10 |

CTS BEST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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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외국에 이렇게 살다 보면 이렇게 한국에서 친인척들 많이 방문도 하시고 그러죠. 친구들 놀러오잖아요. 여러분 친한 친구가 왔을 때 어떻게 반갑잖아요. 그래서 뭐 관광도 시켜주고 같이 집에서 뭐 그냥 머물면서 옛날에 회포를 풀고 즐거운 시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한국에 온 서 온 절친 친구가 너무 오래 있으면 좀 문제가 생깁니다. 적당한데 지내고 가야 되는데 죽치고 어 집에 한국으로 안 가고 한 달 뭐 이렇게 있고 또 뭐 갈 것 같은데 안 가고 뭐 한 몇 달 더 있으면 안 되냐고 그러고 이 왕 뭐라 그러죠? 가 되면은 이 부부끼리도 굉장히 긴장감이 생깁니다. 저 친구 왜 안 가 뭐 그러고 이제 막 싸움이 부부 싸움이 돼요. 뭐 그래도 친구를 뭐 박대할 수는 없고 있을 때까지는 잘해줘야 되니까 옛날에 정을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섬기는데 문제는 어느 날 이 친구가 병이 나 버렸어. 병원에 갔는데 의료 보험도 안 되고 생 돈이 나가야 돼. 근데 긴급한 일이 생겼는데 신장에 문제가 생겨서 빨리 지금 긴급하게 이식을 안 하면 죽을 수도 있다. 친구와 극히 죽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는데 이식을 시켜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데 이렇게 뭐 어쩌다가 보니까 딱 맞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 집에 하나밖에 없는 딸이 딱 맞다는 거예요. 이 빈대가 빨리 갔어야 되는데 안 가고 이제는 딸 심장까지 가져갈 판이 됐어요. 근데 문제는 의사의 진단이 자칫하면 신장 이식을 할 때 딸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사인하겠느냐는. 자 이 정도 되면 그 친구를 위해서 내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의 신장을 떼 줄 수 있다 손 들어 보세요. 어 방금 가려워서 들어온 거예요 아니면 진짜 들어온 거예요. 아 머리가 가려워서 이렇게 없어요 없어. 자기 하나밖에 없는 딸의 생명을 담보하고 그 친구를 위해서 신장을 떼 줄 수 있다 없어요. 여러분 이 세상의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예요. 다 친하고 좋고 뭐 둘도 없는 친구야 우리는 막 정말 뭐 너무너무 그러는데 안으로 싹 깊이 들어가 보면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사랑은 다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 요한이 오늘 요한일서 4장에서 이 요한이 누구냐면 사랑의 사도잖아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고 또 주님이 사랑을 줬던 제자였어. 그래서 십자가상에서도 유일하게 요한에게 내 어머니를 맡기잖아요 예수님이. 그 사랑을 많이 경험했던 이 어 요한이 주님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쓰는 거죠. 오늘 이 10절에 그런 말씀이 사랑은 여기 있으니 그랬어요. 사랑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지금 그 사랑을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 있다, 여기 있다. 그 말은 다른 곳에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참 사랑은 여기 있다. 그러면서 오늘 7절에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8절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10절에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여러분 사랑이라고 다 같은 사랑이 아니에요. 우리말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한 단어만 있지만 신약을 기록한 헬라어로 보면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예요.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이 사랑은 아가페 사랑.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었던 아가페 사랑 에로스나 필레오나 스톨게나 이런 사랑과 다른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이 오늘 여기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랑은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하고 특별한 사랑인데 그 사랑이 어떻다고 말하죠? 오늘 9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그랬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고 관념적이지 않다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모두가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나타난 바 된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라고요?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그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사랑은 모호하지 않다는 거예요. 애매모호한 그런 사랑이 아니라 너무도 구체적으로 리얼리티 우리가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그런 사랑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 그런 말씀을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6:17]여러분 여기에서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라고 하는 표현을 썼어요. 이 표현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면 아들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여러분. 근데 그 아껴야 될 아들을 아끼지 않았다 이 표현이잖아요. 여러분 누구나 자기가 아끼는 게 있지요. 우리 집 안에서도 여러분들 아끼는 게 많겠지만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것은 뭘까요? 가족 아니겠어요. 가족 가운데서도 우리 자녀 아니겠어요? 자녀. 자녀를 안 아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식이요 열 명이 돼도요 누구 한 사람 누구에게 주려고 하면 줄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아 여러 명인데 하나 가져가세요? 근데 오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아끼는 거 자식이에요. 근데 바울의 표현은 뭡니까? 그 자식을 하나님이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고 표현해요. 창세기 22장을 보면 비정한 아버지의 얘기가 나오죠. 사실은 비정한 아버지가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얘기죠. 아브라함이 100세에 난 아들을 모리아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제단에 제물로 바치는 얘기입니다. 그 얘기는 우리가 신자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에요. 하나님께서 청천 벽력 같은 명령을 내리시는 거죠. 그 100세에 난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을 갑자기 잘 자라고 있는 소년으로 우뚝 쓴 그 예쁜 사랑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그 아들을 제단에 불로 태워 번제로 드리라는. 창세기 22장을 보면요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순종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 번지할 나무 단을 만들고 아들과 함께 나귀를 타고 사흘 길을 걸어가는 그래서 모리아에 오르고 모리아에 올라서 그 아들을 묶고 칼을 내리치는 그 장면을 그냥 서술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그 안에 내면에 그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 모리아로 올라가는 과정 속에서 아버지가 겪고 있는 아픔과 내면적 고통과 그 그 깊은 고뇌는 성경에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아요. 이건 독자들에게 맡긴 거죠. 아브라함의 그 마음의 심장의 고통이 무엇이 어떤 것인가는 독자 읽는 독자들이에게 맡긴 거예요.

[9:32]근데 여러분 이건 표현하지 않아도 그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는 능히 알 수가 있죠. 얼마나 고통했어. 올라갈 때는 그러잖아요 아버지 본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속으로 너다. 말해 줄 수 없는 그 고통하는 아버지, 고뇌하는 아버지. 그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차라리 내가 죽고 싶은 그 아버지의 고통과 절망과 고뇌에는 그 감정은 다루고 있지 않아요. 그러나 여러분 사실 그건 표현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된 사람들은 다 알잖아요. 사랑이 뭡니까, 여러분? 사랑은 고통하는 거잖아요. 내가 사랑한 만큼 고통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고통하지 않았다면 사랑하지 않은 걸 거예요. 아브라함은 고통하며 모리아로 올라간 것이죠. 자 그런데 칼로 내리치려고 하는데 이 아들의 태도가 참 놀랍죠. 가만히 있는 거예요. 반항을 해야 되잖아요 반항 반항을 하면 이게 좀 더 나은데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의 처분에 자기 몸을 맡기고 있는 순종하는 아들 이삭의 모습이에요. 이게 더 기가 막힌 거예요. 사실 이 장면 쯤에서는 아들이 티네이저기 때문에 늙은 아버지보다 힘이 세서 벌떡 일어나 아버지 미쳤어요 하고 막 이렇게 꺾고 이러면 아버지가 못 이겨치하면서 어 하나님 내가 바치려고 했는데 아들의 힘에 밀려서 안 되겠네요 이러고 불쌍 뭐 설명할 수도 있는 건데 그냥 순순히 맷 그냥 묶이고 죽음 앞에 저항하지 않는 아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연상 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거죠. 이사의 예언이에요. 이사야 53장에 예언이 생각나는 거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미 750여 년 전에 이사의 예언 속에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에 묵묵히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은 것으로 비유한 것이죠. 오늘 모리아에 번제단에 누워 있는 이삭의 모습을 우리가 상상하게 됩니다. 여러분 아들을 모리아로 데려가는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은 갈보리 언덕 십자가의 아들을 죽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 아버지와 오버랩 되는 것입니다. 겹쳐지는 것이죠. 영화라고 하면 기가 막히게 절묘하게 그 아브라함의 고통하는 그 모습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을 매다시는 그 고통하는 모습과 이렇게 겹쳐지게 만들었을 거예요. 세월이 오래 세월이 지난 후에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소리를 치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삭은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모리아로 오르던 아브라함의 고통과 절규는 아들을 십자가에 죽인 아버지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느 날 깨달았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라고 하는 이 대목 속에 아마 바울은 가슴을 뛰는 무엇을 느꼈을 거예요. 하나님이 그냥 여럿 아들이 있으니까 아니 신이기 때문에 무통하는 고통과 통증을 느끼지 않고 그냥 내어주신 그냥 죽게 하신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모리아로 올 때 그 고뇌하며 고통했던 그 아버지의 그 마음을 우리는 누구에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에게서 볼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 십자가 하도 많이 얘기 들으니까 이제 막 십자가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아니에요.

[13:07]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유일한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그 장면 속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겪었던 고통은 생략되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어느 날 십자가 앞에서 그 생략되어서 묻혀 버려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뭉클해요. 무너지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에 매달린 그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세요. 하나님이 누구세요, 여러분? 전능하신 분이세요 창조자세요. 그분의 아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온몸이 찢기고 물과 피를 쏟으시며 뒤틀려진 형체로 십자가의 나무에 매달려 있는 하나님이신 그분을 생각해 보세요. 이게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그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어.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무슨 분석하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 신앙을 무슨 논리로 전개해 들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어떤 분은 뭐 성경 몇 구절 뭐 이해가 안 된다고 못 믿겠다나요.

[14:41]신앙은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약간이라도 들여다보면요 그 안에 우리를 향한 그 절절한 사랑으로 인하여 당신 하나 뿐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그 그 그 사실을 우리가 깨달으면 우린 뒤집혀져요 뒤집혀져요. 저도 목사로서 목사가 되고 난 이후에 목사 되기 전 십자가의 은혜도 받았고 십자가에 대한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제가 목사가 되기로 했지만 목사가 되고 한참 후에 어느 날 갈보리 언덕 십자가 앞에서 특별히 창세기 22장을 읽다가 하나님 아버지의 어떤 분가를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 일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그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오늘날 진짜 수만 볼트의 감전된 것 같았어요.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내 지성과 논리와 내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면서 그 사랑 앞에 흠 빠지는 그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뭔가 하면 이 하나님의 사랑을 내 안에서 경험하는 그 사건이 일어날 때 비로소 우리 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요. 이 사랑은 여러분 농축 농축 농축 엑기스거든요. 이것이 한 번만 우리가 경험하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 오늘 사랑은 여기 있으니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또 이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오늘 19절에 보니까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기가 막힌 표현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게 아니에요. 사랑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 사랑을 반응한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주시고 우리에게 사랑해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기독교의 교리는 뭐냐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주신 거예요. 그게 은혜입니다. 만약에 그게 없었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종교를 두 개 주로 나누잖아요. 자력 종교와 타력 종교라는 표현을 써요. 자력 종교는 뭐냐면 자기 스스로 내 힘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애를 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종교예요. 그러니까 기독교 외 모든 종교는 자력 종교라고 보면 돼요. 기독교는 타력 종교예요. 구원에 관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전적으로 하나님이 편해서 우리를 구원의 손을 내미셔서 우리를 건져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서 간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어요.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길이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럼 오늘 얘기에도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게 얼마나 놀라운이에요. 여러분 여기에 누가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시고 손을 내밀지 않았으면 구원을 받을 자가 있겠습니까? 내가 왔다고요?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셔서 온 겁니다, 여러분. 오늘 처음 오신 분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그냥 누구에게서 끌려온 것 같지만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셔서 온 거예요. 여러분 내가 그냥 아무리 부른다고 그냥 옵니까, 여러분? 억지로 왔든 어쨌든 그게 그 안에 깊은 곳에는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서 이 자리에 온 거예요, 여러분. 물건도 아닌데 누가 딱 들여다 놓은 거 아니잖아요, 여러분?

[18:43]여러분 오늘 우리는 탕자의 문명입니다. 탕자의 문명의 특징이 뭐냐면 하나님을 끊임없이 거절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문명이.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도망가는 문화예요. 인간이 인간의 내면 속에는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하는 마음이 있는지 몰라요.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요, 여러분. 여러분 같은 친척인데도요, 같은 친군데도요, 잘 놀다가도 예수 얘기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얘기를 하면 가자. 그러네요 뭐가 있어요?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요. 누가 심어줬어요? 죄인의 본성이.

[19:26]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아요. 아주 가까이 내가 손을 조금만 내밀면 만날 수 있는 지금 이곳에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내가 공기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어요.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환경의 주변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여기에 있는 거예요. 내가 조금만 마음을 열면 하나님의 사랑은 내 가슴 속에 물밀듯 밀려오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어요. 그 먼저 사랑하셨다는 그 말씀 속에는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 우리를 삶의 상태를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어떤 상황과 어떤 상태와 어떤 조건에도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나를 사랑하시고 하는 사랑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속에서 받았던 사랑의 사랑의 관계 속에 있었지만은 언제나 사랑의 관계 속에 상처를 받았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가 조건적이었어요. 예뻐서 사랑하고 똑똑해서 사랑하고 능력이 있어서 사랑하고. 우리 IMF 때도 경험했잖아요, 여러분. 같이 살았는데 문제가 생기니까 우리의 사랑에도 문제가 생긴 거예요. 조건적이었다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가 조건적이에요. 너무도 이기적이에요. 너무도 기브앤 테이크예요. 내 마음에 들 때까지만 사랑해요. 내 마음에 드는 어떤 조건을 갖추고야 사랑한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은 우리가 아직 연약했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하나님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누구에게도 제한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어요. 딴 하나예요. 이 놀라운 그가 나를 사랑해 주신 그 사랑에 내가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프로포즈예요. 하나님의 끝없는 애타는 구애예요. 오늘도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사랑의 프로포즈를 났어요. 끊임없이 구회를 하세요. 내가 이처럼 사랑한다. 여러분 십자가 앞에 서면 무슨 말씀을 하신지 아세요? 십자가 앞에 딱 서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딱 이거예요. 이렇게 해도 너가 사랑할 수 하지 못하겠니? 이렇게 했는데도 네가 이 사랑을 거부할 거냐고 말씀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십자가 앞에서도 우리가 거부한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죄 중에 죄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죄예요. 소망이 없는 거예요.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도 우리가 그 사랑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2천 년 전 십자가는 나를 위하여 죽어주신 내가 죄인되었을 때 나를 위하여 죽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인 것입니다. 여기에 아멘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일어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그 사랑을 우리의 심령 가운데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리고 이 사랑이 우리를 넉넉하게 할 것이고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고 우리가 능력 있게 할 것이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받았던 상처와 아픔과 모든 절망과 고통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고 새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 시간 여러분들의 심령 가운데 흘러넘치시기를 바라고 이 연말에 한 분도 빠짐없이 갈보리 언덕에 하나님의 아들 그 십자가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이 파도처럼 여러분들의 심령 가운데 흘러넘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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