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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현 목사] 자리보다 역할이다 | 막 10:32-45 | CGNTV 말씀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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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오늘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예수님에게는 이 폭풍 같은 일이 닥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죠. 제자들에게 이미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고를 앞부분에서도 하셨습니다. 오늘도 33절과 34절에 예수님에게 곧 일어날 일을 십자가에 내어 줌바 되어서 고통을 당하게 되실 사건을 이제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이미 세 번째 앞부분 8장과 9장에서 두 번 말씀하셨고 오늘 10장에서도 세 번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곧 십자가가 다가온다는 얘기를 하신 거죠. 자, 이 얘기를 들었던 예수님의 최측근에 있었던 제자들의 반응이 우리가 좀 봐야 될 부분입니다. 어 35절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와 여쭈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랬습니다. 이 예수 이 이것은 이 야고보와 요한이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 지셔야 되는 이 사건에 대한 이해를 잘 못하고 있는 거죠. 그것을 다르게 해석을 한 겁니다. 유대 나라를 정치적으로 해방할 시켜 줄 메시아로 이제 때가 왔는가 보다. 자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한 자리 할 수 있을 때가 온 거 아닌가? 이렇게 정치적 메시아로 그리스도를 자꾸 생각하는 겁니다. 어 38절에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3:39]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51]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얘기하는 거예요. 근데 39절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 말끼를 계속 못 알아듣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지금 막 아무 말 잔치하는 거 같아요. 아무 말 잔치. 어 얼마 있지 않아서 예수님이 사실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의 팬 말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팬 말을 걸어놨어. 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죠. 유대인의 왕. 자, 근데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편에 누가 이렇게 매달려 있습니까? 강도들이 매달려 있어요. 상당히 이제 시사적인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오른쪽 왼쪽에 앉게 해 달라. 이 말의 의미가 얼마인지 아느냐. 매달리는 거다 같이.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진의가 드러나고 있어요. 그들은 그리스도가 당하실 구원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로서 로마를 뒤집고 뒤집어 얻고 유대 나라를 최고의 국가로 세워주기를 꿈꾸는 거죠. 이들이 바라는 것은 세상의 영광이라는 겁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힘을 갖기를 원한다. 힘. 이게 세상적인 방식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힘으로 뭘 하려고 하는 거. 세상은 힘으로 권력을 잡죠. 그러면 그 권력을 힘으로 잡으면 어떻게 되죠? 또 다른 힘이 생겨요. 힘의 역풍. 또 다른 힘에 의해서 또 그 권력을 잃어버려요. 이게 권력의 싸움인 거죠.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시는데 그것이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는 어떤 것이죠, 여러분? 힘으로 하는 게 아니고 힘을 해체하는 거예요. 힘을 내려놓는 거예요. 세속적인 힘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 제자들이 전혀 못 알아듣는 거죠. 이게 예수님의 제자들의 민낯이 지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그 가시는 길과 정 반대 길을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이죠. 서로 한 자리 하려고 탑이 되려고. 그렇죠? 우리 이 세상에서도 늘 일어나는 총선이나 대선이 일어나면 치열한 경 권력 투쟁이 막 벌어지죠. 모두가 내가 나라를 구할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개인적 야망일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에요. 세상 예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훤히 알고 계세요. 42절에 이렇게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이 이방인의 집권자는 그 당시 로마를 얘기하겠죠.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어떻게 하느냐? 그들의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자기 마음대로 주관하는 거예요.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임의로 주관한다는 말은 뭘까요? 자기 중심적으로 권력을 이용한다는 겁니다. 그런 권력의 행포에 의해서 유대 나라가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 세상을 흉내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권세자들은 사람들 위에서 굴림을 합니다. 잘못 뽑으면요, 백성이 고통을 당해요. 여러분, 여러분, 우리가 정치인들보다 힘을 가진 나라는 딱 가루예요. 투표하는 날. 선거하는 당일이에요, 당일. 그날 유일하게 우리가 그 정치인보다 위에 있어요. 근데 선거가 끝나면 모든 권세는 정치인들에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투표를 할 때 잘 해야 됩니다. 시민들의 정치 활동은 투표를 통해서 나타나야 돼요. 투표할 때, 투표할 때. 여러분, 굴림하는 리더를 뽑으면 안 됩니다. 근데 여러분 인간은 권력 지향적입니다. 이 권력 지향은 본능이에요, 본능. 꼬마들도 모이면요, 서로 이게 우두머리 되려고 그러는. 이 권력은 매력적인 것이거든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권력을 사용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죠. 그래서 이 권력의 속성이 뭐냐? 타락이에요, 타락. 그래서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 유명한 말이잖아요, 여러분. 권력이 사람을 변질시켜 버려요. 왜? 인간에게 있는 타락한 본성 때문에 그래요. 이 사람은 선거철만 되면 나라가 들썩이죠. 근데 여러분 어떤 인물을 뽑아도 나중에 보면 비섬 비스대요. 거기서 거기예요. 결국은 역사는 돌고 돌아와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 나로 바뀌는. 여러분, 힘이 주어지면 힘은 썩게 되어 있어요. 권력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데 몰두합니다. 누구나요. 마찬가지예요. 권력이 매력적이기 때문에 주변에 그 사람 그 자리를 탐하는 자들이 둘러 싸고 있습니다. 질투의 대상이 돼요. 그래서 항상 전쟁이 벌어지죠.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거셉니다. 흔들어대는 사람들도 가득해요. 근데 오늘 야고보와 요한은 세속적인 세계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 역시 권력 지향적이에요. 그들은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그동안 가르쳐 주신 것과 반대 길을 걷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이 제자들의 어머니들까지 합실을 해요.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불법 청탁입니다. 위험한 거리를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누가 권력을 가졌는지를 금방 알아차립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가까이 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누구나. 어떻게 예수님의 주변에서 마저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참 놀랍습니다. 사람들은 권력에 가까이 가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강구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얼마나 거리가 먼 행동인지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자, 41절에 보니까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그랬습니다. 별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 곳은 긴장감이 높고 암투가 부러집니다. 왜냐하면 자리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리 다툼이 벌어지면 긴장도가 높아집니다. 그리고 그 순간 관계는 깨어져 버려요. 갈등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남무하게 되죠. 하나 됨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자, 예수님은 이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43절과 44절 보니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아, 멋있는 말씀을 하셨어요. 제자도의 원리, 종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과 정 반대의 원리예요. 역설입니다. 역설. 세상과 거꾸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거예요. 제자도의 중심에는 여러분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자기 부인이에요. 자기를 포기하는 거예요. 자기를 내려놓는 거예요.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철저히 내려가는 겁니다. 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이 원리예요. 이것을 가장 오늘 이 본문에서 클라이맥스로 주신 말씀이 45절의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러분, 이것이 마가복음 전체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마가복음을 마가가 기록할 때에 기록의 의도 중에 하나가 이 구절을 설명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라고 하는 부분을 마가복음 전체에서 드러내 주는데 그 핵심이 바로 오늘 45절의 말씀입니다. 이게 보니까 인자가 온 것은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얘기해 줘요. 주님은 존재의 이유를 알고 계셨습니다. 세상에 오신 이유가 뭐냐? 그게 십자가라는 거죠. 그것을 33절과 34절에 이미 말씀을 하셨어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게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거예요. 그 섬김의 절정이 뭐냐? 십자가라는 거예요. 그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던지신 사건. 이게 오늘 45절에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의 방향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고 공생에 아니 출생부터 십자가까지 계속 가 그 길을 걸어가신 거예요. 계속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와 목적을 알고 그 방향으로 가신 거예요, 그 방향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 이게 참 중요해요.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이 본질적인 질문, 궁극적인 질문이에요. 내가 왜 살고 있지? 보통때는 이걸 잘 생각 안 해요. 바빠 가지고 먹고 살기 바빠서. 아, 그건 뭐 고상한 지금 질문 던질 때가 아니야. 그러나 여러분, 이 궁극적인 질문에 답을 갖고 있지 않으면요, 반드시 어느 순간 허무와 절망에 빠지게 돼 있어요. 여러분, 뭐 세상적으로 유명하고 잘 나고 뭐 엄청난 거부고 다 나중에 뭐예요? 길을 잃어버려요. 그러니까 허무와 절망에 빠져서 별짓을 다 해요.

[15:21]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움을 살 만한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데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절망할까? 왜 그렇게 허무에 빠질까? 부와 권력의 끝에서 방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전도서에서 우리가 알려주는 메시지 핵심이 뭡니까? 헛되고 헛된 모든 게 헛되도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분명하게 붙잡지 않으면 누구라도 끝에서 이런 절망을 맛보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인간은 저절로 툭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게 하신 이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 분명히 있는 거죠. 그리스도의 삶의 핵심은 오늘 그런 의미에서 섬김이라는 거죠. 왜 사는가? 하나님이 왜 내가 이 세상에 살게 하신가?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하시려고 하시는 게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런 직업을 주셨고 왜 이런 은사를 주셨고 왜 이런 재능을 주셨는가?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거죠. 내게 이런 궁극적인 질문을 여러분, 가볍게 여기서는 안 돼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분명하게 붙잡으면요, 삶의 중심이 잡혀요. 정확하게 방향이 잡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여러분, 서울 간다는 방향이 딱 정해진 사람은 부산역에서 방황할 이유가 없어요. 서울에 갈까, 광주로 갈까? 그게 아니에요. 서울 간다는 방향이 잡혀 있으면요 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방향은 잡혀 있기 때문에 혼란하지 않아요. 고민하지 않아요. 우리 인생의 방향과 목적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때 잡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십계명이나 주기도문을 보면 앞부분에 항상 하나님이 나와요, 하나님. 하나님 중심, 하나님 첫자리. 많은 사람들은 자기 중심이에요. 나의 행복, 나의 성취, 나의 만족, 나의 기쁨. 여러분, 그건 답이 없습니다. 어느 단계에 가면요, 실종을 해요. 실종이. 길을 잃어버려요. 여러분, 권력이 왜 위험한 것입니까?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에요. 자기 중심적으로 남을 지배해요.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는 겁니다. 그게 안 되면 폭력까지도 사용하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 중심에서 벗어나면 삶은 혼란 속에 살게 됩니다. 자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하면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오늘 예수님도 본문에서 자신에서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셨는데 이 인자라는 단어를 쓰실 때가 있어요. 그리스도가 자신을 향한 힘으로 주로 사용합니다. 인자는 인성을 강조합니다. 근데 인성을 가지신 분이지만 인간 그 이상을 의미할 때 이 인자라는 단어를 써요. 인간의 독특한 대표성을 강조합니다. 그냥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참된 인간으로서의 유일성을 강조할 때 이 인자. 근데 왜 여기에서 인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까? 그다음에 그거예요. 많은 사람을 대속물로,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오셨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요.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 전체를 내어 놓으셨습니다. 인자라는 말 안에 희생적인 섬김이 담겨 있어요. 그리스도는 당신의 전부를 던지신 것이죠. 여기서 섬김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은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희생적 섬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마가는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드러내 주려고 하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삶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게 뭐냐? 섬김. 근데 그 섬김은 온전한 희생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이게 이 섬김이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핵심적 가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섬김을 받았으므로 이제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섬기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섬길 것인가 섬김을 받을 것인가? 이거예요. 근데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딱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일평생 섬김을 받는 쪽으로만 살다가 끝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일평생 섬기는 자로 살다가 끝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세요? 섬김을 받기만 하면요, 그것을 우리는 소비적 인생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어린 시절은 누구나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엄마의 젖을 먹고 이유식을 하고 그야말로 엄마의 지극한 돌봄을 받죠. 그러나 조금씩 성장을 하면 달라져요.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하기 시작합니다. 철저히 의존적인 섬김을 받다가 이제 어느 정도 자립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으로 끝나면 안 되죠. 이제는 부모를 돕는 위치로 가는 거. 섬기는 위치로 바뀌는 것입니다.

[20:57]어릴 때는 부모의 섬김을 받고 스승의 섬김을 받습니다. 근데 그게 다 빚이에요, 여러분. 세월이 지나면 갚아야 돼요. 나도 누군가에게 그것을 베풀어야 된다는 거죠. 여러분, 나이 30 이전에는 도움을 받으며 삽니다. 참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 세계와는 다르게 진짜 긴 거 같아요. 참 많은 돌봄. 얼마나 많은 걸 쏟아 부어야 되는지 자식에게요. 30 이전에는 도움을 받으면서 더 빨리 끝나면 좋긴 하죠. 그러나 여러분, 30이 넘어서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쪽으로 조금씩 이동해 가야 되는 거.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사실 기준이에요. 여러분, 예수님은 30세 이후부터는 사생활의 끝이 나요.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과 정 반대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누가복음 22장 27절에서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사람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세상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공부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권력을 잡고요. 섬김을 받으려고 돈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면 성공이라고 부르죠. 그래서 세상의 구조는 올라가는 게 목적이에요. 올라가고 올라가서 지배하는 욕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섬김을 받기 위해서요. 열심히 섬기는데 알고 보면 목적이 섬김을 받기 위해서요. 처음에는 잘 섬겨요. 근데 어느 순간 섬김을 받는 자리에 앉고 나중에는 굴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기는 목적과 동기가 잘못돼 있는 거요. 세상은 섬기는 자를 낮게 취급합니다. 섬김을 굴종으로 여기죠. 힘 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섬겨야 된다는 논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세계관화 가치관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때 불안을 느낍니다. 섬기는 자로 사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하는 거요. 그러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 우리 롤 모델이세요. 가장 탁월한 삶을 사신 분은 그리스도세요. 그리스도가 섬기는 자로 사셨다면 우리가 불안해 할 필요가 없어요. 섬기는 자로 사는 것을 불안해 할 필요가 없어요. 섬기는 삶이 결단코 열등한 삶이 아니고 가장 탁월한 삶이에요. 세속적 성공을 추구한다면 그리스도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섬김을 받음으로 기뻐하는 삶이 아니라 섬길 때 주어지는 기쁨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알기 때문에요. 그래서 여러분, 리더십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포지션 혹은 자리에 중심을 두는 리더십이 있어요. 세상의 일반적인 리더십의 형태입니다. 포지션에 목을 매요. 내 직급이 뭐냐는 겁니다. 내 자리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직급이 오르면 톤이 목소리 톤이 달라지고 자세가 달라지고 그 힘을 과시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리더십은 직급보다 역할, 롤. 역할에 초점을 둬요. 그러니까 여러분, 직업 할 때 직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직이냐, 내가. 어떤 포지션이냐, 어떤 위치냐, 어떤 자리냐?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업, 일, 일, 내가 맡은 역할이 뭐냐는 거요. 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동원하여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합니다. 굴림형이에요. 표면적으로 사람들이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습니다. 역할에 초점을 맞춘 사람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아요.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동력하며 함께 비전을 이루어 가는 거예요. 올라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섬김이 목표라는 거죠. 전자의 리더십은 권한을 강조하는 리더십이고 후자는 책임을 더 강조하는 리더십입니다. 전혀 다른 길이에요. 자리를 추구하면 투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섬김을 추구하면 투쟁이 일어날 수가 없어요.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더 높은 자리를 탐합니다.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리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러나 섬김을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은 경쟁하는 곳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서도 여러분, 직분은 자리보다 역할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 직분이 섬김의 역할보다 명예를 추구하는 자리로 바뀌면 변질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사실 많이 직분이 변질돼 있어요. 크리스천 리더십은 오를수록 더 많이 섬기라는 부르심이에요.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양 떼를 치는 목동으로 섬기는 자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가 도망을 다닐 때도 모여온 아둘람 공동체의 사람들을 자기도 힘들지만 섬겼어요. 그들이 나중에 유대의 이스라엘의 개국 공신들이라는 거요.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결국 세우시는 거죠. 목자란 무엇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섬기는 걸 강조하는 거요.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섬김의 개념으로 봐야 합니다. 내가 어떤 직업, 어떤 직급에 있든지 섬김을 위한 기회로 봐야 돼요. 주어진 것은 모든 섬김을 위한 것입니다. 돈이 주어졌다면 돈으로 섬겨야 돼.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정치가 자기의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해야 된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섬기는 자로 살아갈 때 풍성해집니다. 삶의 모드를 섬김으로 리셋을 해야 한다는 거요. 자신을 위한 삶에서 공동체를 위한 삶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이미 여러분, 세상에서도 사회적 기업은 물론이고 일반 기업들도 섬김의 철학을 꽤 오래전에 가지고 왔어요. 수익만을 추구하는 기업들은 소비자에 의해서 금방 퇴출을 당합니다. 이제 소비자들이 더 똑똑해졌습니다. 세상을 섬기고 유익한 일에 기여하고 있는가? 이걸 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기업주들도 요즘 상당히 기부를 하고 있어요. 이게 일종의 운동이 되어 있는데 기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 압력도 있는 거예요. 섬김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배척을 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돈만 아는 기업의 물건을 소비자들이 더 이상 사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능 기부라는 말들도 여러분 하죠. 자신의 재능을 공공 제로 사용하라는 거요. 개인의 영광과 개인의 어떤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쓰지 않고 사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내어 놓는 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은 자세히 보면 내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끊임없는 우리 사회에 우리의 관계망 속에 섬김을 통하여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하늘이 툭 떨어진 게 아니에요. 나의 실력과 재능도 누군가의 지속적인 섬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빚이죠. 공공의 선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돼요. 굴림이 아니라 섬김의 리더십은 눈에 띄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안으로 여러분 들어가 보십시오. 모두가 지쳐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극심한 노동을 요구해요. 경쟁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누군가를 섬길 여유를 가지지 못합니다. 피곤하야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어해요. 모두가 나를 섬기라고 요구하죠. 그래서 오늘 시대를 우리는 소비주의 시대라고 얘기합니다. 소비주의가 지금 그에 달해 있는 시대예요. 너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라. 일하다 지친 당신. 스스로에게 주물을 막 외워요. 당신이 누릴 자유가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예배는 쇼핑은 예배 행위로 백화점은 예배당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거요. 그러나 여러분, 나를 섬길수록 더 공허해지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 살면 살수록 목은 더 말라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위한 소비로 힘을 얻는 게 아니라 삶의 에너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요. 무엇보다도 이웃을 섬길수록 질 높은 기쁨을 맛볼 수가 있어요. 반대로 여러분, 누군가에게 섬김을 요구해 보세요. 기쁨은 사라져요. 내가 기대하는 만큼 그 섬김이 오지 않으면 신경질이 나. 분노가 일어나. 여러분, 우리는 섬김을 받음으로 주어지는 영광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섬김의 자리로 내려갈 때 그곳에 하나님이 은밀하게 숨겨 놓은 비밀들이 있어요. 힘으로 여러분 굴림하는 자들은 불안한 것입니다. 현대인은 만성적인 불안 정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답이 뭔 줄 아십니까? 섬김이 답이라는 거요. 자, 섬김의 목적에 대해서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45절 하반절에 보니까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랬어요. 여러분, 대속물이라는 이 말은 쉽게 이야기하면 몸값이라는 말입니다.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자유를 주구하기 위해서 풀어주려고 하면 그 노예의 몸값을 누군가 지불해 줘야 되는 거예요. 그 지불하고 그 노예를 풀어 주는 겁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 우리를 죄로부터 풀어주 자유케 하시 귀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몸값을 지불하신 거요. 그게 십자가예요. 어마어마한 몸값을 지불하신 거죠. 우리의 편에는 구원이 공짜지만 그리스도의 편에서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신 거예요. 우리는 그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이 섬김은 너무 커서 표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이해하신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거예요.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이해한 사람은 그게 교리가 아니고 지식적으로 이론적인 게 아니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당신의 전부를 던지신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그 섬김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요. 그리고 이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신다는 거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가 섬김의 목표는 뭐냐? 그 섬김을 통하여 그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지를 위해서도 수고하고 이웃들에게 여러 가지 뭐 사랑을 표현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 뭐냐? 그리스도가 몸을 바치신 이유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래서 여러분, 선교지에 가서 병원도 세우고 학교도 세우고 다 하지만 그으로만 끝나면 안 되는 것이죠.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우리가 조금만 낮추면 할 일이 넘치고 넘칩니다.

[33:32]사람들 위에 굴림 하려고 하면 할 일이 없어져요. 그러나 섬기려고 하면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여러분, 코로나 이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우리 사회에 어려운 분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우리도 힘든 건 사실이지만 여러분 어려운 우리 이웃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이 퍼스트 코로나에 우리의 사회적 이 변화 가운데 하나는 개인주의의 심화를 많은 사람들이 얘기해요. 지금도 우리는 개인주의화된 시대를 살지만 더 심각한 개인주의화 될 것이다. 이게 우리가 전망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하나의 변화 가운데 리바운딩이 일어나는데 굉장히 뭔가 폭발하는 것들이 일어나는데 최근에도 여러분, 뭐 콤플리니까 미국 같은 데도 분노 쇼핑을 하는 거예요. 막 화가 나가지고 막 쇼핑을 하는 그동안 못 한 거 막. 못 한 게 그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막 그냥 욕구 불만이 막 표출되는 거요. 자기를 위하여 소비하는 문화가 더 강력해진다는 거요. 여러분, 오늘 이 사회가 굉장히 어려워지면서 그러면서 더 사람들은 소외되고 더 외로워지고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35:10]그런 이 코로나 팬데믹이 한국 교회 안에도 굉장히 어려움을 준 주고 있고 힘든 게 사실이에요. 지금 수도권도 예배를 지금 뭐 비대면으로 다 바뀐 상황이 이 4차로 오니까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일을 통해서 분명히 하시는 일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 어려운 이웃들에 대해서 한국 교회가 어떻게 섬김으로 나아갈 것인가? 지금까지도 우리는 많이 섬겼지만 하나님은 그 섬김에 머무르지 않고 희생을 하라고 원하시는 거요. 단순히 서비스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금 만족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 교회가 이 어려운 이웃들을 향하여 희생,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던지셨던 것처럼 우리가 그 희생의 섬김을 세상 가운데 드러낸다면 복음이 더 빛을 바라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역사에 들어오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우리가 높아지고 우리가 더 영광을 찾는 세속적인 어떤 힘을 가지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는 거죠.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성공은 섬기는 자의 삶을 살아가는 거요. 우리의 어떤 위치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상관없이 세상은 끊임없이 올라가려고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내려가 겸손하여 우리에게 맡겨진 영역 속에 내가 섬길 분량을 감당하는 일에 힘쓰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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